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평화기행을 다녀와서

베트남 평화기행을 다녀와서

 

나, 너 그리고 우리의 베트남 평화기행

2019년 1월7일 ~ 1월 12일  

 


 

베트남 평화기행의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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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여행 가실래요? 나도 갈 건데.”

겨울이 올 때 그녀가 다가와 경쾌한 음성으로 말했다. 메시지보다 메신저에 더 민감한 나는 그녀가 말했다는 사실만으로 즉시 동의하고 말았다. 여행지가 베트남이란 거, 6일 동안이란 거, 비용이 얼마란 건 조금 후에 마음속에 담았다. 출발하기 두어 달 쯤 전부터 안내 메일이 오더니, 이 주일 쯤 전부터는 매일 왔다. 선행학습을 독촉하는, 과잉친절이라는 생각이 드는, 여행지 관련 정보였다. 여기도 열성분자가 있구나 했다.

호치민 공항에 내리자마자 무더운 여름을 만났다. 주스 한 잔에 몇 만 동이나 하는 베트남 화폐단위는 충격이었다. 호치민 시내를 가볍게 둘러보고, 어두워질 무렵에 반레 시인의 집을 방문했다. 반레 시인은 베트남전쟁 당시 게릴라였으며 전쟁 후에는 소설, 시, 다큐 제작 등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반레 시인이 들려준 전쟁 이야기는 내가 어릴 적에 아버지한테서 듣던 한국전쟁 이야기와 비슷했다. 전쟁은 참혹함 그 자체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의 죽음, 생존자가 겪는 공포와 굶주림, 질병과 상처. 전쟁은 살아남은 자들의 살과 뼈와 영혼에 치유되기 어려운 고통의 흔적을 남긴다.

둘째 날에 방문한 전쟁증적박물관은 미군의 만행을 증명하는 자료들을 전시한 곳이다. 미군의 만행에 대해 베트남인의 증언보다는 미국인의 증언을 중심으로 전시물을 배치한 것이 특이했다. 끔찍한 학살 장면 옆에 미국 헌법의 인간존엄 정신을 기록해 놓는다거나, 미군의 만행을 보도한 미국 언론의 자료와 사진을 전시하는 식이다. 자기 나라에서 자기들이 당한 일들을 가해자의 증언을 통해 확인시켜주고 있다. 피맺힌 원한을 이렇게 냉정한 듯 뜨겁게 호소하는 경우는 처음 봤다.

오후에 구찌땅굴을 둘러본 후에 다시 전쟁증적박물관으로 돌아왔다. 한국과 베트남의 평화를 기원하는 모임을 가지기 위해서다. 우리 일행은 고엽제 피해자들, 소설 〈사이공의 흰옷〉의 실제 주인공인 응우엔티쩌우와 레홍뜨 부부, 그리고 박물관 직원들과 함께 둘러앉았다. 그들의 이야기와 노래를 듣고, 선물을 나누고,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고엽제 피해자 10여 명은 함께 노래를 불렀다. 특히 몸집이 작은 사내가 자기 키의 절반쯤 되어 보이는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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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차에는 베트남 중부에 있는 꽝남성 하미마을로 갔다. 우리는 하미 위령비를 참배하면서 어정쩡하게 봉합된 갈등의 증거를 보았다. 위령비의 비문이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했기 때문에, 그것을 삭제하라는 한국 월남참전전후복지회의 요구와 삭제할 수 없다는 마을주민의 의견이 충돌했기 때문이다. 베트남 정부의 중재 끝에 비문을 연꽃무늬 석판으로 덮는 것으로 마무리했지만, 어느 쪽도 만족스럽지 못한 타협이었다.

4일차에는 꽝응아이성의 빈호아 마을로 갔다. 마을 입구에 한국군 증오비가 서 있었다. 증오비에는 민간인 430명이 남조선군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늘에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는 문구도 있다. 증오비 건너편에 빈호아초등학교가 있다. 우리는 평화의 길을 열자는 취지로 빈호아초등학교를 방문하여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였다. 아이들의 맑은 눈동자를 보니 미안한 마음이 더했다. 마음이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이 아이들은 매일 길 건너에 우뚝 서있는 한국군 증오비를 보면서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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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차에는 퐁니·퐁넛 마을로 갔다. 한국군에 의해 민간인 74명이 희생된 곳이다. 마을 입구에 건립된 희생자 위령비를 참배했다. 이 위령비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위령비 건립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한국의 민간인들과 베트남 마을 사람들이 자금을 모았고, 진입로를 열기 위해 한국과 베트남 청년들이 함께 노동을 했다. 함께 평화를 만들어가는 노력이 감동이었다. 하미 마을은 갈등을 잠시 덮어두었고, 빈호아 마을은 민간단체가 얼음 깨기를 시도하는 중인데 비해, 퐁니·퐁넛 마을은 갈등을 상당히 해소해가고 있다. 역시 평화 만들기는 국가보다 민간이 훨씬 잘 한다.

