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낙영108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37

사트라프.jpg

 

 

-제국이나 사트라프의 입장에서 보면 산 위의 부족들을 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키기는 쉽지 않을 거구만요. 성가신 존재이긴 허지만 제국을 위협할만한 세력에는 터무니없고, 더구나 그들은 제국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약삭빠르게도 케르반 사라이 같은 기간시설에는 아예 접근을 안 헝게요. 기껏해야 변경의 작은 성읍이나 대상을 습격해서 재물을 약탈할 뿐이지요.

그래서 얌나르 같은 변경의 작은 성읍들에 위협일 수밖에 없다며, 쿠샤는 저들을 음지에서 끌어내지 않고는, 때마다 전쟁을 치르게 될 것을 염려한 것이라고 부리는 말했다.

-사실, 쿠샤 님의 뜻대로 저들을 대상의 호위병대로 부릴 수만 있다면, 상단으로서는 큰 근심을 더는 것이니더. 든든한 호위병대를 거느릴 수 있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상단을 위협하는 비적의 소멸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지 않겠니껴.

도행수 바흐아도르가 느릿한 말로 자신의 본분인 상단 책임자로서 현실적인 판단을 피력하고 있었다. 대상이 움직일 때는 소수의 호위병사가 행수의 지휘를 받으며 동행하기는 하지만 비적떼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인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비적 떼를 만나면 속수무책으로 약탈을 당해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더구나 유능한 상인이 상하게 되는 일은 상단 전체에 큰 손실이 되었다.

-하지만 저들이 우리의 뜻에 따라줄 거라 우째 확언할 수 있겠니껴? 저들은 흉포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제국의 규율 밖에 있는 존재들 아니니껴? 그러니 밖에서 누리던 흉포한 분방함을 포기하고 제도 안으로 들어오려고 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드는 거제요.

베흐자트는 여전히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 의구심은 쿠샤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데 대한 분노와 적개심을 포장하고 나온 개인적인 감정이다. 그러나 그녀는 성주가 아닌가? 성주로서의 판단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걸 중재하고 나선 이가 골브안이었다.

-지도 성주님과 매한가지로 저들의 본성에 대해서만큼은 신뢰할 수 없다는 입장이니더. 그렇지만 저들에게 분열의 조짐이 있다면 한 번쯤은 저들의 사정을 알아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니더. 부리 님이 직접 가서 그들을 만나볼 수 있다면 그래 볼 만하다 여겨지니더.

병부사령 골브안이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녀로서도 아미르카의 내침이 부담이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지난 전쟁 이후, 병대를 정예화하고 다양한 상황을 상정한 훈련으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왔으나, 성읍의 인민과 힘을 모아 싸운다고 하더라도 작은 성읍의 병대로는 압도적인 우세를 장담할 수 없었다. 압도적일 수 없다면, 지켜낼 수는 있겠지만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아야 했다. 현실은 생각보다 냉혹한 장면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베흐자트는 감정이 앞선 개인의 의리를 철회하고 현실의 무게가 강압하는 합리와 이성에 따른 결정을 해야 했다.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는 달라질 게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밤을 도와 숙고하기로 하였다.

 

-제가 가겠습니다.

그날 저녁,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로샤낙의 이야기를 들은 아베스라가 난마에 칼질을 하듯 거침없는 일성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시님이요? 안 되니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랐지만, 베흐자트가 기겁을 하고 펄쩍 뛰었다. 아무리 상황이 급해도 성내 사정과 관계없는 수도자를 험지에 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성주님 말이 맞니더. 일상적인 접촉도 아닌 데다가 어떤 돌발상황이 일어날지 모리는 데 시님을 가게 할 수는 없니더. 우리 병부에서 부리 님과 동행하겠니더.

골브안은 산 위 부족의 동태 파악을 전담하던 군관 가운데 한 명을 부리와 동행하도록 하겠다고 나섰다.

