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에너지로 향린교회의 당당한 미래를 키워나가는
유혜연 조합원

유혜연 선생님을 섭외하는 과정에서 남편이신 이상재 선생님도 같은 시기에 새롭게 길목의 회원이 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유혜연 선생님을 인터뷰하는 시간에 이상재 선생님이 기꺼이 찬조 출연을 해주신 덕분에 더욱 유쾌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 지면을 빌어 두 분께 먼저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Q. 안녕하세요. 바쁘신 와중에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떻게 두 분이 함께 향린교회에 다니게 되셨는지가 궁금합니다.
(유혜연) 2011년부터였어요. 물론 저는 그동안 교회를 두 번 소원하게 다니다가 들어오기도 했지만요. 저희가 CC(캠퍼스 커플)인데 저는 원래 성당을 다녔고 남편은 교회를 다녔는데, 결혼은 역삼동 성당에서 했습니다.
(이상재) 제가 모태신앙입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다니다가 신앙의 방황 시기가 와서 한동안 교회를 안 다녔어요. 아이를 낳고 다녀야지 했는데 지역에서 교회에 다니다가 향린교회로 오게 되었습니다.
(유혜연) 둘 다 종교적인 집안에서 커서인지 아이들이 크니까 신앙 속에서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처음엔 동네에 있는 보수 교회를 다녔어요. 참 은혜롭고 풍성하게 잘해주시고, 성경 공부도 1:1로 양육해 주시고, 저희를 챙겨주셨고 품어도 주셨습니다. 아이들 교회학교에 대해서도 아낌없이 지원하고 물심양면으로 정성을 다해 아이들도 많이 사랑해 주고 해서 인간적으로 따뜻하고 좋은 교회이긴 했는데, 어느 순간 좀 더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향린교회가 참 특이하긴 해서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필요했던 것 같아요. 좀 살가운 면이 없다고나 할까. 그래서 처음엔 유령처럼 왔다 갔다만 했던 기억이 있어요.
(이상재) 2010년도에 연평도 포격 사건이 벌어졌는데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 설교 중에 "포격의 근거지를 타격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성경적인 비유로 "유혹이 생기면 그 유혹을 뿌리칠 뿐만 아니라 그 유혹의 깊은 원인까지도 박멸해야 한다"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비유가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럼 평양을 타격하자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몇백만 명 이상이 죽는 전쟁을 하자는 이야기인가 싶어서 이런 설교를 그대로 앉아서 듣고만 있을 수는 없겠다는 마음에 교회를 옮기게 된 겁니다. 물론 그런 의도로 말씀하신 건 아닐 수도 있지만 그때 저희 마음은 그랬어요.
Q. 아무래도 다른 교회에 다니다가 향린교회로 오게 된 계기는 대부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저도 예전에 그런 경험이 있어서 크게 동감이 되네요. 향린교회에서 활동이 매우 활발하시다고 들었습니다. 두 분은 주로 어떤 활동을 해오셨나요?
(이상재) 2011년부터 계속 사회부에서 활동을 해왔고, 올해 향린교회 사회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사회부는 자주 평화, 군사훈련 반대나 미군기지 철수, 노동·인권, 환경 등과 같은 사회적 이슈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부서입니다. 2011년에 교회를 처음 왔을 때는 '이런 교회를 왜 이제야 만났나'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뜨거워져서 다녔던 것 같아요. 대개 교회는 여성들이 종교 활동을 열정적으로 하는 반면에 향린교회는 남성들의 참여가 굉장히 활발해서 집에서는 싫어하는 경우도 가끔 있습니다만. (웃음)
(유혜연) 명동 시절에 '안방'이라고 교회 안팎으로 연대해서 투쟁하는 분들이 밤늦게까지 일하다가 숙직하는 곳이 교회 안에 있었어요. 사실 윤석열 퇴진 운동 때도 교회 일부를 개방해서 쓰게 하기도 했고요. 명동 시절 투쟁 현장에서 늦고, 사회부 회의하다 늦고, 뒤풀이하다 늦는 등 귀가가 많이 늦어져 제가 조용히 트렁크에 짐을 싸서 문앞에 내놓고 가서는 "이제 집에 아예 올 필요 없다"며 "교회에서 살라"고 할 때도 있었습니다. (웃음) 그때는 아이들이 어려서 저는 가정을 지키면서 관망하는 시기였죠. 적당히 집회 좀 나가라며 어려운 현실이 야속하고 속상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계엄 시작 때부터 탄핵 선고 때까지 사회부에서 매일 광장에 천막을 설치하고, 남편은 광장에서 매일 살다시피 하며 묵묵히 광장 천막을 지켰고, 저도 곁에서 자주 윤석열 퇴진 때까지 같이 참여를 하다 보니 지난날 그 뜨거웠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요. 아이들도 크고 해서 우리가 이런 비정상적인 사회 상황에서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함께 손잡고 나가보니까 '예전에도 이랬겠구나, 이런 열정이 필요했구나'라는 마음이 되어서 남편의 입장을 십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저도 같이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내란 사태 이후로 교회에 20대, 30대 교인들도 많이 늘어났고요.


