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째별의 다큐 이야기] 탈핵 이야기 15 - 2021년 겨울과 봄 사이 탈핵도보순례, 다시 화진(華津)

posted Mar 3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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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별의 다큐 이야기] 탈핵 이야기 15 - 

2021년 겨울과 봄 사이 탈핵도보순례, 다시 화진(華津)  

 

 

뿌옇게 뜨는 해를 응시하며 등원해서 감빛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며 하원하는 생활을 한 달여쯤 한 어느 날 아침, 강의실에 자리 잡고 앉았는데 한국작가회의에서 부고문자가 왔다. 

  ‘백기완 시인 별세’ 

내가 알고 우리가 아는 그분이셨다. 1교시 쉬는 시간에 바깥에 나가 울었다. 그렇게 8교시까지 한숨과 눈물어림 속에서 하루를 보냈다. 그날 밤, 탈핵 벗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임을 위한 행진이든 탈핵도보순례든 걷자고. 그리고 종강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출발했다. 

 

2021년 2월 마지막 날인 28일, 네 개의 시도를 거쳐 다다른 출발 지점은 울진 망양정이었다. 

울진 망양정은 성원기 교수인 톰을 중심으로 한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가 끝난 후, 내가 혼자라도 걷겠다고 나선 순례 길의 첫 출발지였다. 일 년 만에 다시 그 자리로 오니 그동안 일어났던 수많은 작은 역사들의 감회가 뭉클뭉클 솟아났다. 나는 ‘핵 없는 세상을 위한 기도문’ 전에 송경동 시인의 ‘백발의 전사에게-백기완 선생님 영전에 드리는 시’를 낭송했다. 

 

‘……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온몸이 한 줌 땀방울이 되어

저 해방의 강물 속에 티도 없이 사라져야 하느니 

딱 한 발 떼기에 일생을 걸어라 하셨죠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서야 한다 하셨죠

저항은 어떤 잘난 이들이 대행해주는 것이 아니라

여린 풀들이 숲을 이뤄 서로를 일으켜 세우고

세찬 바람에 맞서 한걸음씩 나아가는 거라 하셨죠

……’

 

그렇게 한걸음을 떼었다. 일 년 전엔 북쪽으로, 이번엔 남쪽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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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팔경 중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 망양정

 

 

첫날, 망양정~기성항 21.5km

오랜만이었다. 지난여름 이후 가끔 청와대 앞에서 보던 친구들과 동해 북파랑길을 함께 걷자니 우리가 처음 만났던 3년 전부터 이어온 시간들이 떠올랐다. 우리는 나이·성별을 막론하고 평등을 표방하며 별명을 불렀다.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의 급작스런 해체 뒤 각자 살고 있는 곳에서 탈핵 운동을 하고 있지만 내가 걷는다고 하면 어디든 와 주는 벗들과는 만남이 쌓일수록 우정도 돈독해졌다. 

이번에 만난 울진은 대게의 고장이었다. 우리는 대게 상 앞에서 대게 춤을 추는 오십 대와 칠십 대의 재롱에 배를 잡고 웃으며 너나할 것 없이 장난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하지만 마음이 아무리 젊어도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순 없으니, 삶이 탈핵투쟁인 청명은 맨 앞에서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고 설명하며 시종일관 씩씩했지만 니키와 나는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특히 나는 한 달 반 가까이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만 있다가 준비운동 없이 걸으니 10km가 넘으면서 관절이 이상신호를 보냈다. 겨우겨우 고개를 넘고 있는데 사순절이라 혼자 지내겠다던 관지가 노래를 보내왔다.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치 아니하며~’

 

아~ 관지의 목소리는 매우 아름다웠으나 종일 걸은 나는 무척 피곤했다. 막바지에 가서는 왼쪽 다리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서혜부 통증이 심했다. 보다 못한 으낭이 길가에 있는 알루미늄 막대를 꺾어 지팡이로 쓰라고 주었다. 내 배낭도 출발한지 얼마 안 돼서부터 그가 메고 있었다. 모두의 짐이 되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전에 없던 상황이 벌어졌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무조건 종착지까지 가야 했고 대신 걸어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인생이 그런 것처럼. 하지만 아픈 다리를 끌고서도 기어이 그날의 목표지점인 기성항까지 도착했다.  