-변복을 한다 해도 성의 군관이 간다면 저들이 금방 눈치를 챌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저의가 있다고 판단할 게 틀림없지요. 부리 님과 저는 일단 외양에서 다른 모습이니 크게 경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싸우러 가는 일이 아니니 이런 일은 수도자에게 걸맞습니다.

아베스라는 말하는 일이라면 말을 닦고 내뱉는 자에게 알맞은 일이라며, 게다가 봉술도 낯설지 않아 제 한 몸 지켜내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니, 자기 말고 누가 그럴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마구니와의 싸움보다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아베스라는 지난번 자신의 세 번째 마구니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파르바르딘의 세 분 신장(神將)님 외호 덕이었고, 이제 자신의 작은 재주로 산 위 부족의 동정을 살피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시님께서 부리 님과 동행해주신다니 저는 마음이 놓이니더. 싸움에 나설 때는 창과 방패를 아울러 챙겨야 하고, 먼 길을 나설 때는 지팡이와 신발을 더불어 갖춰야 한다고 들었니더. 두 분이 함께 가주신다면, 어느 한 분은 창이 되고 다른 한 분은 방패가 될 것이 분명하니, 저것들이 섣부르게 대하지는 못할 거라 생각되니더.

뜻밖에 로샤낙은 아베스라의 결정을 고마워했다. 쿠샤에게 와서 많이 누그러지긴 했지만, 초원을 홀로 떠돌면서 온갖 험한 상황 속에서 거친 성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부리를 보완해줄 인물로 아베스라만 한 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돌샘에서 처음 시님을 뵈었을 땐, 법문을 청해보자고 내 집에 초대했는데, 이제 돌연한 일을 맡게 하니더. 썩 내키지 않는 건 여전한데 상황이 지를 다급하게 몰아 여지를 주지 않는 거 같니더. 그런데 뜻밖에도 시님이 다행이라 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니더.

베흐자트는 자책하듯 탄식했다. 새삼 성주라는 자리의 무게가 자신을 짓누르고 있다고 여겼으며, 그럴수록 쿠샤의 부재가 주는 한 곳이 비어있는 자신의 운명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녀는 쿠샤가 가 닿으려던 꿈과 그것을 지연시키던 현실을 모두 끌어안아야 했다.

-길은 애초부터 있었을지 모르지만, 가지 않으면 결국 그 길은 내 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드러나지 않았던 길을 가리키는 신의 뜻이 문득 절실하게 다가오는 때가 있는 법이고, 그 길을 가거나 그렇지 않거나 선택할 수는 있으나, 최선의 길은 늘 정해져 있기 마련이지요. 수도자가 일상 밖을 경험하는 것 또한 귀한 깨달음의 방편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베흐자트 님은 부담을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베스라는 초원의 회색 늑대와 더불어 달렸다는 스승의 모습을 떠올리며 담담한 어조로 베흐자트를 위로했다. 스승의 뒤에서 달려오던 회색 늑대는 분명 위협이었으나, 더불어 달릴 때는 이웃이었으며, 목적지가 같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 이르러서는 도반이었을 것이다.

 

-시, 시님하고라?

아그레의 수도자인 아베스라와 동행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부리는 너무 놀라서 앉아있던 의자를 뒤로 넘어뜨리면서 일어섰다.

-초원을 유행하면서 풍파를 많이 겪은 시님이시더. 언변은 말할 것도 없고 무술의 도를 가늠하기 어려운 분이니, 지가 보기엔 부리 님하고 맞춤이시더.

로샤낙은 조금 과장된 언사로 아베스라를 추켜세워 부리가 혹시 가질지도 모르는 우려를 불식하고 흥미를 도발하고 있었다.

-초원의 시님에 대해서라면 대강 어떨 거라 짐작은 헐 수 있소. 그들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야그가 바람결에 실려 초원을 떠돈께요. 다만 칼질로만 살먼서 시상의 죄란 죄는 다 뒤집어 쓴 사램이 시님을 뫼시고 간다는 게 뜻밖이고 부끄러워 그라지라. 갑째기 허벌나게 부끄러워 지능만요.