(유혜연) 저는 청년여신도회(이하 청여) 회장이었어요. 지난달까지 맡았고 이제 7월부터 권지숙 집사에게 이임한 상황입니다. 청여는 청여신도회 활동을 주관하는데, 우선 신도들이 잘 다닐 수 있도록 챙기고, 교회 행사 등에 인원도 파송하고, 새 신자를 잘 챙기는 일을 하며, 특히 요즘은 청여가 관상기도에 푹 빠져 매주 같이하는데 매우 은혜롭고, 장동원 목사님 인도 하에 명상하며 기도하는 습관이 매일 생겨 아주 신앙적으로 풍성해져 좋습니다. 특히 작년부터 올해까지 청여에 새 신자가 많이 들어와서 활력이 넘치고 많이 바빠졌고 관계가 더욱 충만해지고 교제가 깊어져 교회 생활이 더불어 행복합니다.
앞으로는 어린이부 교사로 봉사하려고 해요. 저는 초등학교에서 심성수련상담사로 오랜 기간 아이들을 교실에서 만나고 있습니다. 예전에 우리 아이들 키울 때 어린이부 교사를 했었는데 다시 돌아간 셈이죠. 제 아이들을 키우면서 정말 한 가족, 한 마을, 한 교회 등 사회 전부가 아이를 같이 키우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향린교회에 늘 감사해요. 우리 아이들이 성인으로 자라는 데 있어서 교회의 역할이 컸거든요. 그래서 저도 이제 '향린 키즈'를 신앙적으로 키우고 잘 자리매김시켜서 좋은 성인으로 길러내보자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최근엔 신자가 줄어드는 추세이기 때문에 이러다가는 교회의 교육 부서가 없어지겠구나라는 위기감이 있습니다. 제가 많은 은혜를 받았던 부서가 앞으로 없어질 수도 있겠다는 절박감이 들어서 저라도 참여해서 즐거운 분위기로 만들어 아이들이 더 많이 찾을 수 있는 곳이 되게 해야겠구나 라는 사명감이 있어요.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사실 종교가 종교 그 자체라기보다는 여러 체험 중의 하나로 인식되는 것 같아요. 명상이나 템플스테이 같은 것들과 같이 두고 선택해서 오는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고민이 많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들을 오게 하고 머무르게 할 것인가에 대해 한문덕 담임목사님과도 여행 중에 많은 대화를 나누었어요. 제가 워낙 담임목사님 팬인데다 오시기 전부터 한 목사님이 오시기를 기도했던 터라 앞으로 기대하는 바가 큽니다.
Q. 청여 활동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유혜연) 청여에서 저는 36살 때부터 활동을 했어요. 거의 10년 일찍 들어간 것 같네요. 청여신도회 언니들과 호흡이 너무 잘 맞아서 청여는 제게는 떼려야 뗼 수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아이들 키우기 힘들고 교회 문제로 남편하고 의견 충돌이 있을 때 언니들이 진심으로 저를 챙기고 위로해 주고 달래주고 힘들 때 손 내밀어주고 해서 힘든 시기를 잘 넘길 수 있었던 것 같아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제가 청여 회장을 할 때도 윤석열 탄핵 시국이라 더 그렇기도 했지만 계속 현장에서 청여 언니들과 청여 신도들과 연대하는 힘 덕분에 매일 청여 신도들을 이끌고 광장에 나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청여에서 새 신자에 대한 노력도 많이 기울여서 대부분 잘 다니고 계시거든요. 제가 밝은 기운으로 1년 반을 함께 울고 웃으며 동고동락했고요. 그래서인지 나가지 않고 잘 다니시지 않나 싶어요. 참 여러 가지 행사들을 했는데 제가 체력이 좋은 편이라 매우 튼튼하여 지치지 않는 장점이 있습니다. (코로나도 안 걸린 슈퍼 면역 보유자랍니다. 웃음)
(이상재) 아내가 학창 시절부터 굉장히 밝고 쾌활하고 다른 사람한테 에너지를 많이 주는 성격이에요. 제가 복학하고 어느 날 학교 앞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밝은 목소리로 웃고 활달해 보이는 후배가 한눈에 딱 들어왔거든요. 그게 아내였죠. 바로 영화 보자고 해서 사귀기 시작했고요. (웃음)
(유혜연) 제가 향린교회에 2011년 처음 들어왔을 때 서먹하고 낯설어서 두 번이나 떠나려고 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에, 청여 활동을 하면서는 상대방이 귀찮아할 것 같아도 자꾸 말을 걸고 활동을 같이하자고 초대도 하고, 그러면서 교회에 안착할 수 있도록 도우려고 했던 것 같아요.




