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미106

맥주와 위스키로 배우는 노동과 저항...

맥주와 위스키로 배우는 노동과 저항, 기도와 환대의 역사

(맥주인문학 유럽투어 맥투더퓨처 시즌2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편' 참여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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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했다. 연초에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맥주 위스키 기행이란 말에 덮어놓고 신청을 했으나 학기 말이 그렇게 호락호락할 리가… 공항까지 일을 싸 들고 가서 탑승 10분 전까지 일하다 성적 제출 버튼을 누르고 가까스로 비행기를 탔다. 도중에 거친 카타르의 도하 공항은 사막에 홀연히 솟은 유리 돔 속 울창한 인공숲과 세계의 사치품을 파는 상점들이 늘어선 화려한 모습이, 소설 <듄> 속 사막의 행성 아라키스에서 스파이스(석유의 비유)로 쌓은 부와 물이 넘쳐나는 아라킨처럼 비현실적이었다. 다시 비행기를 타고 만 하루의 시간이 지나 런던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여정은 시작되었다. 빅벤과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지나, 더운 오후 템스강을 따라 선 거대한 플라타너스가 만들어준 그늘에 감사하며 걷다가 성소수자들의 쉼터인 런던 LGBTQ+ 센터를 찾았다. 일행은 처음에 성소수자 시설이 그렇게 양지에 당당히 서 있는 것에 놀랐지만, '프라이드 먼스'인 6월 내내 가는 곳마다 관공서, 기차역, 백화점, 은행, 교회 등에 무지개 깃발이 나부끼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만큼 좋은 형편만은 아니었다. 지난 십 년 가까이 영국에선 트랜스젠더 혐오와 배제가 갈수록 두드러졌고, 특히 전 세계의 (그리고 우리 가족의) 사랑을 받았던 <해리 포터> 시리즈의 작가 J.K. 롤링이 자신의 유명세와 영향력으로 트랜스젠더 혐오의 글로벌 스피커 역할을 하고 있다는 역설적인 현실 때문이다. 트랜스 남성으로서 그 심각성을 너무 잘 아는 센터 활동가 다니엘은, 경제적, 사회적 자원이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과다대표되고 있기는 해도,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서로에 대한 연대는 굳건하다고 말했다. 언제나 느끼지만 인류학자로서 현장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중요하고 또 귀하다.

 

이후 12일에 걸쳐 우리는 역사덕후인 고상균 목사님의 해설을 들으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의 역사를 넘나들었다. 하지 다음 날 찾아간 스톤헨지에서는 기독교 전파 이전의 토착종교인 드루이드들이 영화 <미드소마>의 장면처럼 하얀 옷을 걸치고 의미불명의 의식을 치르는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전통 그 자체라기보단 과거를 발굴해서 만든 신흥종교에 가깝겠지만...

 

솔즈버리의 대성당에서는 왕의 무소불위의 권위를 제한하는 마그나 카르타 원본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점심 저녁으로 셀 수 없이 다양한 그 지역 맥주와 위스키를 맛보았다. 월드컵 기간이라서 더 그랬겠지만 펍마다 사람이 넘쳐났다. "물고기처럼 술을 마신다"는 영어 속담처럼 현지인도 방문자들도 술 마시는 물고기가 된 것 같았다.

 

