3.1운동 100주년 기념 특별기고 - 어떤 3.1운동을 기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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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기념 특별기고 : 어떤 3.1운동을 기억할 것인가

여러분의 머릿속에 3.1운동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아마도 어느 시골 장터에서 혹은 거리에서 한복을 입은 남녀노소의 무리가 태극기를 흔들며 일제의 총검과 대치하는 그런 장면이 가장 흔하게 그려질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가 실제의 모습을, 그리고 정신을 얼마나 제대로 담고 있는 것일까. 안타깝게도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3.1운동 하면 흔히 생각하는 상기의 이미지는 박정희 쿠데타 이후 정권의 정당성 확보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는 이전 이승만 정부 때 국가의 서훈과 포상이 반공포상 위주였던 것과 달리 박정희 정부 초기부터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훈 포상이 본격화 되었던 것과 정확히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그렇다면 실제로 1919년 3월의 풍경은 어떠했을까. 개설적인 이야기를 지금 다 풀어놓을 필요는 없다. 고종의 인산일에 태화관에서 33명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함과 더불어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고, 이는 한동안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는 그런 식의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다. 그런데 3월1일의 만세시위에 영향을 미쳤던 중요한 사건으로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 항상 언급될 정도로 3.1운동의 전개에 있어서 당시 학생집단이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1919년에 시위를 하다가 체포된 학생 중에 여성은 극소수였지만, 당시에는 교육이 주로 남성들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여학교의 비율은 아주 낮았던 것을 생각했을 때 여학생의 참여도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지역별로 여학생들의 3.1운동 참가 양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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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3월1일 독립만세운동을 재현했다 체포된 배화여고 학생들. 98년만인 지난 2018년 독립운동을 인정받았다.

 

서울에서는 3월 5일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만세시위에 주로 참여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화학당, 정신여학교, 경성여고보, 진명여고보, 숙명여고보, 배화여학교에서의 활동 등이 확인이 된다. 특히 동경 유학생으로 2.8독립선언에 참가하고 귀국한 김마리아가 서울 지역 여학생들이 모이는 구심점이 되었으며 이화학당에서는 박희도 목사가 중심이 되어 시위에 참여했고 김독실, 노예달, 신진심 유정선 등이 검거, 투옥되었다. 정신여학교에서는 채계복, 이성완이 독립선언서를 반입해왔으며 이아주, 임충실, 김경순, 박남인 등이 검거, 투옥되었다. 경성여고보에서는 박희도의 지도를 받던 최은희를 중심으로 김숙자, 김일조, 최정숙 등이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최은희가 구속되었다. 진명여고보에서는 이정희, 김영숙, 정희노, 최현실 등이 시위에 참여해서 경찰에 연행되었으나 방면되었다. 숙명여고보에서는 이은혜, 임종호, 조경민 등이 시위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배화여학교에서는 김정애, 김해라, 최은심을 중심으로 모임을 갖다가 3월 1일 학교 뒷동산에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24명이 체포되었으나 집행유예로 방면되었다.

평양에서는 숭의여학교와 숭덕여학교를 비롯하여 남산현교회의 여성 교우들을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숭의여학교 교사인 박현숙을 비롯하여 학생 권기옥, 김명덕, 김순복, 김옥석, 박정인, 배인수, 장정심, 차진희, 최순덕, 한선부가 시위를 위한 태극기 제작에 참여했다. 그리고 남산현교회 교우 안정석 등도 태극기 제작의 장소와 물품, 거사 비용을 제공하는 등 시위 준비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또 3월 4일에는 숭덕여학교에서 숭의여학교, 숭실중학, 평양고보 학생들이 연합으로 시위를 벌이는 등 시위가 활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숭의여학교 김옥석, 권기옥이 검거되었다. 평북 선천에서는 3월 1일에 보성여학교 학생 60명이 이웃학교인 신성중학교 학생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고, 1920년에도 보성여학교를 중심으로 3.1운동 일주년 기념만세를 불렀으나 학교 교사와 신성중학교 학생들만 검거해가고 여학생들은 방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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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영생여자중학교 교사 전창신과 학생들

 

 

함흥에서는 영생여자중학교 교사인 전창신이 학생들을 독려하여 함께 시위에 참가하였고 전창신, 이성눌 등이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다. 원산에서는 진성여학교와 누씨여학교 학생들이 3월 1일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그 중에 30여명이 체포되었다고 한다. 함북 성진에서는 보신여학교에서 여학생 20여명이 대중들을 선도해 만세시위를 부르다가 일경의 발포로 여학생 한명이 사망하고 54명이 체포되었다.

천안에서는 3.1운동으로 휴교되어 잠시 고향에 내려온 이화학당 학생 유관순을 비롯한 이들이 거사를 모의하여 4월 1일 삼천명 규모의 시위가 두 차례 거행되었고 두 번째의 시위가 격렬해지자 일제는 발포하고 무력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관순의 부모를 비롯한 18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30여명이 이와 관련되어 사망했다. 또한 천안의 양대에서는 양대여숙의 교사 임영신을 중심으로 양대 만세시위를 주동하였으며 아산에서도 영신여학교 교사 한연순과 이화학당 학생 김복희가 지역의 횃불시위에 동참하였다가 체포된 바 있다.