Q. 향린교회에 15년 정도 계셨고 여러 활동들을 해오셨는데 바라시는 바가 있을까요? 아무래도 이 시대에 걸맞은 향린교회만의 역할이 있을 것 같습니다.
(유혜연) 향린교회가 사회에서 한 역할은 정말 컸죠. 사회부 같이 사회 참여적인 성격의 부서가 있는 교회는 흔치 않으니까요. 이런 기반으로 좀 더 이 분위기를 사회에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성경 읽기나 예배는 당연히 해나가야 할 일이지만 교회 밖의 사회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많은 위험과 부조리, 약자에 대한 불평등에 대해 사람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는 역할을 더 공고히 해나가면 좋겠다는 바람이죠. 우리 교회가 한국 근대사 격동의 현장 속에서 민중신학의 상징과도 같은 교회이고, 그간 민주화, 인권, 노동, 통일 운동에도 매진했지만, 현실에서 청년 예수 깃발을 들고 민중신학을 바탕으로 사회적 약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현장에서의 손길은 여전히 부족하여 사회적·역사적 상징성 대비 참여도가 낮아 교회 구성원의 관심과 참여가 절실히 필요한 실정입니다. 새 교인분들의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이번에 길목에서 진행한 '압록강에서 두만강까지' 여행을 저희 둘이 다녀왔어요. 거기에서 인상적인 것들 중 하나가 명동촌과 명동학교였어요. 한 마을, 한 교회가 우리나라를 살리는 적극적인 버팀목 역할을 했고 그곳에서 많은 인재를 키워서 독립운동의 중심 인물로 서게 한 과정을 들으면서 우리 향린교회도 이런 역할을 위해 노력해야 할 시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겉으로는 평안해 보이지만 해결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는 시기라.
제가 이번에 연극 <선천댁>에 캐스팅이 되어 좀 전부터 연습에 참여하고 있거든요. 박영숙 선생님 역할로요. 그래서 지난달 인터뷰가 송정바우 선생님이라 깜짝 놀랐습니다. 뭔가 연결되는 느낌이 들었어요. 아무튼 그 연극을 보니 '선천댁'이야말로 안병무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그 민중신학의 대표적인 분이구나, 안병무 선생님의 힘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구나라는 깨달음이 들었습니다. 이런 감명 깊은 내용을 연극으로 담아내다니 굉장히 뜻깊게 다가왔어요. 중국 여행 가서 버스 안에서 대본을 읽었는데 대본 속 선천댁이 명동촌이나 명동학교와도 다 연결이 되어서 또 한번 놀랐습니다. 사진이 있더라고요. 윤동주 선생님과 문익환 목사님, 송몽규 선생님 그리고 곁에 안병무 선생님 사진. 이렇게 좋은 분이 우리 향린교회를 만드셨으니 민중의 소리를 담아 더 적극적인 사회 연대 활동을 하는 교회로 한번 더 도약할 수 있어야겠다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길목 회원 여러분들도 올해 10월에 공연할 <선천댁> 연극 보러 많이들 오시면 좋겠습니다. (응원합니다!)
Q. 길목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참여하는 프로그램은 있으셨는지, 바라시는 바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유혜연) 이번 '라구요'('압록강에서 두만강까지' 여행의 단톡방 제목이라고 합니다) 여행이 첫 길목 기행 참여입니다. 교회의 일정 부분 지원을 받아 운영되기 때문에 사회적 선교 성과보고도 하며, '심심'같이 좀 더 길목만의 색깔을 낼 수 있는 실질적인 사회 선교 프로그램이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교회가 길목을 키우고, 길목은 교회를 다시 세상으로 데려가는 구조로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포괄적이고 넓은 범위로 방대하게 진행하기보다 좀 더 깊고 좁게 내실을 다질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해서 사회의 소외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파고들어가면 좋겠다 싶기도 하고요. 교회 울타리를 넘어 입체적 선교를 위해 만들어진 길목이 향린의 신앙적 가치 토대 위에 교회 밖에서도 실천과 연대를 통하여 교회의 사회적 선교 역할이 적극적으로 작동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길목 활동을 통해 우리는 결국 무엇을 하려 하는가' 길목다운 방향성을 잡고, 좀 더 세상 속에 향린다운 선교지향적 가치가 향기롭도록 명확한 공익증진 사업을 펼치며 사회 선교 플랫폼 역할을 해내길 바랍니다.
