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째별의 다큐이야기] 탈핵 이야기 2 - 다함께 사는 우리, 장다울 그린피스 기후에너지 캠페이너

posted Feb 2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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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다울 캠페이너의 머리는 둥글다. 지구가 둥근 것처럼 사람의 머리는 대부분 구(球)체이지만 그의  머리는 특별히 더 둥글다. 탈핵법률가모임 해바라기 대표 김영희 변호사는 늘 장다울 캠페이너의 머리가 핵발전소 돔을 닮았다고 한다. <왕과 나>의 율 브리너나 오케스트라 앞에서 피아노 치는 히사이시 조 말고 그런 헤어스타일이 멋져 보이기는 쉽지 않지만 장다울 캠페이너의 이미지가 머리 덕분에 아주 강렬한 건 부인할 수 없다. 바야흐로 현대는 이미지 시대. 그는 일단 탈핵 공론화에 성공했다.  

맨 처음 그를 만났던 때는 2017년 8월 17일, 559명의 원고와 그린피스가 함께 하는 560 신고리 5,6호기 건설 취소소송 제2차 공판이었다. 그린피스에 나온 참관 모집 공고를 보고 신청 후 찾아간 양재 행정법원. 나는 그 때까지도 그린피스가 북극곰 살리는 데인 줄 알았다. 딸이 북극곰 마니아라 그 단체가 환경 운동하는 좋은 단체일 거란 생각은 막연히 했다. 그런데 그 단체에서 탈핵을? 피상적이고 멀고 먼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닌 우리나라, 우리 국토의 주민 삶을 다룬다고? 그것도 법정 소송으로?
지난 몇 년간 국내 굵직한 공판장에 좀 다녀본 내 눈에 그 공판은 아주 특이했다. 공개재판 전에 담당 변호사들이 당일 있을 공판에 대한 설명을 하고, 두어 시간의 공판을 거친 이후에 방청객들을 찻집으로 인도해 그 날의 공판을 해설해 주었다. 참관인들 소개 순서가 있었다. 생협 조합원이고 탈핵운동에 관심이 있으며, 사진 찍으러 원전에 갈 건데 촬영 포인트를 좀 알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린피스의 누군가 다가와 인터뷰를 요청했다. 언제나 인터뷰어는 내 역할이었는데 예기치 않은 상황에 당황하여 얼떨결에 인터뷰를 했다. 
더위가 한풀 꺾인 8월의 저녁, 4차로 밥까지 먹고 나서 장다울 캠페이너가 촬영 포인트랑 렌터카의 대여와 반납 지점이 달라도 된다는 요긴한 정보를 알려줬다. 우리는 짧은 구간 함께 지하철을 탔다. 그 때 그가 흥미 있는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가 원자력 연구원이셨다고. 박정희 정권 때 우리나라 경제를 살리겠다고, 사명감을 가지고 한국 원자력의 발전을 위해서 일한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분이셨다고. 그런데 그 아들은 지금 탈핵 운동을? 어허, 신구 세력의 세대교체도 아닌 어째 이런 일이. 하지만 아버지 덕분에 오늘날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아들의 가치관과 일을 아버지는 지금 존중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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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 평화
장다울은 대전시 대덕연구단지에서 자랐다. 학교에 가면 영어를 모국어처럼 하는 애들이 꽤 많았다. 교문 밖은 칡 캐고 산딸기 따는 완전 시골이었다. 그런 독특한 환경에서 타고난 명석함과 지는 게 싫은 성격 덕분에 공부를 잘 했고 1997년, 고려대학교 식품자원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귀농에 관심이 있었다. 다분히 공동체 삶을 지향하는 생태주의와 연결된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서는 풍물패에 온 몸을 던졌다. 리듬감이 없다는 무시에 2년간 매일 한 시간씩 지독하게 연습을 했다.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군대 갔다 복학을 했는데 02학번 후배가 꽤 잘하기에 따로 가르쳐주었더니 수개월 연습해도 마스터하지 못한 ‘궁편 24박’을 순식간에 해 냈다. 모차르트를 질투하던 살리에리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풍물로 업 삼기를 포기했다. 그 후 2005년 동시 합격한 서울대 대학원을 마다하고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국제평화학과에 입학했다. 전 과목 영어 수업에 기숙사 제공에 학비 전액 면제였다. 거기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일본인이었다. 이 지점이 흐뭇했다. 그 정도는 돼야 국제 평화를 논하지 싶었나 보다.
(실은 작년 1월, ‘갤러리 브레송’에서 본 양승우·마오 2인전-한일부부의 행복한 사진일기 <꽃은 봄에만 피지 않는다>가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중첩됐기 때문이다. 그 후 일본에서 외국인 최초로 도몬켄 사진상을 수상하고 현재 ‘인디프레스’에서 <그날풍경>이란 전시회를 하고 있는 야생미 넘치는 작가 양승우를 단물 뚝뚝 떨어지게 쳐다보던 마오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아마 이 환경운동가 부부도 사진가 부부처럼 금슬이 좋을 거란 내 식대로 상상이 뻗쳤을 것이다. 우연인지 장다울과 양승우의 헤어스타일은 비슷하다.)
장다울은 대학원 졸업 후 2007년 스웨덴, 영국, 헝가리, 그리스의 4개 대학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국제석사 프로그램(Masters in Environmental Sciences, Policy, and Management-MESPOM)이 있어 석사 과정을 또 다시 밟았다. 거기서 재생에너지에 대한 논문을 썼다. 그 때 스웨덴에 방문한 한국 정책전문가들과 인연이 닿아 졸업 후 2009년 강원도 환경정책과에서 근무를 했다. 공무원 생활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나름 자유인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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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속도
잠시 장다울의 인생 시간표를 몇 년 뒤로 가본다. 그는 제대 후인 2001년 12월, 여행을 떠났다. 계획은 창대하게 한국-중국-티벳-네팔-인도-파키스탄-이란-터키-동유럽-시베리아 횡단열차-한국이었으나 911테러로 인해 파키스탄 비자가 막혀 그냥 인도로 직행했다. 거기서 풍물패답게 타악기 타블라를 배우려다 네팔로 넘어갔는데 포카라에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로 가던 중 나흘 째 길을 잃었다. 죽는 줄 알았는데 네팔 나무꾼이 목숨을 구해줬다.
그 때 장다울의 삶이 변했다. 아니 그의 삶을 그가 변화시켰다. 