 

첫날, 니키의 소망이던 야영을 했다. 지원 한 푼 없이 자비량으로 하는 도보순례이니 최대한 아껴야했다. 하지만 갓 지은 밥과 막 끓인 된장찌개는 꿀맛이었고 텐트 안은 거친 바닷바람 속에서도 아늑했다. 그곳에서 나눔을 했다.  

니키는 고맙고 반갑고 기쁘고 느닷없이 불러도 시간되면 꼭 오겠다고, 으낭은 니키와 걸으며 나눈 인생 이야기가 좋았다고, 청명은 자만과 우정에 대해 그리고 일상이 또 어떻게 환희에 찰까하는 재미에 대해, 나는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김진숙의 희망뚜벅이 행진 마지막 날 연설을 들려주었다. 적어도 ‘저 혼자 강을 건너고 뗏목을 태워버린 자’는 되지 않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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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걷는 탈핵 길 

 

 

둘째 날, 기성항~후포해수욕장 21.6km

월요일인 둘째 날에는 아침 일찍 월성핵발전소 이주대책위 상여시위에 참여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공휴일이라 시위가 없다고 해서 가던 길을 이어갔다. 

하루 종일 비가 왔다. 삼일절 노래를 부르며 출발한 아침엔 걸을만했지만 점심식사 후부터는 세찬 비였다. 그래도 니키가 사 준 도토리묵과 곤드레 밥과 북어미역국 등 산사랑 한식은 잠시나마 비를 잊게 할 만큼 맛이 있었다. 

전날부터 다리가 아팠던 나는 이튿날도 회복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우비에 우산까지 장착하고 거침없이 걷는 청명 뒤를 따랐다. 그 뒤로는 니키가 첫날보다 양호한 걸음으로, 마지막에는 으낭이 든든히 걸어왔다. 

마침내 후포항에 다다랐나 싶었는데 거기서 해수욕장까지는 2km를 더 걸어야 했다. 보통 다 왔다 싶은 데서부터 끝까지는 걸어온 이상으로 힘이 든다. 그 끝에서 우리는 헤어져야 했다. 떠날 친구들에 대한 고마움을 어떻게든 갚고 싶은 마음에 잠시 눈이 어두워진, 남아야 할 우리는 방송 탄 음식점에서 바가지를 옴팍 썼다. 그리곤 그날 이후 하루 한 끼 매식으로 보충해야만 했다. 하지만 어떤 식탁에서도 나눔은 필수였다. 

청명은 즐겁게 사니까 즐거운 일이 벌어진다고 했고, 으낭은 사람에겐 불편한 비지만 자연에겐 생명력을 주기에 필요하다고 했고, 니키는 느닷없는 장소와 사람 덕분에 신비롭고 그 신비로움은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고 했다. 나는 언제나 모든 일을 혼자 해내려는 습성이 있었는데 넷이 걸으니 1/4만 힘이 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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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와도 즐거워요

 

 

셋째 날, 후포해수욕장~축산항 22.7km

밤새 내린 눈이 아침이 되어도 그칠 줄을 몰랐다. 전날 푹 젖어 밤새 말린 등산화를 또 적셔야 했다. 이틀 내내 다리 통증으로 힘들었던 나는 빗길보다 더 힘든 눈길을 어떻게 걸을까 걱정하며 파스를 덕지덕지 붙였다.  

도보순례에서 눈은 절대 낭만이 아니다. 그런데 으낭이 해변 눈밭으로 뛰어가더니 생쥐처럼 오종종한 걸음을 걸었다. 멀찍이서 가만히 기다렸다. 마침내 과업을 마친 그가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다가가 보니 글씨가 쓰여 있었다. 

  ‘탈핵’

도보순례 세 번 만에 자나 깨나 ‘탈핵’ 생각만 하게 되어버린, 타고난 탈핵전사의 퍼포먼스로 셋째 날 순례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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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핵’

 

 

겨울바다는 광대하고 강력하게 지침 없는 파도를 밀어댔다. 오고 가고 또 오는 끊임없는 힘의 순환을 보면서 영원한 사랑을 생각했다. 인간의 배신과 절연에도 상관없는 신의 사랑이 그러할까? 한 때 그 사랑에 투신했던 적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야 믿음이란 말에 매달려 순교라도 할 각오였던 어리고 젊었던 날, 부족함 없는 완전한 사랑을 받고 싶어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대상을 향해 미친 듯이 사랑을 고백했던 날들. 그 몸부림 끝에 나는 무엇을 만났던가? 뫼비우스의 띠 같은 말씀은 아득하기만 한데 눈에 보이는 광활한 바다조차 아주 작은 일부인 온 우주를 만드셨다는 신 앞에서 나는 얼마나 티끌만도 못한 존재일까? 그런 미약한 인간인 주제에 생명을 위협하는 핵발전소 대신 거센 파도의 힘을 이용한 대안에너지로 지구를 지킬 방법이 없을까 막연히 궁리하며 걸었다. 하지만 모래사장에 오롯이 서있는 갈매기나 나나 신의 입장에서 보면 뭐가 그리 다를까? 풍광에 호사하는 눈은 눈대로, 배는 배대로. 새우깡 한 조각 없는 바다의 갈매기처럼 배가 고팠다. 