베트남 전쟁 중 한국군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들 중 생존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끔찍한 학살과 천우신조로 살아남은 이야기, 그 때의 입은 상처로 지금까지 이어지는 고통에 대해 들었다. 우리 일행은 그 아픔에 공감하고 위로하고 사과했다. 전쟁이 상처는 깊고 오래간다. 베트남평화기행은 감정노동이었다. 동료들과 캔 맥주를 마시며 분위기를 바꿔보았지만, 감정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우울한 정서는 조용한 시간이 되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번 평화기행에는 몇 가지 특별한 것이 있다. 평화기행을 준비하기 위해 홍 장로님이 베트남 현지를 두 번이나 다녀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베평화재단 활동가들의 통역과 해설과 안내는 친절하고 정교했다. 함께 다녀온 일행의 우정도 다른 데서 보기 힘든 수준이다. 모두 평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다.

 

 


 

 

인정, 부끄러움 그리고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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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기행은 조금 뜬금없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하루를 반복해서 살아가던 중 갑자기 제안을 받게 되었고 아무 생각 없이 가겠다고 하자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실은 베트남학살에 대한 관심으로 참여를 한 것이 아닌 그냥 좀 쉬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더욱이 그동안 살아오면서 이 학살에 대한 관심도 없었으니, 참가자 중에서 제일로 자격이 미달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사실 그러고 보면 기행이 결정되고 날짜가 다가오기 시작했을 땐 기대감 보다는 무덤덤한 마음이 컸었다. 기행을 준비하는 것보다 지금 하고 있는 개인적인 공부가 우선이었기에 기행이 다가오는 날까지 일상에 집중을 해야만 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은 이 평화기행을 ‘갑자기 휙’ 떠나버렸다는 표현이 어울릴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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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 도착하였을 때는 생에 처음 느껴 보는 것들로 가득했다. 더운 날씨 때문에 전혀 다른 세상에 온 느낌이었고 구름 같이 몰려드는 오토바이를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또한 얼마하지도 않는 군것질을 실컷 하는 기묘한 경험도 겪었다. 그리고 정체를 모르겠는 음식인데 왠지 맛있는 식사 때문에 매우 환상적인 식도락을 즐기기도 하면서 우리와는 너무도 다른 베트남을 이리 저리 구경하는데 정신이 팔리며 베트남을 나름 열심히 즐겼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기행을 시작했을 때에는 생각과는 달리 몸이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눈은 즐거웠지만 더위를 먹었는지 기운이 떨어져 정말 죽을 노릇이었다. 이리 저리 따라다니면서 설명을 들으려 해도 사지가 천근만근이라 제대로 집중조차 할 수가 없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젊음의 힘을 빌려 더위를 물리치고 베트남의 이야기를 잘 들으려 노력하였는데 그것이 참 마음 아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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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은 기억하려는 의지가 강한 듯 했다. 상당히 많은 마을에 학살 희생자 위령비가 있다고 했고 박물관에는 여러 학살들을 가감 없이 적시해 놓았다. 그래서 기행의 과정에서 정말로 많은 부끄러움을 느껴야만 했다. 한국군이 저지른 수많은 참사와 지금까지도 벌어지는 뻔뻔함과 추태 때문이다. 그리고 대체 왜 그런 것인지 모르겠으나 학살당한 이들의 상당수는 노약자와 여성 그리고 어린 아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정말로 큰 충격이었다.

