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낙영107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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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리(Bori) 님이 나타났다 카니더!

성 밖 외딴집에 사는 노파 키아나(Kiana)가 두려움에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이곳 얌나르에서 한 파르상(Farsang)1)쯤 떨어진 자잔(Jazan)으로 가는 길 중간 지점에서 백여 마리의 염소 떼를 치는 아들 라쉬드(Rashid)와 살고 있었다. 성정이 가벼워 남의 말 전하기를 즐겨하였고, 그렇게 하지 못하면 안달이 나는 사람이었다. 한 번은 자잔에 사는 여인이 다급해서 그녀의 염소우리에서 소변을 보고 일어서다 숫염소에게 들이 받히는 일이 생겼다. 미쳐 옷매무시를 가다듬지 못해 모양새가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키아나가 본 것이었다. 말하기 좋아하는 카아나는 성안으로 들어와 그 여인과 숫염소 사이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떠벌리고 다니다, 베흐자트에게 불려가 호된 질책을 받았다. 키아나는 성주의 불호령에 벌벌 떨며 두려워서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였다. 그 후로는 될 수 있으면 성안 출입을 자제하는 중이었다. 이번에 저 스스로 로샤낙을 찾아와 부리의 출현 소식을 알리는 것은 훼손된 위신을 어느 정도 회복할 기회라고 판단하여 두려움을 무릅쓴 것이었다.

-나타났다 카는 기 무신 말이니껴?

로샤낙이 다그치듯 물었다.

-제 아들 라쉬드(Rashid)가 염소를 몰고 부할라즈 산 쪽으로 갔다가 멀리서 말을 달리는 부리 님을 보았다 카니더.

키아나는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였다.

-멀리서 보았는데 부리 님인 줄 우째 알았다니껴?

-말 뒤꽁무니에 깃발이 꽂혀 있었고, 왼손에 언월도를 쳐들고 있었다니더. 그라고 입성이며 머리 모냥이 영락없이 부리 님을 똑 닮았다니더. 

-어데로 가더라니껴?

로샤낙이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키아나의 마음을 편하게 해줄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부할라즈 등성이를 넘어 가더라니더. 라쉬드 갸가 소릴 질러 불러봤지만, 부리 님이 타고 댕기는 말이 바람 같지 않니껴. 순식간에 등성이 너머로 사라졌다 카니더.

카니아는 아들 라쉬드가 부리를 불러 세우지 못한 것이 자신의 탓이라도 되는 양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알았니더. 곧 알게 되지 않겠니껴? 그라고 혹시 이 이야기를 다른 데서 한 건 아니지요?

-아이시더! 암 데두 안 했구마요.

카니아는 펄쩍 뛰었다. 로샤낙의 말은 다른 누구에게도 말을 옮기지 말라는 경고였지만, 그녀는 또다시 자신을 책망한다고 여겼다.

-알았니더. 수고했니더. 주방에 가서 밀떡 한 뎅이 들고 가시더.

로샤낙의 말에 카니아는 비로소 맘을 녹이고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밀떡 한 덩어리는 보상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것은 또 그녀의 자랑거리가 될 터였다.

카니아가 나가자 로샤낙이 베흐자트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카니아가 말하는 내내 굳은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미동도 없었다. 그것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로샤낙은 알고 있었다.

-계절풍은 때가 되면 다시 찾아와 분다 안 하니껴?

로샤낙이 넌지시 베흐자트의 의중을 떠보았다.

-계절풍은 자연의 일이고 바람은 머물지 않고 지나칠 뿐이제요.

한참의 침묵을 깬 베흐자트의 어투는 설산에서 불어오는 냉기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로샤낙은 그 냉기 속에 숨겨진 애증을 보고 있었다.

 

며칠 후, 부리와 구다르즈가 파르바르딘 정문을 두드렸고, 위병의 연락을 받은 로샤낙은 문을 열고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부, 부리 님이시니껴?

-아따, 참말로 오래간만이고마이. 잘 있었능 게라?