마침 식당 하나를 겨우 찾았는데 허기져 보이는 손님 행색 때문에 일부러 개시하려는 듯한 주인에게 갈비탕 소고기 원산지를 물었다. 으~ 미국산. 나는 2008년 광우병 파동 이후 민족 자존심을 내세워 미국산 소고기를 먹지 않는다. 고기 뺀 갈비탕을 달라는 나를 으낭이 나오라고 했다. 나는 가끔 의도하지 않아도 여러 사람 민망하게 만드는 데 타고난 소질이 있는 것 같다. 미안함으로 어색한 길을 좀 더 가니 한식 뷔페가 나왔다. 그곳은 관광지도에 등극시키고 싶은 식당이었다. 이름 하여 ‘칠보산 휴게소’. 우리는 9천 원에 하루치 밥을 거기서 다 먹었다. 바다를 보며 배터지게 먹는 기분은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순례에 수저와 컵은 필수. 커피 값도 아까워 봉지커피를 스텐 컵에 타마셨지만 포만감은 여느 부자 못지않았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라는 성경말씀이 딱 맞았다.  

 

하지만 차로 왔던 니키가 떠난 후 한 가지 고민이 있었으니 두고 온 차를 어떻게 가져오나였다. 도보순례를 하는 지역엔 대부분 대중교통수단이 별로 없다. 그러니 짐 실은 차를 두고 가냐 먼저 종착지에 차로 두고 돌아와서 걷느냐가 매일의 문제였다. 이날은 대진해수욕장까지 걸어가서 지나가는 버스를 기다려 타고 영해버스터미널로 갔다.  

대합실에서 후포해수욕장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한 할머니가 내 몸 자보를 유심히 보심을 눈치 챘다. 할머니 표정이 온화했기 때문이었는지 나는 모처럼 핵발전소를 줄이기 위해 전기를 아끼자는 설명을 성심껏 해드렸다. 가뭄에 콩 나듯한 귀한 소통으로 기분이 한껏 좋았다. 그러나 버스에 오르면서 불친절한 기사로 인해 마음이 엉망이 됐다. 그때부터 기침이 나오기 시작했다. 자신의 말 한 마디가 모르는 누군가의 기분을 그렇게 망칠 수 있다는 걸 의식한다면 어느 누구도 함부로 말을 내뱉진 못하리라. 나또한 그런 적이 얼마나 많았을까 반성하며 그 기사가 직전에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보다 각본까지 써가며 마음을 다스리려 했지만 기침이 멎질 않았다. 바닷가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찬바람을 맞은 데다 마음과 몸이 유독 긴밀하고 예민한 탓이었던 것 같다. 

 

후포해수욕장으로 가서 차를 가지고 다시 대진해수욕장 앞으로 갔다. 가면서 축산항까지 남은 8km를 어떻게 만회해야 하나 고민했다. 지난 이틀간도 간신히 걸었는데 계속 바닷바람을 쐬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남은 일정을 장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코로나19 바이러스 정국 아닌가. 그때 으낭이 차에서 내려 뛰기 시작했다. 남은 나는 차를 맡아야 했다. 그렇게 남은 거리를 으낭 2km, 나 1km씩 번갈아 이어달리기를 했다. 걷기도 버거운 다리에 무거운 등산화를 신고 마스크까지 쓰고서. 누가 시킨다면 절대 못할 극한 체험이었다. 뛰면서 땀이 나니 기침이 멎었다. 결국 우리는 저녁 6시가 다 돼서 3일차 종착지인 축산항에 도달하고야 말았다.     

