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목 창립 10주년 - '서촌기행’ 돌아보기

posted May 12,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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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김창희
발행호수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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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9년 전 일입니다. 2014년 가을에 '서촌기행’의 첫 발을 떼었더랬습니다. 그저 한두 번 하면 되겠지 하고 시작한 것이, 웬 걸, 그 뒤 매년 봄·가을로 각각 한두 차례씩 답사를 계속해 2017년 가을까지 모두 아홉 차례 서촌 골목골목을 누비고 밟았습니다. 그 사이에 함께 해준 길목 조합원들과 가족·친지·지인들이 생각납니다.

 

이 '서촌기행’은 길목이 기획한 각종 기행 프로그램의 일환이었습니다. '국제평화기행’(오키나와, 베트남) 및 '국내평화기행’(갑오농민전쟁, 여수순천, 군산, DMZ)과는 별도로 '이야기가 있는 여행’(서촌, 성북동, 성곽)의 한 갈래로 마련된 것이었습니다. 앞의 두 범주의 평화기행이 다소 큰 주제의식을 전제한 것이었다면, '이야기가 있는 여행’은 그보다는 훨씬 가벼운 발걸음으로 우리 주변의 도시 지역을 살펴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중에서 '서촌기행’만 맡았고요.

 

서촌기행은 서울 경복궁의 서쪽 인왕산 기슭의 사직동, 옥인동 지역을 서너 시간 동안 산책하듯 답사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대개 토요일 아침과 오전의 햇살 속에 주말 한때를 즐긴 뒤늦은 점심 식사(대개의 경우, 대한민국 최고의 감자탕 집에서!)를 하고 헤어져 오후에는 각자 개인적인 일정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것은 2010년대 이후 조금씩 시도되기 시작한 '도시기행’ 또는 '도시답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보통 '답사’라고 하면 어딘가 지방으로 또는 심심산골로 단체버스를 타고 가서 절이나 고가(古家)를 찾아가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가 사는 이 현대식 도시에도 잘 보이지 않지만 찾아보면 그런 역사의 흔적이 대단히 많다. 많을 뿐만 아니라 잘 찾으면 더 귀중한 것들이다. 오히려 우리가 생활하고 직장 다니고 매일매일 밥 먹고 술 마시러 다니는 바로 그 현장에서 선인(先人)들은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무슨 일을 하고 살았는지 그 흔적을 찾는 게 더 중요하겠다’는 겁니다. 그런 생각에서 시작된 게 바로 '도시기행’이고 '도시답사’인 거지요.

 

서울의 서촌은 그런 일을 하기에 아주 적합한 장소였습니다. 지금은 불행하게도 카페촌으로 바뀌다시피 해서 아직 남아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사직단, 기린교, 박노수 가옥 등 정말 몇 가지에 불과합니다. 이런 것들이 지금은 도시 한 구석에 옹색하게 처박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잠시 머릿속에서 지금 주변의 고층빌딩들을 지우고 원래의 지리적 구조와 도시적 양상을 그려봄으로써 그 본래의 의미와 기능을 어렴풋이나마 복원해 보는 귀중한 기회였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지요. 지금은 아무 유적도 남지 않은 것 같지만, 상상의 눈을 잘 뜨고 보면, 특히 옛길과 옛물길이 보이는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 길의 주변에서 옛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산책하고, 왕자의 난을 일으켰는지, 또 왜 그랬는지, 그래서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현장에서 생각해 보는 일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요즘 많이 얘기하는 '장소성(placeness)’ 또는 '장소에 대한 감각(sense of place)’을 확인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대상으로, 현대인 중에서는 윤동주 시인과 이중섭 화가 같은 사람이 있었고, 조선시대 인물 중에선 화가 겸재 정선, 태종 이방원, 세종대왕, 안평대군 등이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선녀가 진짜 하늘에서 내려온 장소도 찾았습니다. (스포일러가 되지 않도록 그 내용은 생략!^^)

 

서촌 이야기는 한이 없겠지만 지금 그 내용을 복기하자는 자리는 아니니 이 정도로 그치겠습니다. 아무튼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도시기행이 우리의 선입견과는 달리 무진무궁한 이야기 보따리를 품은 귀중한 프로그램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운영하기에 따라 길목 같은 목적 지향적인 단체에서 대중성을 획득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기억하기에, 서촌기행에도 매번 대략 30~40명 정도의 인원이 참가했는데. 그중 대충 절반 정도는 교우·조합원이 아니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조합원이 동반해서 오거나 일반 공지를 보고 신청한 시민들이었던 겁니다. 길목이 대중화하고 생활화하는 데에 나름대로 기여했다는 뿌듯한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아쉬움도 없지 않았습니다. 두세 차례는 외부에서 무선수신기를 무상으로 빌려 상당히 고급스러운 해설과 가이드를 제공했지만, 그게 한계에 이르러 나중에는 제 목이 엄청 아팠던 기억도 있습니다. 제 목이 아픈 것은 저 스스로 조절하면 되는데, 자칫 엄연히 거주자들이 살고 있는 주택가 등지에서 소리를 높이는 것은 문제가 있기도 했고, 20명이 넘는 기행단의 통제도 어려워 조금 난감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이는 인원을 크게 늘릴 수 없는 도시기행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돌이켜 생각해 보면, 길목이 제공하는 메시지들이 조합원들(잠재적 조합원들까지 포함해서!)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다양한 층위의 프로그램을 개발할 필요가 있고, 그중에 이런 도시기행도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꼭 도시기행뿐 아니라 도시와 주변의 산을 연계하는 코스도 개발할 수 있을 것이고, 도시의 다크 투어(dark tour)도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길목이 10년 동안 이룩한 성과가 이처럼 한 단계 더 넓고 깊어지는 업그레이드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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