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뜬별 | 2023년 서울과 진도 추모 순례 - 세월호 9주기 기억

posted May 04,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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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일곱째별
발행호수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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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뜬별 | 2023년 서울과 진도 추모 순례 – 세월호 9주기 기억  

 

 

헤아릴 수 있는 기억으로만 벌써 4년째. 

해마다 4월이면 아프다. 

서울 남산 벚꽃 구경을 했던 2020년 사월 초 새벽 이후, 이비인후통과 그보다 더 아팠던 마음으로 걸었던 재작년 세월호 7주기 추모 진도 18번 국도 도보순례, 지옥 같던 고통의 늪에서 허우적댔던 작년 제주에서의 일주일, 그리고 코로나 19 바이러스보다 더 지독하게 긴 올해 3월 말부터의 감기몸살. 일 년에 한 번씩 호되게 아픈 때가 왜 하필이면 4월일까?

 

4.3 제주항쟁과 4.16 세월호 참사와 부모님 기일. 

사월은 그렇게 내게 죽음의 달이다. 

거기에 또 하나의 죽음이 더해졌다. 

 

작년 4월 제주에서 만나기로 했던 4.3 항쟁의 사진작가 고현주 씨의 작년 말 부고를 최근 [길목인] 고경심의 <띵동~ 왕진 왔어요>를 통해 알았다. 작년 2월, 정읍을 떠나기 직전 원조 정읍댁으로부터 고현주 작가를 소개받고는 만날 희망에 부풀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제주에서의 갑작스러운 일정 변경과 그로 인한 돌발사태가 없었다면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고 작가는 병원에서 막 퇴원을 했었고 나는 갈 수 없는 상태였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이, 영영 그 작가를 만날 수 없게 돼버렸다. 그렇게 4.3은, 제주는, 故 고현주 작가는 내 4월의 고통 속으로 또 하나의 칼날처럼 깊숙이 박혔다. 

 

진도에 가기 위해 낯선 도시의 모르는 병원에 갔다. 외출하지 말고 무조건 쉬어야 한다는 의사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약 처방을 받고, 거금 들여 소고기 안심 조각을 사 들고 집에 와 구워 먹었다. 기필코 그곳에 갈 기력을 마련하기 위해서. 약속은 지켜야 하니까. 

 

그 약속은 서울을 떠나기 직전, 그러니까 SCA 바리스타 파운데이션 자격증 시험을 보기 전 날 만난 니키와 한 것이었다. JPIC(Justice Peace Integrity of Creation, 정의 평화 창조 보존) 활동하시는 니키가 광주에서 서울에 올라오시며 갑자기 만나게 되었다. 

 

 

2023년 3월 18일 토 정동~시청~삼각지. 이태원~용산 11km

 

5년 전 전태일문학상 시상식을 했던 경향신문사 앞에서 우리는 만났다. 

그날은 올해 처음으로 벚꽃을 본 날이었다. 정동길에 꽃핀 벚나무 한 그루를 지나 서울시청 앞으로 가서 이태원 참사 희생자 분향소에서 조문을 했다. 

시청 앞에는 대통령 탄핵을 외치는 무리와 그 반대편 무리가 물과 기름처럼 대로를 사이에 놓고 갈라져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소음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나는 즉흥적으로 용산까지 걷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우리는 남대문과 서울역을 지나 삼각지까지 걸었다. 거기서 지하철을 타고 이태원으로 갔다. 

 

참사 141일째인 이태원 현장은 이전보다 많이 정리돼 있었고, 인근 상권은 간신히 일상을 되찾고 있었다. 참사 현장이었던 좁은 15도 경사 골목길을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다시 위쪽에서 아래를 보았다. 그날, 세계음식문화거리에서 인파에 휩쓸려 빨려 들어간 그 골목. 발이 땅이 닿지 않아 움직일 수 없는 채 호흡 곤란이 왔던 젊은이들. 옆 건물 비상계단으로 쓸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생존자의 천운이, 벽을 타고 올라갔던 외국인의 순발력이 다큐멘터리와 뉴스 장면으로 기억 속에서 재생되었다. 불가항 물리력으로 발생한 재난은 안전사고 예방지침이 있었다면 막을 수 있었다. 막을 수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참사였다. 

 

삼풍백화점 붕괴, 씨랜드청소년수련원 화재, 대구지하철 화재, 태안사설해병대캠프, 세월호 침몰, 가습기살균제 피해,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등 지금까지 참사는 계속되었다. 재난참사 진상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고 책임자 처벌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희생자에 대한 애도와 유족에 대한 연민보다 분열과 혐오가 팽배해 지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재난안전참사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망각하게 하고 재난안전대책제도의 중요성을 희석시킨다. 거짓은 늘 본질을 흐리며 쉽게 가라고 한다. 참은 항상 명확하지만 구현하기가 어렵다. 