부리는 정말로 부끄러운 듯 검게 그을린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홍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뜻밖의 상황에 놓인 자신의 처지에 대해 어색해하는 것이었다.

-크하! 돌아올 땐 시님께 감화를 입어 도복을 입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겄소. 흐흐흐. 시님을 어서 뵙고 잡고만요.

부리는 어쭙잖은 농담으로 어색함을 털어버리려 했다.

-로샤낙의 말대로 두 분이 잘 어우러져 좋은 결과를 얻기 바라니더.

베흐자트가 서둘러 상황을 정리하려 했다. 부리가 어색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희화화하면서 자칫 벗어날 수 없는 분위기에 빠져들까 염려가 되었다. 또 진정 걱정이 되는 것은 거칠고 무도한 무리에게로 저들 둘만 보내는 것이었다.

-두 분이 산 위의 부족에게로 가신다면 우리 병대의 탐색조로 하여 후방에서 엄호할 수도 있니더. 물론 아무도 그들을 발견할 수는 없을 거니더.

골브안이 아무래도 베흐자트의 염려가 신경 쓰였는지 엄호조를 붙이겠다고 제안하고 나섰다.

-시님이 말은 타시니껴?

구다르즈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소릴 질렀다.

그의 말에 모두 놀랐다. 그러고 보니 말을 타고 다니는 수행자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초원에서야 걷기도 전에 말을 타는 게 다반산 디, 시님이라고 안 그랬겄소!

부리가 웃으며 손을 가로저었다.

 

-시님은 떠돌이 돌궐인이 부담시럽지는 않으신게라?

부리가 고삐를 당겨 말을 세우며 몸을 돌려 아베스라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것은 자신이 돌궐인임을 드러냄과 동시에 초원의 먼 동쪽으로부터 서쪽으로 서쪽으로 떠돌며, 다른 종족들과 끊임없이 부딪쳐야 했던 고단한 겨레의 일원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내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속에도 섞이질 못하고 홀로 방황해야 했던 스스로에 대한 자조를 희석하려는 몸짓이었다.

-하하, 떠돌이인 건 저도 마찬가지이고, 어렸을 때부터 퀵튀르크 사람들과는 이웃으로 지냈으니 부담스러울 게 무에 있겠습니까? 다만 두려운 것은 마음이 흐려져 사리분별에 내 뜻이 앞서 그릇된 길로 가는 것이요, 과욕으로 일의 경중을 뒤집는 것이지요.

아베스라의 말은 유리걸식을 일삼는 수행자가 내뱉을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말이었으나, 말의 끝은 날카로워 말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거북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시생은 평생을 수도자입네 하며 살아왔으나, 늘 양식이나 축내는 밥버러지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지요. 그건 우리네가 말과 사유라는 보이지도 않고 잡을 수도 없는, 일견 허망해 보이는 비물질에 집착하는 데서 오는 자괴감 같은 것이니까요. 법석에 앉아 대중에게 삶의 본질은 이런 거이고 그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러이러하게 살아야 한다고 그럴듯하게 말하지만, 죽은 말을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온갖 화려한 색으로, 배색의 원리조차 고려하지 않고 채색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하, 그건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는 건데 말이지요, 언제 끊어질지 알 수 없는 외줄 위의 줄광대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존재 아니겠소?

아베스라의 말이 앞서가는 부리가 탄 말의 꼬리에 간신히 얹혀 있다가 물색없이 떨어지는 말똥을 위해 치켜드는 말총에 흩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말이지라, 그 자리에 피비린내는 없었을 거 아니겄소? 죄를 짓기로 말허자먼, 생목쉼에 칼질을 일삼아 몸담았던 세상을 돌아볼 틈도 주지 않고, 경황 중에 저승길로 보내버리는 죄보덤 더 허겄소. 우덜같이 칼자루에 목쉼을 걸고 사는 것들이야말로 축생도이거나 지옥도밖에 갈 곳이 없을 줄 알지만, 순전히 내 목쉼 보전할 것만 생각하다 보니 죄를 짓는지 죄에 빠지는지도 모르고 살았았능게라. 도모지 보람이란 걸 모릅지요. 시님 말쓈을 듣고 있응게 첨예허기가 창끝 같소.