이를 통해 과연 어디까지 잔인해 질 수 있는지, 혹은 어디까지 무뎌질 수 있는지 여러 번 생각해 보지만 무엇이 되었든 전쟁은 상상 이상이었다. 게임 등으로 전쟁을 단순히 오락의 요소로 취급하던 지난날을 다시금 돌아볼 수밖에 없었던 순간이었다. 기분이 정말로 묘했다. 일본을 수 없이 많이 욕해왔었는데 막상 가해자의 입장이 되니 정말로 낮선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참사를 모르고 살아가는 것 보다는 과거를 배우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되었든 간에 기억해야 할 일이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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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사람들은 정말로 인정이 깊었다. 기행을 통하여 감동을 받았던 순간들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웃음으로 마주해 주었고 길거리에서도 이방인을 모질게 대하지 않았다. 찰나 순간이었지만 잊지 못할 우정을 나눈 이들이 여럿 있어 정말로 마음이 따뜻해 졌다. 특히 마지막 날 길을 잃은 나에게 오토바이를 태워주신 분은 정말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학살 생존자들도 따스하게 우리를 맞아 주었는데, 특히 도안응이아씨의 집에 방문했던 것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듯하다. 그 분의 집에서 서로 노래를 주고받던 것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분이 노래를 부르고 답가로 ‘그날이 오면’과 ‘아침이슬’을 다 함께 불렀는데 지난날 촛불 시위에서 그렇게 듣던 노래를 이렇게 들으니 가슴이 벅찰 수밖에 없었다. 희망이라는 것이 이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비록 한국의 노래라 그분은 어떤 노래인지 모르셨겠지만 노래를 하는 우리의 심정과 의미는 반드시 전해졌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언제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공허하기 짝이 없다. 덜렁거리는 성격 덕분에 기행의 마지막까지 길을 잃고 공항에 짐을 두고 내리는 등….. 꽤.. 추억에 남을 만한 일들이 여럿 있었지만 그래도 뜻 깊었던 순간이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여행을 많이 다니라는 것이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스스로의 안목을 넓히라는 의미가 있을 수 있겠다. 헌데 이 기행을 통해 이 삶의 견문을 넓히는데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나의 스물 둘의 아침은 나름 의미 있게 시작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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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 말조차 할 수 없는 부끄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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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는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한국군들에 의해 집단 희생된 베트남 민간인들이 꽝남성을 비롯해 5개성에서 9천 여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노인, 여성, 어린아이들이었습니다. 학살의 잔혹성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그저 부끄러웠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에게 학살의 죄를 밝히되 책임은 묻지 않는다 했습니다. 용병, ‘미국의 용병이었으니 책임은 미국에 있다.’했습니다.

꽝남성 하미마을에서는 1968년 음력 1월 24일, 단 하루 동안 135명의 민간인이 한국군에 의해 희생되었습니다. 2001년 월남전전우복지회가 후원해서 위령비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하미마을 사람들은 그 위령비를 세우면서 또 한 번의 학살을 당했다 얘기합니다. 한국군 학살에 대한 기록을 새긴 비문을 지우라는 압력이 들어왔고 결국 마을 사람들은 연꽃무늬 대리석으로 비문을 덮어야 했습니다.

비문은 지금도 침묵의 무덤 속에 갇혀있습니다.
‘미안하다’는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부끄러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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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공’ ‘승공’을 앞세워 출전했던 그 때나 지금이나 한국군의 입장은 변함이 없습니다.
“결코 민간인 학살은 없었다.”
“군이 죽였다면 그는 베트공이었다. 빨갱이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는데도 죄를 묻지 않습니다. 학살의 책임을 그 누구도지지 않습니다.

생각해보니 우리는 역사 앞에 학살의 책임자를 소환해서 처벌해본 기억이 없습니다.
제주 4.3도 그랬고, 여순사건도, 광주5.18 민주항쟁도.

평화기행 끝자락에서 또 다른 부끄러움을 마주했습니다. 호이안 중앙시장 길거리 식당의 젊은 주인은 한국말을 잘했습니다. 대전 지역의 한 공장에서 일을 했다고 합니다.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습니다.
“혹시 한국에서 섭섭한 일이 있으셨다면 미안합니다. 잊어주세요.”
말해놓고 ‘내가 처음 보는 사람에게 왜 이런 말을.’ 내심 당황했습니다.

그런데 더 당혹스런 것은 그의 반응이었습니다.

젊은 식당주인은 침묵했습니다.
‘한국 좋았어요.’는 기대하지 않았어도 ‘무슨 말씀이세요. 괜찮아요.’ 정도의 답을 하길 바랐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무런,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침묵이 나를 부끄럽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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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덮은 콘크리트 벽을 허물고 하미마을 위령비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미안하다.’ 말할 수 있는 그 날이 오길 바랍니다. 그리고 더 이상 부끄러운 미안함을 만들지 않는 우리가 되는 그 날이 오길 바랍니다.

 

 


 

 

귀한 마음 내어주신 분들과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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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 길에서 얼굴 없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목 : 목 놓아서 울 사이도 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아우성을 만났습니다.

길 : 길에서 이름 없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목 : 목청껏 불러 주려고 해도 부를 이름이 없는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길 : 길 한가운데서 얼굴 있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목 : 목 놓아서 얼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울어줄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길 : 길 한가운데서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목 : 목청껏 이름 없는 사람들의 이름을 지어 불러줄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길 : 길가에서 뒤돌아 우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목 : 목메어 소리 없이 우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길 :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서로를 끌어안았습니다.
목 : 목을 감싸며 살포시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서로를 끌어안았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평화의 길목에서 베트남을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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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협동조합 길목
삶의 작은 공간으로부터 희망을 함께 나누는 큰 길로 통하는 '길목'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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