“사람마다 자기 삶의 속도가 있는데 그 때까지 제 삶의 속도가 다른 사람이나 사회에 의해 규정된 속도라는 걸 느꼈고, 나만의 삶의 속도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가 대학과 군에 있던 시절, ‘세계의 고산등정시리즈’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던 나는 당시 그의 바탕화면이 눈에 선했다.
‘그 나무꾼은 아마도 셀파였겠지. 거기선 그게 먹고 살 거리니까. 그들은 진짜 신출귀몰해. 조난당한 어리바리 외국인들 구해내는 건 일도 아니었을 거야.’
어쨌든 그는 그 나무꾼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후 한국에 돌아와 대전 지역 외국인 노동자 모임에 나가 네팔 노동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며 인권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무릇 사람이란 은혜를 갚을 줄 알아야 호랑이만한 거다. (전설의 고향 버전)

2003년, 장다울은 비영리 환경단체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에 들어가 본명 대신 다함께 사는 우리,  ‘다울’이란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새만금 간척사업 반대운동>을 본격적으로 하다가 종교지도자 4인의 삼보일배를 보면서 큰 감명을 받았다. 이 때 (국내 환경운동단체들의 활동에 한계를 느껴) 그린피스에 영문 이메일을 보냈다. ‘그린피스가 한국에 생겨야 하는 10가지 이유’에 대해서. 
 