부리는 말총에 흩뿌려져 사그라드는 아베스라의 말에서 고갱이를 걷어 올려 새겼던 모양이다.

-나라는 인간이 지금 이렇게 나으 일이 아닌 것에 몸을 움직여 수고랍시고 허게 된 것은, 순전히 묻도 따지지도 않고 거둬 사람 노릇허게 해준 쿠샤 성님 덕인디······, 나가 시상을 떠나기 전에 그 냥반헌티 받은 과분헌 은혜를 되갚는 길은 저 산 윗것들의 위협을 제거허는 것뿐이란 생각이었소. 마참 저것들에게 변고가 있어 어쩌면 그게 가능허지 않을까 허여 나선 질인디, 시님이 엮여 들지는 몰랐고만요.

부리는 아베스라에게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뜻밖이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세상 인연과 일이라는 것이 뜻밖의 일 아닌 것이 없지요. 그러니 부리 님과 제가 동행하게 된 것 또한 이미 정해진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따, 그러고 보먼 이미 정해져 있으나 미처 알아보지 못한 인연을 만나 지지고 볶다 잘 살거나 웬수 지거나 허는 게 인생인 게라잉. 참말로 묘허기 짝이 없는 것이 사램의 질이란 생각이 든당께요.

부리는 그렇게 말해놓고 자신이 내뱉은 말에 놀라고 있었다. 초원에서는 주로 단어나 구로만 의사소통을 해왔었을 뿐, 이렇게 길게 말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떠돌이 무인에겐 만나는 모두가 적이었으므로, 길게 말하며 틈을 내주는 것은 곧 목숨을 내주는 거라 여기고 살았던 것이었다.

-시님허구 걷고 있은 께, 말이 길어지구 짚어지는 거 같소. 이건 나으 본모습이 아닌디 말이오잉!

-시생과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오. 말과 생각은 요가(yoga)와 끄셰마(kṣe-ma)를 거듭하면서 다져지고 깊어지는 것인데, 어느 한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기의 흐름이 끊기게 되고 말도 생각도 짧게 분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수행자라고 다르지 않답니다.

-허허, 솔직히 시님 말쓈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읎어두, 지가 알지 못허는 새로운 세계를 엿본 것맨치 뿌듯해 부요. 이런 기분은 살먼서 처음인 게라요.

비교적 평탄한 길이 끝나고 급한 경사면으로 이어지면서, 길은 겨우 한 사람이 다닐 수 있을 만큼 좁아져 있었다. 게다가 크기가 제각각인 바위 사이로 난 길은 풍화된 암면이어서 바닥이 제법 미끄러웠으므로 겨우겨우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시님, 조심허시요잉, 길이 미끄럽소.

앞서가는 부리는 자주 돌아보며 아베스라를 향해 소리쳤다.

아베스라는 말고삐를 잡은 손과 등자에 걸린 발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경사가 급한 길을 오를 때면 온 신경이 말발굽의 움직임에 걸려 있다가, 비교적 완만한 길이 시작되면 긴장이 풀어져 절로 긴 한숨이 쏟아졌다.

그걸 보고 있던 부리가 빙그레 웃었다.

-이렇게 험한 산길을 말로 오르는 거는 처음이시지요잉! 지도 첨엔 이런 지형에서 말을 달리는 데 애를 먹었소.