로샤낙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초원의 당골이었던 어미 아쉬테(Aşite)2)의 말투가 살아온 듯했기 때문이었다.

-자, 잘 오셨니더. ······잘 오셨고만이라!

로샤낙은 아이귈이 되었다.

부리가 빙그레 웃고 있었다.

-성주님 계시제요? 부리 님께서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카는데······

반백의 수염이 턱을 감싸고 있는 구다르즈가 내정에 눈길을 주며 물었다.

-들어 가이시더. 지가 후딱 가서 성주님에게 전해드리겠니더.

다시 파르바르딘의 수석 직원으로 돌아온 로샤낙이 서둘러 문을 닫고 한달음에 내달아 내실로 갔다.

본관 2층의 베란다에 서 있던 베흐자트는 현관을 들어서고 있는 부리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호흡이 가빠지고 다리의 힘이 풀려 난간 기둥을 붙잡고 겨우 서 있었다.

-베흐자트 님, 부리 님이시더. 구다르즈 님과 같이 오셨니더. 긴히 드릴 말씀이······ 

로샤낙이 올라가자 베흐자트는 간신히 발걸음을 옮겨 전실(前室)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전실이라고 하지만 너댓 명이 충분히 앉아 내실의 기별을 기다릴 수 있는 공간이어서 벽을 따라 놓인 의자에 겨우 몸을 얹고 있는 베흐자트의 모습은 왜소해 보였다.

-왜 그라고 계시니껴? 당당하게 서 있질 못하고······, 그렇게 무너진 모습으로 누굴 만날 수 있겠니껴? 베흐자트 님은 이곳 얌나르의 성주님이 아니시니껴? 사트라프의 사자가 아니라면 누구든 성주님 앞에 무릎을 꺽고 예를 차려야 하니더. 똑바로 서시더!

로샤낙은 냉정한 말투로 베흐자트를 고무하고 있었다.

-내는 지금 쿠샤가 필요하니더. 그의 장한 모습과 결기가 어느 때보다도 간절하니더. 그런데 그는 없고 그가 형제로 여겼던 부리가 왔니더. 부리에게서 쿠샤가 보이제요. 그게 두려운 거 시더.

베흐자트는 겨우 자세를 가다듬으며 섰다. 무릎과 허리에 힘을 주려고 애썼다.

-부리 님이 오셨니더!

잘레가 낮고 작은 목소리를 급하게 내던지며 들어왔다. 그리고 어색한 방안 공기에 움찔하며 의아하게 여겼다.

-잘레 님, 잘 왔니더. 들어가서 성주님이 예복으로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시더!

로샤낙의 단호한 말투와 자신에 대한 갑작스런 경칭에 놀란 잘레가 베흐자트와 로샤낙을 번갈아 보았다.

-부리 님이 혼자 오질 않고 구다르즈 님을 대동하고 오신 기는 다른 이들의 눈을 의식할 필요가 있어서라고 보이니더. 성주님도 메디안 예복3)을 입고 그를 맞아 성안 백성들에게 과시할 필요가 있니더.

로샤낙의 말에 베흐자트와 잘레는 어리둥절하는 눈치였으나, 두말하지 않고 내실로 들어갔다.

 

엉덩이와 허벅지를 가죽으로 덧댄 아낙시리데스(Anaxyrides)4)와 부츠는 언제든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말을 타고 군대를 지휘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표시이다. 종아리까지 내려와 옆이 트인 흰색 튜닉 위에 무릎길이의 자색 튜닉을 덧입은 것은 영주의 권위를 드러내는 것이며, 허리를 세 번 둘러맨 청색 쿠스티는 신의 권위에 매여있음을 가리킨다. 허리춤엔 단검 아키나카(akīnaka)5)를 차고 있는데 그것은 쿠샤가 사트라프를 통해 대제(大帝)로부터 하사받은 것으로 영주의 지도권을 나타낸다. 가슴과 팔꿈치를 덮은 붉은색 어깨 망토는 대제의 권위에 복종하는 귀족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메디안 예복을 차려입은 베흐자트의 오른편에 성장한 잘레가 쿠샤에게 파르쉬드가 그랬던 것처럼 비서장의 자격으로 서 있었고, 왼편에는 얌나르의 병부사령(兵部司令)인 여장(女將) 골브안(GolbAn)과 파르바르딘의 상단을 총괄하는 도행수 바흐아도르(BahAdor)가 민병대장으로써 서 있었다. 

