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수 본능
- 자본주의, 기독교, 음모론, 민족주의, 반페미니즘을 추앙하는 사피엔스의 본성에 대하여
저자 최정균 | 동아시아 | 2025.7.18
왜 가난한 사람들이 기득권층을 지지하는가
왜 한국의 보수는 친미, 반공을 외치는가
왜 보수주의자들이 종교나 음모론에 빠지는가
왜 부의 대물림과 불평등한 분배가 용인되는가
왜 젊은 남성들은 비자발적 독신자를 자칭하는가
보수, 도대체 그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인간유전체학자 최정균 교수의 『보수 본능- 자본주의, 기독교, 음모론, 민족주의, 반페미니즘을 추앙하는 사피엔스의 본성에 대하여』(동아시아, 2025) 책 뒷날개에 쓰인 물음들이다. 그동안 이 물음들에 대해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언론학, 심리학, 철학 등 주로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연구자들이 내어 놓은 대답들에 만족하지 못하던 차에 생물학자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책을 펼쳐 든다. 불평등한 경제, 혐오 정치, 착취 사회, 능력주의 문화 등 민감한 이슈들을 유전자의 관점으로 단도직입적으로 풀어헤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유전자 지배 사회』(동아시아, 2024)의 저자가 아니던가? 게다가 손에 잘 잡히는 46판에, 주석 빼면 200쪽 남짓이다. 간단명료하고 압축적인 문체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맞을 듯하다.
우파는 자신들의 생각이 합리적인 판단의 결과라고 주장하지만, 저자는 뇌과학과 유전학, 진화론으로 보수주의를 들여다본 결과, 그것이 고상한 이념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보수는 인간이 오랜 진화 과정에서 갖게 된 본성이고, 그 본성이 사회 속에서 드러난 모습일 뿐, 인간은 원래 보수적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인간을 'Homo Conservativus(보수적 인간)'라 부른다. 보수가 실제로 지키려는 대상은 체제 그 자체가 아니라 본성이며, 체제는 오히려 그 본성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살아남고 자손을 남기는 것이 목표였던 원시 시대 생물의 눈으로 보면, 변화를 싫어하고 위계질서에 순응하며 내 집단의 이익을 우선하는 태도는 매우 합리적인 생존 전략이었다. 이른바 '보수적 유전자'가 인류를 지배했기 때문에 인류는 지금껏 살아남은 것이다. 그러니 진보의 입장에서 보수를 비합리적이라 비판하는 건 의미가 없다. 그 비합리성야말로 생존을 위한 강력한 무기였기 때문이다. '물질'에 불과한 유전자가 인간의 '고차원적'인 가치관과 행동양식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겠다고? 저자의 대답은 단호하다. 그것은 '지식과 상상력의 부족'을 말할 뿐이다.(104쪽)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하고 빠르게 결론에 도달하려는 '인지적 종결 욕구'가 보수적 사고에서 휴리스틱(직관적 지름길) 의존을 강화한다. 이러한 인지적 편향은 능력 과시 신호를 왜곡되게 받아들이게 하고, 기득권층이 그 수혜자가 된다. 현대 유전학은 '인지적 종결 욕구'나 휴리스틱 같은 뇌신경 메커니즘과 보수적 성향이 유전학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밝혀내고 있다. 모노아민 산화효소가 덜 활성화된 유전자형의 사람들은 높은 공격성과 반사회적인 성향을 보인다. 세로토닌과 도파민 시스템과 연관된 유전자형에 따라 투표참여율이나 당파성 같은 정치 성향이 결정되고, 뇌 속의 편도체와 교감신경이 주관하는 불안 및 공포반응 그리고 생식에 대한 욕구로 연결된다. '모성애 호르몬'이라 불리는 옥시토신 회로에 미치는 유전자형은 '지역적 이타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의 조화가 정치적 입장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렇다면 진보적인 성향을 갖게 하는 유전자는 없을까? 앞서 설명한 보수성향의 유전자 발현 메커니즘의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면 보다 개방적이고 포용적이거나, 타인의 고통을 의식하고 공감하거나, 자신의 신념을 성찰하며 공정성을 수호하려는 진보적인 성향을 띠게 된다. 저자는 생물학적 연대 기준으로 비교적 최근(!) 진보 성향을 설명하는 유전자들이 활성화되었다고 설명한다. 문명의 발전 덕분에 생존과 번식에 대한 자연선택의 압력이 완화되었고, 그 결과 보수적 본능이 약한 이들도 점차 더 많이 살아남게 되었을 것이다.(134쪽)
