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하루가 걸어오는 날이 있다

posted Mar 1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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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김영국
발행호수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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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하루가 걸어오는 날이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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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하루는 허수경을 거쳐 체홉으로 이어지고 이내 정지아의 문장으로 옮겨가며 맴돈다. 삼킨 문장은 머리를 환하게도 어지럽게도 한다. 단어를 쫓아 행간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상념은 쉴 새 없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한 감방에 있었는디 갸들은 지 혼차 묵들 않애야, 사식 넣어주는 사람 한나 없는 가난뱅이들헌티 다 노놔주드라. 단 한멩도 빠짐없이 글드랑게. 종교가 사상보담 한질 윈갑서야."2)

 

어쩌면 우리는 자연선택으로 유전자 깊이 각인한 이기적 속성을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존재인지 모른다. 그 발버둥이 때론 버겁기도 때론 가슴이 웅장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사정이 어떠하였든지 내 앞에는 두 가지 선택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수락하느냐, 거절하느냐.

 

홍영진 이사장님으로부터 차기 이사장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어느 쪽도 어려운 선택이었다. 그래서 프로스트의 시가 떠올랐을 것이다. 시인은 풀이 더 자라고 걸어간 자취가 적은 길을 택했다고 했다. 어쩌면 나도 그러하여 앞으로 당분간 이사장이라는 상상하지 못했던 수식어를 달고 걸어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훗날에 훗날에 이런 읊조림을 할지도 모른다.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

                        - Robert Frost

 

노란 숲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꺽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어간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 길을 걸어간다면 그 길도 결국 같아질 것이지만...

 

그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이 없음으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깊은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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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허수경의 시 '달이 걸어오는 밤'에서 빌리다.

2) 정지아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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