베흐자트는 의전이 과하지 않은가 생각했지만, 쿠샤의 의형제인 부리의 위상을 백성들에게 과시할 필요가 있다는 로샤낙의 의도를 따르기로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부리에 대한 베흐자트의 미묘한 감정이 드러나는 것을 희석해 불필요한 오해가 성중에 퍼지는 것을 경계하자는 뜻도 있었다.

이윽고 부리와 구다르즈가 접견실로 들어섰다. 그들은 뜻밖의 접견실 풍광에 놀랐다. 

‘로샤낙의 장난이군!’ 부리는 곧 미소를 지었다. 

접견실 뒤편엔 언제 불러들였는지 아베스라와 파르바르딘의 직원 일부, 그리고 성읍의 대표적인 수다쟁이 몇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반짝거리며 서 있었다.

부리와 구다르즈가 베흐자트를 향해 무릎을 굽히고 오른손을 왼쪽 가슴께로 올리며 예를 표시하였다.

-어서 오시오!

베흐자트의 목소리가 호두까기에 물린 잘 건조된 호두가 부서질 때 나는 소리처럼 메말라 있었다. 

-쿠샤 님의 의제이며 그분에 의해 얌나르의 군사(軍師)로 제수된 바 있는 부리가 성주님의 존안을 뵙것고만이라!

부리가 거듭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로샤낙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무런 언질도 없었건만 부리는 로샤낙의 마음을 읽고 그대로 따라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다시 찾아주니 고맙습니다. 동행해 주신 구다르즈 님께도 치하를 드립니다. 로샤낙 수석은 두 분과 병부사령 그리고 민병대장을 ‘쿠샤의 방’으로 안내하세요. 성읍민들의 민원을 듣고 곧 가겠습니다.

베흐자트는 성주였다. 성읍민들이 있는 자리에서 산 위 떠돌이 부족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면 그들에게 공연한 불안감을 주게 될 것이기에 자리를 서둘러 분리할 필요가 있었다.

베흐자트가 읍민들에게 할 말이 있으면 무슨 말이든 얘기하라고 했으나, 로샤낙에 의해 서둘러 불려왔던 성읍의 호사가들은 딱히 할 얘기가 없었으므로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며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그라모 식사나 하고 가이시더. 식당에 얘기해 놓을끼구마요. 파르바르딘엔 오랬만이제요?

잘레가 씽긋 웃으며 어색해하는 읍민들이 곤란하지 않도록 운신을 도왔다. 로샤낙이 원하는 바도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성주의 식당에서 식사했다는 사실을 자랑삼아 떠벌일 것이고, 그들의 입방아에는 부리의 접견장면이 곁들여질 것이었다.

 

베흐자트와 잘레가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쿠샤의 방’에 들어서자, 간단한 다과를 앞에 놓고 담소를 나누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난번 성주님이 배설해 주셨던 아그레 시님의 법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니더. 아께 계신 것 같더니 같이 안 오셨니껴? 부리 님도 궁금해 하셨니더.

구다르즈는 자신과 아베스라가 나눈 이야기를 자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날 이후 그는 틈만 나면 가부좌를 틀고 앉아 단전에 힘을 주고 눈길을 코끝으로 모으는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는 외인이니더. 그가 부리 님이 하실 말씀을 들을 자리는 아니제요! 부리 님이 지나다 들렀을 리는 없고, 아미르카의 동태에 관한 것이 맞제요?

베흐자트는 간단하게 자리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었다.

-맞고만이라! 참말로 성주님이시오.