 

넷째 날, 축산항~강구항 20.2km

출발하려는데 기쁜 소식이 왔다. 삼척에서 톰이 출발했다는 것이었다. 순례 후 며칠이 지나도  딱히 온다는 소리가 없어 포기할 때쯤이었다. 우리는 톰을 만날 생각에 신이 나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쯤 가다 갑자기 불안이 엄습했다. ‘내가 자동차 문을 잠갔던가?’ 다리 아픈 나대신 으낭이 차까지 왕복 2km 정도를 다녀와야 했다. 한 걸음이 아쉬운 처지에 불행 중 다행으로 차 문이 열려있었더란다. 이제 노화가 시작된 게야. 걸으면서 행복할 때마다 늘 드는 생각, 앞으로 얼마나 더 걸을 수 있을까? 관절에 문제가 생기기 전에 뇌에 이상이 생긴다면 그 또한 문제다. 조기치매예방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할 나이가 된 것이다.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의 원조 톰이 온다기에 느긋해진 우리는 청룡과 백호의 기운을 받는다는 경정리에서 잠시 앉아 보았다. 눈을 감고 팔을 벌리고 손을 펴서 대자연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았다. 따스한 햇살, 생동감 넘치는 바닷바람, 시원한 파도소리를 세포마다 가득가득 채웠다.  아픈 신체가 나을 것만 같았다. 상한 마음이 치유되는 듯했다.      

 

잠시 후 길에서 톰을 만났다. 대체 얼마 만인가? 2019년 여름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를 해체하고 2020년 2월, 나와 으낭이 울진에서 삼척까지 걸을 때 장호항에 잠깐 들렀던 그는 그 때 우리가 지나오며 가슴아파했던 맹방 명사십리를 살리기 위해 지난여름부터 삼척우체국 앞에서 매일 삼척화력발전소 반대 피켓시위를 하고 있었다. 

올 2월, 강원대학교에서 정년퇴직을 한 그는 배낭에 깃발을 꽂고 청년처럼 선두에 섰다. 언제 보아도 시원스런 전문도보순례자의 걸음이었다. 나는 골반 통증에도 불구하고 그의 뒤를 졸졸 따랐다. 그리고 그와 삼척시민들이 핵발전소 반대 투쟁에 이어 화력발전소도 기어이 못 짓게 할 역사적 행보를 들었다. 우리의 탈핵도보순례에 어울리듯 대안에너지원인 풍력발전기가 영덕 언덕 위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톰은 아침식사도 못한 우리에게 물가자미 정식을 사주고는 조금 더 걷다가 삼척우체국 앞 오후 5~6시 시위에 맞춰 돌아갔다. 삼척화력발전소 건설공사는 톰이 투쟁하는 한 언젠가는 중단될 것이다. 그러면 일 년 전 내가 기댔던 맹방해변 벼랑 위 소나무는 더 이상 한숨을 쉬지 않겠지.    

 

톰이 가는 길에 나를 축산항에 내려주었다. 차를 가져오는 왕복 1시간 동안 으낭은 얼마나 빨리 걸었는지 6.4km 중 1.7km를 남겨놓고도 나대신 700m를 더 걸었다. 그러더니 1km를 남겨두고 나서야 대장님이 걸으시라며 운전대를 잡았다. 나라면 기왕 고생했으니 겨우 남은 1km까지 마저 걸어 생색을 냈을 것이다. 첫날 니키의 걸음이 느리자 함께 뒤에서 걸었을 때나, 둘째 날 청명이 관광버스 춤을 출 때 쌍쌍파티를 열어주었을 때나, 넷째 날 식당에서 톰의 개인접시 이가 나간 것을 슬그머니 자기 것과 바꿔 줄 때처럼 그는 나를 위해 마지막 코스를 양보했다. 덕분에 나는 지친 어깨에 몸 자보를 앞뒤로 달고 강구항까지 걸어갈 수 있었다. 어찌나 터덜터덜 걸었는지 대게 집 앞마다 서있는 호객요원들도 나를 쳐다만 볼뿐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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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서 나가니’

 

 

다섯째 날, 강구항~화진해수욕장 16.6km 

마침내 마지막 날, 종착지인 화진해수욕장으로 가는 날이었다. 

나는 화진이 화진포인줄 알고 지난여름 고성 화진포에 갔었다. 그러나 그곳이 화진이 아님을 알고는 지난가을 혼자 포항 월포에서부터 걸어서 화진에 갔다. 

2019년 여름-고리핵발전소에서 월성핵발전소까지, 2020년 겨울-울진에서 삼척까지, 2020년 여름-삼척에서 고성까지, 2020년 가을-포항 월포에서 화진, 월포에서 칠포, 그리고 2021년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울진 망양정에서 포항 화진까지, 그렇게 7번국도 해파랑길을 걸어서 이어갔다. 