 

이태원에서 녹사평을 거쳐 삼각지를 지나 용산역까지 걸었다. 

 

용산역에서 니키를 보내면서 4.16 진도 팽목항 순례를 제안했다. 니키는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화답하셨다. 예정에 없었지만,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 둘이 모이면 행동 역시 맞춤처럼 추진하게 마련이니까. 

 

그렇게 갑작스러운 만남으로부터 팽목항 순례가 기획되었다. 

그때는 십여 일 후부터 이렇게 오래 아플 줄 몰랐다. 하지만 날짜는 다가왔고, 그사이에도 엄청난 일들을 감당해내야 했던 나에게 쉴 틈이라곤 없었다. 과로와 스트레스. 병이 나을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지역을 넘어 이 병원 저 병원 몇 번이나 가고 비싼 영양제 링거까지 맞아도 낫지 않는 보름간의 오한, 미열, 기침, 인후두통. 그래도 가야 했다. 그래서 진도행 전날 <4.14 기후정의파업> 세종산업부 청사 앞에 가는 대신 병원으로 가서 진료받고 약 처방을 받았다. 낯선 도시의 병원과 약국에 환자는 나 혼자뿐이었다. 꼼꼼한 의사는 내게 무조건 쉬라고 했다. 그렇게 계속 밖에 다니면 병이 나을 수가 없다고. 친절한 의사와 약사의 태도가 낯선 곳에 막 정착한 내게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그 조언을 따를 수는 없었다. 

 

4월 15일 광주행 기차에 올랐다. 

광주역에는 니키가 기다리고 계셨다. 보름 넘게 감기몸살을 앓고 있는 내 몸은 뜨거운 국밥을 원했다. 황태국밥과 만두를 먹고 진도로 향했다. 

목포에 들어서자 앙상한 배롱나무가 중앙선 대신 도열해 있었다. 목포대교를 넘으며 그 배가 그대로 있을지 예정된 고하도로 옮겨졌을지 궁금한 만큼 목을 쭉 빼서 보았다. 저 멀리 녹슨 그 배가 그대로 있었다. 

신분증을 챙겨 방명록을 쓰고 그 배 가까이 갔다. 녹색 철조망에 매달린 노란 리본은 다 삭아서 빛도 형태도 잃은 채 끄트머리만 남은 게 태반이었고 체인도 녹이 슬어 있었다. 선체의 SEWOL 역시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남아있었다. 벌써 9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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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기억

 

 

녹슨 세월호를 본 후 차에 올랐는데 사거리에 카페가 한 채 우뚝 서 있었다. 점심밥도 사주시고 운전도 해주시는 니키에게 차를 대접하고 싶었다. 세월호를 보러 오는 이들에게 쉴 곳을 마련해 주는 줄 알고 고마워 물어본 개업 의도에 세월호 때문에 그 자리에 개업한 건 아니라는 카페 주인의 설명을 듣고 2층 창가로 올라갔다. 몸이 아파 커피를 마시지 못한 지 3주, 레몬차를 마시며 정면에 보이는 세월호를 보는데 기분이 매우 묘했다. 마치 핵발전소 근처에 있는 캠핑장이나 카페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목포신항이 있다고 해도 분명 관광 장소가 아닌데 화려한 샹들리에가 있는 카페 전면 통창으로 세월호를 바라보는 게 가슴이 미어지며 울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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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기억

 

 

2023년 4월 16일 일 진도 팽목항~기억의 숲~팽목항 11km

 

진도로 향했다. 

진도에는 관지의 하얀 집이 있다. 

하죽도에 전도사로 계시는 관지가 집을 제공해 주셨다. 

노란 유채꽃이 가득한 진도의 하얀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팽목항으로 향했다. 

니키가 팽목항에서부터 4.5km 거리 기억의 숲까지 걸어갔다 오자고 하셨다. 좋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진도국제항 건설로 철거 명령을 받고 있는 세월호 팽목 기억관은 아직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조문 후 팽목항 빨간 등대로 향했다. 