부리는 최근에 들었다는 산 위의 떠돌이 부족연맹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에 의하면 얼마 전에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 끝에 새로운 추장이 옹립되었는데, 불안정한 권력 기반을 다지고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부족들의 불만을 돌리기 위해 약탈 전쟁을 벌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부리의 말에 모두 긴장했다. 네 해 전에 그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고는 하지만, 성주 쿠샤와 부관 파르쉬드가 목숨을 잃은 일은 두고두고 치욕으로 여겨졌을 뿐 아니라 그들에 대한 공포가 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잘레가 수치와 두려움으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파르쉬드의 주검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로샤낙이 잘레를 끌어안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가장 큰 세력의 부족장이 아직 새 추장에게 충성 맹세를 하지 않고 있다는 야그요. 어쩌면 이참에 쩌것들을 분열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만이라.

부리는 그래서 찾아왔노라고 말했으나, 베흐자트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설사 저들에게 분열의 조짐이 보인다 한들 우리가 무얼 할 수 있겠니껴? 결국 그것은 그들에게 내부의 일이고, 우리는 외부의 존재 아이니껴? 더구나 쿠샤와 파르쉬드의 목숨을 앗아간 원수니더!

베흐자트는 단호했다.

-그걸 지가 까묵었겄소? 또 쿠샤 성님이 내게 베풀어준 정의를 생각허믄 그들은 원수로 치면 철천지원수요, 싸우기로 들먼 죽기로 싸워야 헐 상대지라. 더구나 평생을 떠돌먼서 칼질을 일삼고 비적떼들과 섞이기도 하고 싸우기도 한 게 저라는 인간 아니겄소? 다시 말허자먼 싸움이라먼 이골이 나서 밥 먹기보다 그 순서가 먼저였던 겝지라. 그럼에도 지라는 인격에 어울리잖게 싸움보다 이간질과 협상을 얘기하는 것은, 이 얘기가 사실은 쿠샤 성님의 생각이었기 때문이지라.

부리의 말에 ‘쿠샤의 방’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놀랐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얘기였기 때문이었다. 

-쿠샤 님의 생각이란 말이니껴?

가장 놀란 것은 베흐자트였다. 그들은 부부가 아니었던가. 그는 아주 사소한 일도 베흐자트에게 의견을 묻던 사람이었기에 도무지 믿기질 않았다.

-쿠샤 님이 산 위 부족에 대해 무슨 대책이 있어야겠다는 얘기를 한 적은 있었지만, 그들과 무엇인가를 도모해야 한다는 말은 지나가는 말로도 비춘 적이 없니더. 믿기 힘든 얘기시더.

베흐자트는 부리의 말에 미묘한 이질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럴 것이오. 쿠샤 성님은 그 일이 자칫 얌나르에 분란을 가져올까 염려 했응게요. 그라고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발끈허고 반대한 게 저였응게요.

부리의 눈꺼풀이 부르르 떨렸다.

-성님은 성읍의 백성들 안위만 생각했소. 그눔들과의 싸움에서 이긴다 해도 성읍의 인민들이 상한다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요. 피할 수 없다면 싸워야겠지만 피할 수 있다면 그래야겄지 않나 생각헌 거고만이라. 싸우지 않으면 상하는 백성도 없게 될 것이라고 말했지라. 그래서 지더러 은밀히 산 위로 가줄 수 있느냐고 물었던 게지라.

부리는 짧은 탄식을 고통스럽게 내뱉고 있었다.

-지가 거절했었고만요. 성님이 두 번째로 그 얘기를 꺼냈을 때, 지가 그랬고만요. 칼로 싸워서 이기는 건 자신 있지만, 말로 싸우는 것은 해본 적이 없응께 다시는 그런 말을 허덜 말라고 말이요. 지는 평생을 칼질로만 산 사람 아닌게라. 싸워서 이기먼 되지 읍민 몇이 죽어 나가는 게 무신 대수냐고 그랬지 않았겄소. 그때 성님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소. 별빛을 잃고 방향을 종잡을 수 없는 폭풍 속에 선 사람의 얼굴이었당께요. 그람서 혼잣말로 그랬어라. ‘아우, 싸우는 기는 젤로 쉬운 일이제. 우리가 작은 성에 불과하지만, 비적 떼에게 지기야 하겄는가? 가장을 잃고 울부짖는 아낙들과 어린 것들을 또 보아야 하는 게 괴로울 뿐이제! 그 고리를 끊어내고 싶을 뿐이제!’ 그때 성님 말을 들었어야 했지라. 그때 산에 올라가서 일이 되든 않든 말을 섞었으먼 시간은 벌 수 있었을 것인디 말이오. 나가 큰 죄인이오.

