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원료로 하는 기계
나는 책들을 집어삼키고 나서는 그것들을 달라진 형태로 역사의 거름더미에 내던지게 하는 천형에 처해진 기계이다.
_ 「딸 라우라와 사위 라파르그에게 보낸 편지」
1868년에 4월 마르크스의 딸 라우라와 사위 라파르그가 결혼했다. 신혼부부는 파리에서 여행 중이었다. 그런데 아버지 마르크스가 편지를 보낸다. 파리의 여러 도서관에서 자료 좀 찾아 달라는 내용이었다. 자기 책 몇 권을 사람들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까지 한다.
신혼여행 중인 딸한테 이런 심부름을 시키다니. 본인도 미안했는지 이렇게 얼버무린다. “얘야, 신혼여행 중인 너에게 이런 부탁을 하니, 네 아버지가 책을 엄청 좋아하는 사람인 줄 알겠지? 착각이란다.” 그다음에 바로 저 유명한 문장이 나온다. 나는 책을 집어삼키고 거름더미dunghill로 뱉어 내는 기계라고!
그냥 “나는 똥을 싸는 책벌레다”는 너무 직설적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답게 투입과 배출이라는 물질대사 개념을 끌어온다. 들어가는 건 책, 나오는 건 똥dung. 즉 거름더미라니 좀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새 생명을 키우는 밑거름 아닌가. 자조 섞인, 그러나 속내 깊은 자부심을 표현한 것 아닐까?
편지 말미에 영국 수상 글래드스턴을 언급하며, “그래도 그 양반보단 내 처지가 낫지”라고 덧붙인다. 가난한 서생의 지조가 콕 와닿는다. 마르크스가 자신을 고백한 말 중에 이보다 우리 마음을 더 움직이는 말은 찾기 어렵다.

라우라 마르크스(1863년 18세)와 폴 라파르그(1869년 27세)
학문의 길
학문에는 왕도가 없으며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자들만이 환한 정상에 도달하는 행운이 따른다.
_ 「모리스 라 샤트르에게 쓴 편지」
『자본』의 프랑스어판을 분책으로 출간하려는 라 샤트르가 있었다. 마르크스가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 걱정이 서려 있다.『자본』1권의 서두, 즉 상품의 가치 형태에서 화폐가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이 문제였다. 솔직히 지루하고 읽기 힘들다. 본인도 알고 있었다. 프랑스 독자들이 첫 마당에 질려서 책을 덮어 버리면 어쩌나. 그래서 추임새를 넣는다. “학문에는 왕도가 없다”고!
실제로 프랑스어판을 내면서 어려운 서두를 꽤 많이 다듬었다. 사실 ‘학문에 왕도 없다’는 말의 원조는 마르크스가 아니다. 그리스의 기하학자 에우클레이데스가 먼저 했고, 마르크스는 살짝 비튼 것뿐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슷한 취지의 권학문은 많았다.
새로운 이론을 내놓는 사람은 늘 이런 문제와 씨름한다. 기존 사고방식과 다른 개념을 쓰니까, 처음에 그 틀과 용어를 제시하고 익숙해지도록 하는 게 어렵다. 예컨대 등산도 마찬가지다. 산등성이까지 가파른 비탈을 올라야만 비로소 여유롭게 걸을 수 있는 완만한 능선이 나온다.
재미있는 점이 하나 있다. 모국어인 독일어판에서는 독자 걱정을 안 했는데, 프랑스 독자한테만 인내심을 걱정했다. 독일인은 끈기 있고, 프랑스인은 성격 급하다는 통념이 작용한 걸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