사실 이번 여행, 정말 매우 만족스러웠어요. 다음에는 투어를 뛰어넘는 역사 참여 방식으로 접근하면 더 의미 있는 프로그램일 수 있을 듯합니다. 예를 들어 다음엔 비슷한 루트로 가기보다는 여순 감옥에 갔다가 하얼빈 의거 현장을 눈으로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도 묵상하고) 안중근 의사의 재판소도 살펴보면 묵직한 울림이 더해져 마지막 신념을 증언한 현장이라 특별한 장소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 발굴 추정 장소를 한번 거친다든가 명동촌에 가서도 자세히 살펴보며 (윤동주 '십자가', '서시' 등도 낭독하고) 김약연 선생 묘소나 봉오동, 청산리 전투지 등을 들러서 역사책에서 느낄 수 없는 만주벌판의 치열한 독립운동을 마음에 새겨도 좋을 것 같습니다. 도문이나 연길까지 갔으니 독립열사들이 우리 독립을 위해 희생적으로 임했던 역사적인 현장에 가서 이들에 대한 처우 개선에 대한 외침을 행동으로 옮긴다든가하는 시민적 실천 선언을 하는 것도 역사적으로 의미 있고 좋을 것 같고요. 다음 길목 투어에서 명동촌에서 태동한 민중신학의 현장에서 '길목의 미래 선언문', '명동촌 정신 계승 프로젝트'나 '명동촌 평화학교 계승' 등 선언적 행사를 함께 진행하면 일반 여행 상품과의 차별성이 그런 곳에서 나올 것 같습니다. (배운다 > 만나다 > 이어간다 > 행동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여행에 대한 만족도는 최상이었습니다. 굉장히 힘든 일정이었지만 일주일 내내 저는 너무 흥겨웠어요. 조선족과 같이 연변 거리를 산책하다가 조선족 어머니들이 '달타령' 노래를 부르면서 춤추고 계셨는데 손을 맞잡고 같이 추자고 하셔서 저희도 같이 가서 춤을 덩실덩실 추고 흥겹게 몇 곡 같이 춤추고 놀았거든요. 하루하루가 너무나 소중했습니다. 접경 지역에서는 건너편에서 보초를 서는 북한 군인과 인사를 나누기도 했죠. 압록강을 지나가면 오른쪽은 북녘땅이고 왼쪽은 중국 땅이라 큰 소리를 지르면 북쪽 사람들이 들을 수 있거든요. 북한 술도 맛있는 게 많았습니다. 들쭉술이 최고였고요. 중국 장마당에 가서도 대왕 블루베리 비슷한 게 너무 싱싱해 보여서 한 박스 사서 먹기도 했고요. 매일 이렇게 재미난 일들이 많았습니다. 이동 거리가 길다 보니 충분히 못 자고 이동해서 좀 힘들 수는 있었지만 저는 정말 좋았습니다. 제가 이런 여정을 짧게 유튜브 영상으로 만들기도 했는데 반응이 꽤 좋았어요. (▶ 영상보기)

백두산 천지를 못 본 건 아쉬웠지만요. 그날 안개가 너무 짙어서 '천지 분간이 안 되는 천지'를 보고 왔지 뭐예요. 바로 앞도 안 보일 만큼 안개가 짙어서 보초 서시는 분은 몸을 밧줄로 묶고 계시더라고요. 천지 보러 다시 한번 가야죠. (웃음)
길목에서 하는 프로그램 중에 '심심'은 아직 하고 있지요? 이게 정말 의미 있고 사회에 공헌을 많이 할 수 있는 대표적인 프로그램인 것 같아요.
(이상재) 심심은 길목의 자랑이죠. 사회부도 계속 투쟁을 이어오다 보니 활동하시는 분들 중에 스트레스가 누적된 분들이 많아서 심심 프로그램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유혜연) 이런 역할을 하는 프로그램을 계속 발굴해나가는 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게 길목의 과제가 아닌가 싶고요. 일면 소소해 보이지만 민중의 삶에 뭔가 도움이 되는 역할을 찾아야 하는 거죠. 예전에 크레인 농성하는 분들에게 식사 제공하던 활동도 정말 힘든 일이었는데 해내었고요. 이런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누가 알아주거나 칭찬해서 하는 건 아니지만 지속적인 관심과 연대와 응원, 그리고 참여가 필요하거든요. 하는 사람만 계속할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의 동의와 참여를 이끌어내어서 교회의 지향점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점차 늘려가는 게 풀어가야 할 숙제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게 아마도 향린교회 그리고 길목만이 해낼 수 있는 방향성이라고 보고요.
명동촌에서 향린교회까지 이어지는 민중신앙의 흐름 속에서 명동촌은 사람을 길렀고, 안병무 선생은 사람의 아픔 속에서 예수를 찾았으며, 향린교회는 이제 그 예수를 오늘의 약한 이웃 가운데 다시 만나야 합니다. 이제 우리 만나러 손잡고 나갑시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