부리는 거의 울상이 되어 있었다. 자신이 쿠샤의 청을 거절해서 종당에는 그가 죽게 되었다는 자책이 그를 옥죄고 있는 듯했다.

-성님 말이 맞었지 않었는게라. 지가 말을 안 허더라도 그 후의 일은 모도 다 잘 알 것이오. 그래서 지가 다시 온 거고만요. 

부리의 말에 ‘쿠샤의 방’은 시간이 멈춘 공간처럼 굳어 있었다. 누구도 입을 열어 경화된 시간에 균열을 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베흐자트도 잘레도 목 안으로 흐르는 울음을 견뎌내고 있었다. 그날 야음을 타고 무지막지하게 밀고 내려왔던 아마르카와의 치열했던 싸움 장면이 떠올랐고, 허망하게 스러져갔던 쿠샤와 파르쉬드의 모습이 꿈결인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내는 장군의 이름으로 남기보다 학자들의 수호자로 남고 싶은 게라. 내년쯤엔 참나무숲 바로 옆에 ‘철인들의 집’을 지을 거구마. 그들이 자유롭게 드나들고 머물면서 토론하고 그들의 논변을 정리하고 글을 쓰는 곳 말이제.   

하지만 이곳은 외진 곳이니더. 수사(Susa)와 파르사(Pārsa)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니더. 어쩌다 지나는 견유학파같은 떠돌이 학자가 아니라면 누가 이런 외진 곳에 일부러 찾아와 머물겠니껴.

처음에는 그렇겠지. 하지만 케르반 사라이를 통해 이곳의 존재가 알려지면 찾아오는 이들이 있을 끼다. 견유학자들이야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 자들이니, 그들이야말로 이곳을 알리는 발 달린 입이 아니겄나.

산 위 부족에게서 그들을 지켜야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시더. 

맞다. 그러기 위해 우리에겐 여전히 군대가 필요하고, 자금도 더 필요하고, 사람도 더 있어야 하겄제. 하지만서도 장기적으로 보면 사트라프나 대제의 주목을 받게 될 거고, 그들의 원조를 받을 수도 있을 테니 우리의 부담은 줄어들 끼라. 나는 이곳을 학자들의 성으로 만들어 이곳 얌나르에서만큼은 더는 피비린내가 아니라 학문의 향기가 피어나는 걸 보고 싶다 아이가.

 

베흐자트는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하던 쿠샤의 꿈이 생각났다. 그가 필생의 과업이라며 그녀에게 자신의 소망을 얘기한 것은 산위부족들의 침입이 있기 불과 보름쯤 전의 일이었다. 그날, 뉘엿뉘엿 해가 져가는 서녘 하늘은 보기 드물게 보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는 상서로운 일이라며 자못 흥분하고 있었다.

‘당신은 라타에슈타르(Rathaēštar)6)로 타고 났니더. 그게 영주이며 제국의 귀족에게 지워진 운명이시더.’

베흐자트는 쿠샤가 그의 꿈 때문에 받을지도 모를 상처를 생각하며 가슴 한켠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맞다, 우리 가문은 뛰어난 전사의 피를 대대로 물려주고 있지. 자랑스러운 일이고 그래서 내도 전사로 키워졌지 않았나. 다만 나는 거기에 더하여 새로운 꿈을 꾸는 거제. 그건 공부하는 사람들을 지켜주는 전사가 되고 싶은 거다. 우리 얌나르성을 문자향 넘치는 곳으로 만들고 그들을 지켜주고 싶은 거라.’