콜빌의 마운트 세인트 버나드 수도원에서는 영국 유일의 트라피스트 에일 틴트 메도우를 빚는다. 수도원장님께서 직접 우리를 맞아주시고 카메라 크루까지 등장했으니 한국에서 온 맥주애호가들의 방문은 여기에서도 사건이었나 보다. 양조사의 안내로 양조장을 돌아보고 시음을 했다. 시럽처럼 진하고, 빵처럼 구수하면서도 꽃과 꿀과 마른 풀의 향이 퍼지는 검은 색의 틴트 메도우는 "맥주는 색깔 있는 물이 아니라 액체로 만든 빵이라야 한다"라는 트라피스트 수도승의 격언을 충실하게 실현한 듯했다. 자급자족은 물론, 노동의 산물로 지역의 약자들을 보살피는, 즉 노동이 기도의 한 모습인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작품'이라는 걸 실감했다. 시간이 없어 먹고 마시기만 하고 수도원의 고요한 분위기에 좀 더 젖지 못한 것이 송구스러웠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에든버러의 역사적인 분위기와 스카치 위스키의 향에 흠뻑 젖었다. 조니 워커 익스피리언스에서는 방문자가 선호하는 향을 테스트하는 것으로 시작해 연극배우의 화려한 퍼포먼스로 전하는 조니 워커의 역사, 스모키, 스파이시, 플로랄, 프루티, 위스키의 다양한 향을 대표하는 '위스키 바퀴'에 대한 프레젠테이션, 스코틀랜드 자연을 대표하는 전시와 디지털 아트, 애니메이션이 결합된 위스키 증류과정 등이 마술쇼처럼 펼쳐졌다. 홀린 듯 따라가다 보니 마지막에 자신의 취향에 맞는 조니 워커 위스키를 시음하게 되었다. 이 곳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조니 워커 '레전드'는 입에 닿는 순간 위스키 휠의 모든 방향으로 향이 몸 속으로 퍼져나가는 듯했다. 평소 위스키를 즐기지 않는다는 분들도 그 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다음 날은 끝없이 펼쳐진 초원을 몇 시간이고 달려 스카치 위스키의 성지 스페이사이드를 찾았다. 조니 워커의 원주 중 하나이기도 한 카듀 증류소. 잉글랜드의 눈을 피해 밀주 위스키를 빚는 것이 스코틀랜드의 저항이었던 시절, 감시하러 찾아온 관리들을 대접하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 술과 장비를 숨기도록 한 초대 양조장 주인 헬렌 커밍의 기지와 사업을 물려받은 며느리 엘리자베스의 불굴의 의지, 그들 이후로 대대로 증류소를 관리하고 돌봐온 "강인한 여성들"에 의해 카듀가 이어졌음을 입구의 전시와 역사 애니메이션에서 증언하고 있었다. 한편 스카치 위스키 공인 1호의 역사를 가진 글렌리벳의 거대한 증류소에선 2, 3층 높이의 거대한 매쉬툰(당화조)과 증류기를 돌아보며 글로벌 기업의 규모와 기술에 압도당했다.

 

스코틀랜드 노동자들의 맥주인 테넌츠 양조장이 있는 글래스고를 거쳐, 페리를 타고 아일랜드로 향했다. 잉글랜드의 지배와 수십 년에 걸친 무장 투쟁 과정에서, 아일랜드인들끼리의 분쟁 한가운데 아이부터 노인까지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은 아픔을 간직한 북아일랜드의 도시 벨파스트를 지나 우리는 여정의 마지막인 더블린에 도착했다. 내게 아일랜드는 오래전부터 궁금한 곳이었다. 오키나와 이민자들의 예술 연구를 하던 시절, 일본에 의한 지배와 '소철지옥' (기근이 들어 독이 있는 소철 녹말을 먹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사건), 굶주림을 피해 일본 본토, 하와이, 미국 본토, 중남미 등으로 이민을 떠난 역사적 경험 등으로 오키나와인들이 유독 문화적, 정서적 동질감을 느끼던 곳이 아일랜드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음악과 술에 대한 사랑, 비극적인 희생자로만 보기 어려운 유쾌함과 친근함까지 닮았다.

 

더블린의 펍에서 만난 한 어르신께서는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니 아드님이 서울에서 공부를 한 적이 있다고 반가워하셨다. 아이리시 위스키를 맛보고 싶은데 무엇이 좋겠냐고 여쭈었더니 "요즘 위스키는 이름을 멋지게 달고 광고를 요란하게 하고 하지만… 진짜 좋은 술은 오래전부터 변함이 없는 게 좋은 술"이라며 바텐더에게 "여기 이 두 레이디(투어 동행인이었던 유나 선생님과 나)에게 블랙 부쉬 한 잔씩 따라드려!" 하며 좋아하는 위스키를 사 주시는 게 아닌가! 기념으로 함께 찍은 사진을 에어드롭으로 전달해 드리니 "고마워 스티브 잡스!" 하면서 눈을 찡긋하셨다. 조사할 때 내가 술을 곧잘 마시니까 오키나와 어른들이 "이 친구는 (일본인과 달리) 역시 사람이 되었다"며 더 친근하게 대하던 그런 정서였다.

 

가는 곳마다 수백 년 혹은 천 년의 역사가 담긴 교회들과 술집들. 일일이 글로 담지 못할 정도로 보고 들은 것은 많고 마신 술은 더 많은(…) 것 같은 여행이었다. 에든버러와 더블린에서는 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그랬다면 간이 버티지 못했을지도…? 압축적인 일정에 현지 사람들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던 것이 아쉽지만, 소수자를 연구해온 문화인류학자로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는 다시 한번, 시간을 들여 찬찬히 돌아보고 싶은 곳이었다.

 

조수미

(명지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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