전주에서는 3월 13일 첫 만세시위 이래 4월 초까지 각지에서 시위가 일어났는데, 이 중에 기전여학교 학생들이 있었다. 이 중에 임영신, 정복수, 강정순, 길순실, 김공순, 김신희, 김인애, 송순이, 정월초, 최경애, 최금수, 최요한나, 함연춘 등이 체포되었다. 광주에서는 수피아여고에서 교사 박애순을 중심으로 진신애, 홍순남, 박영자, 최경애, 김화순, 민성숙, 고연홍, 임진실, 김양순, 양순희, 윤혈녀, 김덕순, 조옥희, 이봉금, 하영자, 강화선, 이나혈이 검거, 투옥되었다. 목포에서는 정명여학교 학생들이 영흥학교와 더불어 4월 8일에 만세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부산에서의 시위는 3월 11일 일신여학교가 주동이 되어서 시작되었다. 교사 주경애, 박시연을 중심으로 김응수, 김난출, 김반수, 김복선, 김봉애, 김순이, 김신복, 박정수, 송명진, 심의순, 이명시가 시위 계획을 알리고 태극기를 만들며 시위를 준비하였다. 이에 군중들도 호응하여 수백 명의 시위대가 만세시위를 했으며 교사 주경애, 박시연을 비롯한 11명의 학생들은 모두 체포되어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대구에서는 3월 8일에 신명여학교 교사 임봉선을 중심으로 학생 이선애와 함께 다른 학생들을 독려해 50여명의 학생들이 만세시위에 참여했으며 상기 두 사람은 검거, 투옥되었다. 마산에서는 의신여학교 교사 박순천이 지역의 여성동지들과 함께 거사를 일으켰으며 박순천, 박월선이 체포되었다.

살펴본 바와 같이 지역별로 여학생들의 활동 양상은 조금씩 달랐지만, 적어도 지역에서 예비적인 지식인 선도그룹으로서의 활발한 참여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지방의 경우 여학교가 먼저 앞장서서 시위를 조직하고 남학교와 군중의 참여를 유도하는 경우도 많았다. 거기에다가 당시 여학교는 남학교와 교육의 목표를 달리 하고 있었다. 상급학교 진학이나 취업을 목표로 하던 남학교와 달리 여학교는 교육 목표가 근대 교육을 받은 근대식 가정부인, 즉 현모양처를 길러내는 것에 있었기 때문에 교수 과목도 남학교와 전혀 다른 수예, 양재 등의 과목이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여학생의 활동 영역도 남학생과는 사뭇 달랐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 와중에 벌어졌던 3.1운동은 학교 울타리 안에 머물던 여학생들이 공적 영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여학생 중심으로 정리하다보니 여학교가 있는 지역, 주로 도시 중심으로 언급되기는 했지만, 여학교가 없는 지역의 여성들도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했던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3.1운동의 시위 양상은 매우 자발적이고 동시다발적이었으며 전국적이었던 것이다. 이들의 참여는 민족적 의분에 의한 것이었으며 민주주의 확산의 시발이었다. 어떤 이는 3.1운동에 대해 말하면서 그 운동이 직접적인 독립을 가져다주지 않았다고, 혹은 민족대표라던 33인의 인물 중에 많은 수가 후에 친일 변절을 했지 않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그러나 먼저 앞서 나갔던 대표적 인물들이 일부 변절했다고 3.1운동의 정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한편 3.1운동 직후부터 3월 1일은 하나의 민족적 기념일로 자리 잡았고, 앞에도 언급된 것처럼 1920년부터 3.1운동을 기념하는 기념식이 전국에서, 그리고 한인들이 거주하는 해외 각지에서 있었다. 이는 엄연한 일제강점기 상황에서 또 다른 시위의 양상을 보이기도 했고, 혹은 해외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대통합과 민족의식 고취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이렇듯 3.1절은 1919년의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이후로도 일제강점기 피식민 역사를 겪으면서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시키는 대중적 참여의 장으로서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 잡았다.

결국 3.1운동을 통해서 우리는 당시 민중의 열망과 희망을 볼 뿐이다. 이 운동에 참여했던 개개인이 특정 시기를 거치며 공유했으며 이후에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도 면면이 살아남아 숨 쉬고 있던 그 정신을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없이 그 정신은 해방 후에 현대사의 각종 정치적 굴곡을 겪으면서도 각 사람의 뇌리에 자리 잡아 이 나라가 아주 어긋나버리지 않도록, 4.19 정신으로, 1980년 광주의 정신으로,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정신으로 존재하고 있다. 즉 그들은 곧 우리인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3.1운동 백주년을 맞으시길, 그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서로 축하하시길 바란다.


일러두기 :
- 3.1운동에 참여한 학생들과 여성들의 이름을 다소 지루할 수 있음을 감안하고 전부 나열한 것은, 당시를 살았던 우리들의 잊혀 진 이름을 이 자리에서나마 한 번씩 상기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 3.1운동에 대한 전형화 된 이미지가 박정희 정권의 선전물로서 기능한 부분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가 필요하신 분은 박혜성,「1960-1970년대 민족기록화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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