베흐자트는 그의 꿈이 터무니없다고 여겼다. 얌나르는 그저 제국의 변방에 위치한 작은 성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변방이 아니라 경계에 있는 기라. 동서의 문화가 겹쳐지는 경계 아이가. 먼 옛날 신두강 너머로 간 우리 조상의 일족이 꽃피운 동쪽의 문화와 서쪽 드라야(Drāyah)7) 건너편의 문화가 우리 제국에서 만나잖나? 우리 얌나르는 동쪽에서 불어오는 문풍(文風)을 제국으로 흘려보내는 통로가 될 것이고, 제국에서 융성한 다양한 문화가 소그드를 거쳐 치니스탄(Chīnistān)8)에까지 건너가는 또 하나의 길목이 될것이다. 그래서 비록 작은 성이지만 그 꿈에 다가갈 수 있다고 보는 기라.’

쿠샤는 얌나르의 지정학적 위상을 이용하면 항구적인 평화가 가능할 거라고 믿는 눈치였지만, 베흐자트가 보기엔 그로 인하여 크고 작은 분쟁에 휩싸일 확률이 더 높아보였다. 

또 얌나르는 쿠샤의 표현과는 다르게 제국의 나들목에 위치했다고 볼 수도 없었다. 대상들의 길에서 많이 비켜나 있었으며, 일부러 찾아 나선 사람이 아니라면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나칠 곳이었다. 그럼에도 쿠샤는 이곳을 새롭게 변화시키길 원하고 있었으며, 항구적인 평화의 땅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 산 위의 약탈자들과 연합하는 일을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결국 쿠샤의 꿈은 산위 부족들의 침공으로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지기도 전에 제단의 소지로 태워져 재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아무도, 심지어 베흐자트까지도 기억하지 않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지금 부리가 그것을 되살려 불러내고 있는 것이었다. 

 -하필 산위 부족이냐는 지의 짧은 생각으로 내뱉은 투정 아닌 투정에, 성님은 그들이야말로 약탈하지 않으면 생존이 어려운 존재이니 그들에게 안정적인 수입을 주지 않고서야 어떻게 샤타(Šāta)9)를 얻을 수 있겠냐며 달랬고만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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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아케메네스 시대의 거리 측정단위로 5.5~6Km쯤 된다.
2) 여성의 이름을 그것도 무녀의 이름을 기록했을 리 없었을 고대의 관행으로 보면 아쉬테(Aşite)는 이름이라기보다 돌궐족 무녀 가문의 성씨라고 이해해야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당 현종에게 반기를 들었던 안록산의 어머니로 기록된 아사덕(阿史德)이 있다. 아사덕은 아쉬테의 한자식 표기이다.
3) 공식행사 때 착용하는 대례복이 아닌 백성들의 청원이나 알현 때 입는 접견복을 일컫는다.
4) '언제든 행동할 수 있는 통치자'의 모습을 상징하는 고대 이란의 바지로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인들을 지칭할 때 "바지를 입는 사람들"이라고 부를 정도로 특징적인 옷.
5) 아시나케스(acinaces) 또는 아키나케스(akinakes)라고도 하는데 스키타이에서 유래하여 고대 페르시아를 통해 지중해 전 지역으로 퍼져나간 단검이다. 제왕이 호의와 신뢰의 상징으로 영주들에게 하사했다고 여겨진다.
6) 아베스타에 의하면 고대 인도의 크샤트리아에 해당하는 페르시아의 전사계급으로 군사(軍事)와 통치를 담당하였다. ‘전차에 서 있는 자’라는 뜻이다.
7) 고대 아케메네스 시대에 지중해를 일컫던 말.
8) 고대 이란에서 중국을 가리키던 말. 진나라를 뜻하는 친(Chīn)에 땅을 뜻하는 '-스탄(stan)'이 결합된 말. 
9) '만족스러운', '안심하는', '평안한 상태‘를 뜻하며, 불안이나 고통이 없는 이상적인 심신과 세상의 평화를 뜻하는 아베스타어.
 

오낙영 사진.jpg

오낙영(글쓴이,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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