장다울은 2010년 일본 유엔지역개발센터(UNCRD)에서 일했다. 이미 아내가 일하고 있던 곳이라 24시간 함께 있을 수 있어 좋았다. 동남아 23개국 장차관을 불러다 놓고 아시아 친환경 교통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었다.
그러다 전 세계인의 안전 불감증을 일깨운 사건인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터졌다. 농업 공동체를 꿈꾸던 그에게 일본 유기농 양배추 재배 농업인의 자살은 충격이었다.
그 해 9월, 한국에 그린피스 지부가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12월에 진행해야 하는 인도 포럼이 있어 입사를 다음 기회로 넘길 수밖에 없었다. 독립 싱크탱크에서 2년을 일하다 2013년 5월에 다시 인력 충원이 있었다. 이메일을 보낸 지 10년 후인 2013년의 6월 1일, 그는 마침내 꿈에 그리던 그린피스 기후에너지 캠페이너가 되었다. 
그는 직업을 선택하는 4가지 조건에 대해 종종 강의한다. 열정, 지식과 경험, 자기만족, 조직문화. 그린피스는 그에게 모든 조건을 매우 만족시키는 직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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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 (三代)
장다울은 그 흔해 빠진 자가용도 없이 지냈다. 요즘은 오래 전 은퇴하시고 연로하신 아버지가 물려주신 자동차를 쓰고 있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 활동이 끝난 후인 11월 5일, 그린피스에서 마련한 국민소송단을 위한 설명회에서 본 그의 아들은 올해 한국 나이로 7살인데 ‘아빠는 지구를 지키는 사람’이라고 하며 자기는 ‘무기를 없애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한다. 왜냐고 물으니 평화로운 세상, 행복하고 좋은 지구를 만들기 위해서란다.
세대는 이렇게 흐른다. 평생 원자력 분야에 종사하셨던 아버지의 공으로 대한민국이 경제발전을 이룩했고, 그 아들의 노력으로 재생에너지를 구현할 수 있게 되었으며, 아직 펼쳐지지 않은 미래에 지구평화를 지킬 손자가 자라고 있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며 각 세대를 존중한다. 변화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분쟁 없는 관계의 기본이다. 흔히 ‘내가 소비하는 것이 나를 규정한다’고 하지만 그린피스에서 주력하는 마음의 변화는 생태, 관계, 경험이다.
장다울 캠페이너가 천재적인 암기력으로 세계최고원전밀집국인 우리나라 원전 24기에 앞으로 5기가 더 세워지고 그에 따른 건설유지비용과 폐원전처리비용과 재생에너지 사용시 이득이 될 각 가정의 전기요금 계산을 줄줄 읊는 동안, 우리는 잠시 잊고 있었다. 정말 중요한 건 지구생태와 사람이라는 걸. 핵 마피아들이 자꾸만 값싼 전력이니 더 쓰라고 해대는 동안 매달 청구되는 전기 사용량이 200kWh를 넘느냐 안 넘느냐에 따라, 전기요금이 2만 원대냐 3만 원대냐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동안 잊고 있었다. 북극에는 곰이 죽어가고 있고, 아프리카에는 기아 난민들이 죽어가고 있고, 원전사고 발생지 주민들은 방사능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걸. 그건 먼먼 남의 나라 이야기니 당장 내 돈 내고 시원하고 따뜻하고 빠르게 살겠다고 하면 그걸 어찌 말리겠는가. 그는 그에 대한 전문가다운 사유와 고찰을 하고 있었다.  
그는 갸륵하게도 자신이 출생으로부터 받은 혜택 60%와 노력 40%로 현재 위치에 있다는 인식을 했다. 그렇기에 자신처럼 좋은 환경에서 살아오지는 못한 사람들을 위해 살고 싶다고 했다. 인터뷰 중 가장 마음에 쏙 드는 감동 포인트였다. 
나는 말이 빠르고 많은 남자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파파이스에 연 3회 출연해 110여 분 동안 탈원전에서 재생에너지까지를 설명해 내려면 느린 말로는 불가능하고, 내용상으론 자료나 통계 수치라 뭐 하나 버릴 게 없다. 나는 부모 잘 만난 이들이 가진 기득권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이 있다.  그런데 그렇게 잘 태어나 똑똑해서 할 말이 많은 남자가 자기가 받은 게 감사해서 그렇지 못한 남들을 위해 살겠다는데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런 사람은 더욱 성공하고 어서 높은 자리에 올라서 부모 복 없고 빽 없는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도록 팍팍 밀어줘야 한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폴 발레리의 말을 스콧 니어링이 했고 그 말을 니어링의 추종자 장다울이 되새긴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을까? 아마 지구의 생태와 평화를 지키는 일이겠지. 반핵이나 탈핵보다는 에너지 전환이라는 긍정적 해법으로. 그에게 탈핵은 한 때 사명이었으나 지금은 시민운동을 하는 계기이자 직업으로 하는 일이 되었다. 이미 큰 전환점을 만들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2016년, 삼십 대 마지막의 장다울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네팔에 다시 갔다. 23세 때 길을 잃어 못 갔던 안나푸르나에 73세 아버지, 67세 어머니, 아내, 세 돌 넘은 아들과 함께 다녀왔다.
우리나라가 재생에너지로 100% 전력 가동하는 2040년쯤 되면 네팔이나 티베트 어디쯤에서 장삼과 가사를 두르고 명상을 하다 타블라를 두드리는 장다울을 만나는 상상을 해 본다. 그의 말 속도가 조금은 느려져 있을 것을 기대해 본다. 그곳은 그렇게 빨리 많은 걸 납득시켜 어떻게든 재앙을 막으려고 안간힘쓰면서 살지 않아도 되는 곳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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