부리는 사카(Saka)의 북동쪽 끄트머리에서 이름도 없이 떠돌던 부족 출신이었다고 했다. 그들은 스스로 회색 늑대의 후손이라 여겼으나, 그리 힘 있는 부족은 못 되어 거칠고 강한 부족이 밀고 들어오면 서둘러 유르트(Yurt)를 거두고 떠나기를 거듭해야 했다. 부족의 현실주의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차라리 힘센 부족 아래로 들어가 합치자는 주장을 하였으나, 비록 먼 지파이긴 하지만 아쉬나(Ashina)1)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여기고 있던 나이 든 추장 퀼(Kül)은 힘을 키워 부족연맹의 맹주가 되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힘을 키우기도 전에 여러 차례를 서둘러 몸을 옮겨야만 했던 퀼 추장은 소그디아 북쪽 초원에 이르러서, 규모가 터무니없이 작은 아르얀 부족의 공격에 목숨을 잃었고, 부족민들은 흩어져 그들이 하나의 부족을 이루고 살았었다는 흔적이라곤 길지 않은 서사로만 남았다. 그러나 그 서사마저 온전한 전승은 끊겼고, 몇 편의 짧은 노래만 안타까운 흔적으로 남아 있다고 했다.

 

초원에서 뜨거운 바람이 불어오면

우리의 영웅 퀼의 가슴은

상승하는 기류를 탄 천공의 수리처럼 부풀었다네.

위대한 조상 아쉬나의 혼이 그를 추어주었으므로

회색 늑대의 영혼을 받은 그의 위대한 꿈은

이루어지고야 말리니

초원의 바람 아래 울부짖는 늑대

퀼이여!

서둘러 일어나서

흩어진 늑대들을 불러 모으고,

태양의 전령

세 발 까마귀가 전하는

하늘의 뜻과

초원의 바람이 전하는

땅의 뜻을

받으라, 받으라!

 

부리가 자신이 알고 있는 서너 편의 노래 중 그나마 온전히 전해진 것이라며 부른 「초원에서 뜨거운 바람이 불어오면」은 전체 노래의 서장 가운데 일부인 것 같았다. 결코 장엄하지도 않았고, 듣는 이의 기개를 불러 깨우는 박진감도 없는, 차가운 겨울바람에 저 스스로 뿌리의 물기를 거두며 스러지는 초원의 풀잎같이 애처롭기만 하였다. 그것은 퀼이 죽은 이후에 어느 누군가가 족장을 애도하는 노래로 만들어 부르다 서사의 초두 어디쯤에 삽입한 결과일 거였다.

부리가 「초원에서 뜨거운 바람이 불어오면」를 부르는 동안, 그가 탄 말 '촐폰(Cholpon)'2)은 땅바닥에 앞발 굽을 두드리며 낮고 기괴한 소리로 크힝크히힝하며 울었다.

-나가 아프거나 서러움에 북받칠 때마다 이 노래를 부르곤 했는디, 아따 이것이 그걸 기억하고는 그때마다 나를 위로한답시고 늘 저렇게 굽으로 땅을 뚜드리능 만요. 참말로 영물이랑게요!

부리는 두 팔로 촐폰의 목을 감싸 안고 손바닥으로 어루만졌다. 둘 사이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다져온 우정 같은 것이 진하게 묻어나오고 있었다. (계속)

 

------------------------

1) 고대 튀르크(돌궐)의 전설적인 부족. 부족의 멸족 위기에 팔다리가 잘린 채 살아남은 유일한 사내아이가 암늑대의 부양으로 목숨을 이어가고, 암늑대와 교합하여 후손을 남김으로써 부족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 후손 가운데 아쉬나를 성으로 삼은 부족이 융성하였는데, 늑대문양을 상징으로 삼았다고 전한다.
2) 새벽녘 가장 빛나는 별을 뜻하는 고대 튀르키어.
 

오낙영 사진.jpg

오낙영(글쓴이, 조합원)

사회적협동조합 길목
삶의 작은 공간으로부터 희망을 함께 나누는 큰 길로 통하는 '길목'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
03175 서울 종로구 경희궁2길 11(내수동 110-5) 4층
손전화 010-3330-0510 | 이메일 gilmok@gilmok.org
계좌번호 | 출자금 - 하나은행 101-910034-05904(사회적협동조합 길목)
프로그램 참가비 - 하나은행 101-910034-06504(사회적협동조합 길목)
COPYRIGHT ⓒ 2022 사회적협동조합 길목 ALL RIGHT RESERVED.

Articles

1 2 3 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