정치 성향과 관련된 유전자들의 발현은 처한 사회적 환경에 크게 좌우된다. 최근 두드러지고 있는 젊은 남성들의 보수화 경향은 환경에 대한 적응의 문제이다. 저자는 경쟁적 환경에 놓인 젊은 남성일수록 보수화되는 경향을 생물학적·사회적 요인으로 설명한다. 특히 신다윈주의와 신자유주의 이념을 내면화한 청년 남성들이 '자발적 노예'가 되어 스스로를 '비자발적 독신자'라 부르는 현상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보수주의가 세상을 지배하는 데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한 도구가 기독교였다는 저자의 견해가 흥미롭다. 기독교는 인간의 종교적 본성을 딱딱한 교리에 가두며 보수 사상의 핵심이 되었지만, 성서의 본질은 위계나 차별이 아닌 '공정함'이었다고 주장한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독립선언서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성서 구절은 본질적으로 같은 공정성의 원칙이며, 신의 권위를 빌려 표현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기독교가 존엄하게 창조된 인간을 말할 때, 성서는 공정하게 창조되어야 할 인간을 말한다."(212쪽)
그러나 오늘날 근본주의 기독교는 이민자, 여성, 성소수자를 배척하며 성서 본래의 정신을 배반한다. 저자는 기독교가 문명 발전 이전 필요했던 '중간 다리'였을 뿐이므로, 이제는 그 체제를 넘어 성서의 공정함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무너지면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인간의 존엄성'이나 '타고난 인권' 같은 개념도 사실 허구라는 게 드러난다. "우리의 몸을 아무리 샅샅이 파헤친들 그 어디서도 존엄의 흔적이나 근거 따위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신비에 싸여 추앙받는 인간의 뇌도 생존과 번식을 위해 진화한 1.4킬로그램짜리 세포 덩어리에 불과하다.(213쪽)" 인권과 존엄성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고 인간이 끔찍한 비극을 겪은 후에야 합의해서 도출한 사회적 개념이다. 1948년 UN 세계 인권 선언이 나치의 대량 학살이라는 극단적 불공정을 겪은 후 나온 것이 그 증거다. 즉 인간이 "존엄하므로 공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공정하기 위해 존엄이 필요한 것이다.(214쪽)" 불평등이 심해진 오늘날 존엄성이 쉽게 무너지는 이유도, 그 밑바탕인 공정함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공정을 실현하는 데 필요하다면, 우리는 기독교가 준 '생명 존엄'이라는 관념조차 다시 생각하거나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미래 기술로 인한 수명 연장이 소수 기득권층에게만 집중되어 불공정을 감추는 수단이 된다면, 생명 존엄이라는 명분보다 "죽음의 자발적 선택을 윤리적으로 정당한 삶의 양식으로 받아일 수 있을 것이다.(215쪽)"
그렇다면 보수적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는 Homo Conservativus의 한계를 넘어설 존재로 마찬가지로 가상의 개념인 'Homo Liberalis(진보적 인간)'를 제시한다. 이들이 지닌 새로운 유전자는 탐색하고 배우며 잘못을 고쳐나가는 성향과 관련되는데, 원시 자연 상태라면 생존에 불리했을 이 특성이 역설적으로 문명 속에서 살아남아 번성했다. 즉 진보를 만든 것은 자연선택이 아니라 문명의 발전이며, 문명과 Homo Liberalis가 서로를 발전시키는 선순환이 이어진다.
이들의 합리성은 두 축으로 작동한다. '도덕적 합리성(공정함)'은 사회적 불의나 타인의 고통에 강하게 반응하며 위계 순응 본능을 거부하고 불의에 맞서게 하는 경보 시스템으로, 타고난 능력·성별·인종·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을 없애는 구조를 지향한다. '인지적 합리성(사유)'은 새로운 정보에 따라 기존 생각을 유연하게 바꾸는 '베이지언 뇌'의 특성으로, 습관과 게으른 사고에 갇힌 보수적 뇌와 대비된다.
생존과 번식만을 위한 유전학적 메커니즘, 그리고 이와 결탁한 보수주의는 '수동적 순응'에 불과하다. 반면 진정한 진보는 본능의 제약에서 벗어나 스스로 세상을 만들어가는 능동적 창조 활동이다. 보수가 정해진 틀의 반복이라면, 진보는 내면의 힘으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것이다. 진화의 굴레를 끊고 인간 스스로 존엄을 발명해가는 '창조적 진화'(베르그송)이자 '창조적 진보'를 향한 실험! Homo Liberalis의 공정과 사유의 길에 호기심을 갖고 동참하고자 하는 독자들을 초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