 

전에 올랐던 전망대는 그대로 있었다. 나는 정류장 근처에 새로 생긴 가게에서 지난번과 똑같은 캔 커피를 사왔다. 그 사이 으낭은 내가 하루 종일 짚고 온 스틱에 몸 자보를 깃발처럼 꽂아, 내 것이었지만 닷새 내내 자신이 메고 온 배낭 옆에 세워 두었다. 기념촬영을 하고는 전망대에 올라갔다. 

화진의 ‘화’는 <곽재구의 포구기행>에서 말한 꽃 화(花)가 아니라 꽃이 필, 빛날 화(華)였다. 오히려 꽃 화(花)는 화진포(花津浦)의 ‘화’였다. 그러나 그러건 말건 곽재구는 ‘이곳에 오면, 이곳에서만 피어나는, 참으로 아름답고 눈부시고 장엄한 꽃들의 화엄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꽃같은 파도가 잔잔히 밀려오고 또 밀려왔다.   

 

겨울꽃은 지고 봄꽃 찬란히 피어라.’

 

바다 끝자락 하얀 꽃무리를 보며 2021년 겨울에서 봄 사이 탈핵도보순례 마지막 나눔을 했다. 

으낭은 나흘간 걸어오면서 본 바다가 투쟁이었다면 화진의 바다는 그것이 승리든 승리가 아니든, 다 이루었는지 이루지 못했는지, 무언가를 이룬 바다라고 했다. 그때 나는 김진숙 복직 투쟁을 생각했다. 이어서 그는 거기까지 이끌어 온 대장인 나에게 치하를 했다. 

닷새간 102.6 km. 끝까지 걸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던 다리 상태로 내가 완주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벗들 덕분이었다. 특별히 홀로 시작한 도보순례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함께한 으낭은 다시 걸어도 역시 최고의 도반이었다. 내 소감은 순례 첫날 낭송했던 송경동 시인의 ‘백기완 선생님 영전에 드리는 시’ 일부로 대신한다.    

 

‘……

그러나 그 외로움마저 

전사들의 유산이라면 달게 받겠습니다

그 끝없는 분노와 서러움마저 

전사들의 긴요한 양식이라면 거부하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흘린 땀과 눈물이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새로운 인간해방의 밑거름이 되어

모든 생명들의 소외와 고통이 사라지는 그날까지

우리가 저 낮은 거리와 광장에서 맺은 우정은

사랑은 결의는

끝내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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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과 봄 사이에서

 

 

일곱째 날 

여독이 채 풀리지 않은 3월 6일 토요일, 마석 모란공원으로 갔다. 

노동자시인 조영관 14주기 추모제와 제11회 조영관 문학창작기금 수혜식이 있었다. 7회 수혜자인 나는 인생이 바뀐 그해부터 걷기 시작했다. 4년간 도보순례만 1,550 km가 넘었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걷고 싶다. 좋은 사람들과 웃으며 걷고 싶다. 

조영관 시인 묘소에서 바라보면 오른쪽 건너편에 전태일 열사 무덤이 있고 그 왼쪽 옆에 백기완 선생님께서 계신다. 고(故) 조영관 시인의 ‘산제비’를 시 중의 시로 치셨던 선생님, 그래서인지 조영관문학창작기금 수혜식 때마다 오셨지만 유독 내가 수혜할 때만 촛불집회 때문에 못 오셨던 선생님,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서나니’라고 하셨던 선생님께 참배를 했다. 선생님의 부고를 받고 시작한 이번 순례에서 이보다 더 완벽할 수는 없었다.  

 

<두 어른>에 실린 백기완 선생님의 글 한 편으로 내 졸고를 맺는다. 

 

이 세상에는 하늘도 거울로 삼는 맑은 빛깔이 있다. 

그게 무얼까.

쪽빛이다.

 

쪽빛은 어째서 하늘도 거울로 삼을 만치 맑더냐.

쪽빛은 가만히 있질 않는다. 

구정물이 들어와도 걸러내고

똥물이 들어와도 걸러내고

환경 파괴, 방사능이 들어와도 한사코 걸러내서 쪽빛이다. 

 

그러니까 그 어떤 참과 도덕, 그 어떤 깨우침도

끊임없이 걸러내고 새롭게 깨우치질 않으면

썩는다는 뜻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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