9년 전 입구에 설치된 철제조형물 2014.41 다음의 6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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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9주기 이후 강풍으로 쓰러졌다는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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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기억

 

 

등대로 걸어가면서는 언제나 긴장한다. 2년 전 걸어놓고 온 세월호 리본이 그대로 있는지 확인하러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빨간 등대의 노란 리본은 하얗게 바래졌다. 그 아래 묶여있는 내 리본은 다행히도 빛바래고 탁해졌지만 굳건히 매달려 있었다.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습니다’

 

현수막의 글처럼 이른 벚꽃은 졌어도 그날의 참사를 잊을 수는 없다. 그리고 그날을 기억하는 우리의 마음 또한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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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팽목항 기억

 

 

등대를 뒤로 하고 나오다가 들어갈 때 본 커피무료제공 좌판 앞에 섰다. 앳된 여성과 중년 남성 중 여성에게 물었다. 

 

“어디서 나오셨어요?”

“개인적으로 나온 거예요.”

 

나와 같은 사람이었다. 강진에서 왔다고 했다. 아버지가 9년째 해마다 이곳에서 무료로 커피와 음료를 제공하신다고 했다. 마침 자리에 안 계신 아버지 대신 딸과 아버지의 지인 동생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중이었다. 목마르진 않았지만 그들의 성의를 봐서 무언가 마셔주고 싶었다. 믹스커피와 코코아와 과자가 있었다. 건강상 커피를 못 마시니 코코아를 주문했다. 빛바랜 노란 벤치에 바람막이를 하고 그 아래 휴대용 버너 두 개 위에 양은 주전자가 올려져 있었다. 코코아를 담은 건 일회용 종이컵이었지만 마다하지 않았다. 옆에 비치된 노란 캠핑용 의자에 앉았다. 설명하지 않아도 사고지점을 보라는 의도임을 서로 알고 있었다. 지나치게 다디단 코코아를 겨우 마시는데 참고 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건 슬픔이 아니었다. 함께 기억하고 있다는 고마움, 9년 동안 4월 15일과 16일이면 그 허허롭게 휑한 곳에서 거친 바닷바람 맞으며 서 있었을 수고와 헌신에 대한 경의였다. 

 

“고맙습니다.”

 

악수를 청하고는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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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봉사 기억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기억의 숲으로 걸었다. 한참을 걸어가다 보니 길가에 참새 주검이 있었다. 니키는 앞서 가시고 있었고, 나는 몇 발짝 가다 되돌아 왔다. 배낭을 열어보니 편지지 한지가 있었다. 장갑을 끼고 초록색 한지로 참새를 싸안아 들었다. 예상보다 묵직했다. 근처 폐허에 진도홍주 사기 조각이 있었다. 한지로 싼 참새 주검 위에 사기를 덮어 주니 국립나주박물관에서 본 옹관 같았다. 

진도에선 작은 죽음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그건 걷다가 생긴 습관이기도 하다. 발밑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고 가까이 나무와 밭부터 멀리 산까지 관찰하는 건 순례자의 익숙한 행동이다.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차소리에 귀를 기울임 역시 그러하다. 발바닥으로 땅을 꾹꾹 밟으며 가다 보면 육체 감각이 본능적으로 민감해진다. 마음 역시 낮아지고 기름기가 빠진다. 참새든 유채꽃이든 나와 마찬가지인 하나의 생명체로 보인다. 모든 죽음에는 예의를 갖춰야 한다. 한 생을 살다간 생명에 대한 존중이다. 

 

팽목항에서부터 4.5km를 걸어 정오쯤 기억의 숲에 도착했다. 

304그루의 은행나무와 기억의 벽은 그대로 있었다. 기억의 벽 뒤 은행나무에 노란 리본을 묶었다. 나무가 자라면 꽉 낄까 봐 헐겁게 묶어주었다. 리본이 꽉 낄 만큼 자라기 전에 다시 오기를 바라며.

그 앞 정자에 앉았다. 그리고 각자 챙겨 온 간식을 나눠 먹었다. 그때 저 아래 입구에 대형버스가 도착했다. 많은 사람이 내렸다. 오후 한 시부터 추모제를 한다는 공지 소리가 들렸다. 우리도 동참하기로 했다. 

 

팽목이장님은 9년 전 그날 아침, 전원 구조라는 오보를 들었다고 하셨다. 그랬었다. 우리가 들었던 보도는 거짓이었다. 그리고 그날의 진실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강진시민모임과 성요셉상호문화고등학교생과 수녀님이 노래와 오카리나, 클라리넷, 기타 연주와 추모편지 낭송을 했다. 언덕 아래에 앉아있던 나는 고개를 돌렸다. 저만치 황량한 진도의 봄이 바람을 타고 돌고 있었다. 천 개의 바람은 구천을 떠돌고 있을까, 어딘가에 안식하고 있을까. 벚꽃은 이미 졌고 유채꽃 만발한 진도에서는 음악마저 윤기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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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기억

 

 

사람들이 팽목항까지 걷는 ‘팽목바람길’에 함께했다. 가는 길에 콜텍 투쟁에서 본 적야를 만났다. 13년의 해고기간 동안 셋 남은 콜텍 노동자들이 투쟁을 끝낸 날은 2019년 4월 22일, 임재춘의 단식 42일째였다. 

작년인 2022년 2월 25일 한진중공업 37년 해고자 김진숙 명예복직 기념식에서 만난 이수정 감독으로부터 영화 ‘재춘언니’ 시사회 초대를 받았었다. 그런데 시사회가 있던 3월에 나는 모든 의욕을 잃고 귀정사에서 은둔하고 있었다. 그때는 세상으로 나가기 싫었다. 그때 갔더라면……. 임재춘 조합원을 한 번 더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이 글을 쓰는 지금 찾아본 콜텍 기사에서 그는 작년인 2022년 12월 말 ‘별세’라는 헤드라인으로 검색된다. 마지막 최장기 단식으로 노사합의를 이끌어냈던 그. 13년 만에 명예복직과 동시에 퇴직 후 나머지 두 명과는 다르게 일자리를 찾았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었다. 아담한 그의 털털한 음성과 소박한 웃음이 기억난다. 그래서 현장에서 사람들이 그를 ‘재춘언니’라고 불렀을 터. 모진 인생 끝에 임재춘이 가고 넉 달만에 나는 그를 추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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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바람길 기억

 

 

팽목항 9주기 기억식은 오후 3시 16분에 시작했다. 4시 16분에 마치기 위해서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작년에 왔던 전국금속노조에서 올해도 무료로 음료와 음식을 나눠주고 있었다. 어묵을 먹고 옆을 보니 재작년에 나주에서 만났던 3M 해고 노동자가 작년에도 그곳에서 봤는데 또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하며 물었다. 

 

“복직하셨어요?”

“아직이요.”

“네? 아니 그럼 몇 년째예요?”

“13년이요.”

 

맞다. 그는 2021년에 3M에서 마지막 남은 11년 된 해고 노동자였다. 그런데 아직도 복직되지 않은 것이었다. 금속노조 타 지부에서 15년 만에 복직된 선배가 있고, 자신이 그다음이라고 했다. 13년이면 콜텍과 맞먹는다. 곧 14년이 된다. 복직은 언제 될까? 그 역시 최장기를 기록해야 하는가. 그럼에도 그는 해마다 팽목항에 나와서 웃음으로 방문객들에게 먹을거리를 나눠준다. 내게도 따뜻한 가래떡 두 줄을 건넸다. 점심밥을 못 먹었기에 요긴했다. 금속노조가 왜 세월호와 연관이 있느냐고 궁금해하는 이들이 있다. 인권 지킴과 애도에 소속과 직업은 아무 상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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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길의 기억 

 

 

세월호 9주기 기억식은 어린이문학작가들과 강진군민 위주로 진행되었다. 지난 8주기보다도 사람들이 적었다. 

‘세월호는 점점 기억에서 멀어지고 있는가. 내년 10주기에는 조금 다르려나. 그때는 이름난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모여 현수막 들고 사진을 찍고 가겠지. 그들보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이름 없고 빛도 없는 이들이 더 아름다우리.’ 

그렇게 쓸쓸한 마음으로, 전국의 기억식에서 울리는 오후 4시 16분 사이렌과 함께 묵념을 하고 팽목항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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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9주기 기억 

 

 

스산한 여운으로 다음 날까지 비척이던 월요일 오전에 문자 한 통이 날아들었다.

 

‘교수님, 저희 팀이 세월호 추모영상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게 되어 기쁜 마음에 연락드립니다!! 교수님의 좋은 조언과 지도가 이끌어준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아아~ 세월호에서 사라진 별들보다 어린 내 학생들이, 그땐 아직 어려서 그 참사가 무언지도 몰랐을 아이들이, 얼굴도 모르는 언니 오빠들을 기억하며 만든 추모 영상이 세상에 나왔단다. 내가 슬픔에 잠겨있을 때 밤새며 기획하고 촬영하고 편집하고 후반 작업했던 학생들. 비록 나는 작고 볼품없지만, 다음 세대까지 이 기억이 이어지도록 하는 데 일조했다면 그것으로 현재의 최선이 아닐까. ‘너를 보내고’ 내 슬픔이 비로소 위안으로 감싸진다. 세월호 참사 9주기, 진심으로 감사와 고마움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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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와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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