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혜정104

순례길 위에서 마음을 붙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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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시코쿠에 가기로 마음먹었던 건 시코쿠헨로에 대한 오래전부터의 동경 때문이었다. 십 년 전쯤 김남희 작가의 책에서 시코쿠헨로에 대한 글을 읽고, 흔히들 가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과는 뭔가 결이 달라 보이는 이 길을 꼭 한번 걸어보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을 가져왔더랬다.

 

시코쿠헨로는 일본 시코쿠 지방에 있는 88개소의 영장 사찰을 순례하는 종교적 실천을 의미한다. 이 88개의 사찰은 일본인들 사이에서 널리 숭앙받는, 진언종의 창시자이자 헤이안 시대의 고승인 홍법대사 구카이의 사적이 남아 있는 곳들로, 시코쿠의 네 개 현에 고루 퍼져 있다. 의견이 분분하긴 하지만, '88'이라는 숫자는 아마 88 번뇌를 뜻하는 게 아닌가, 해석하는 의견이 있다.

 

짧은 일정이라 88개의 사찰을 다 가지는 못하고 시작인 제1번 료젠지(霊山寺)에서 마지막인 제88번 오쿠보지(大窪寺)까지 가는 동안 열대여섯 개의 사찰을 둘러볼 수 있었다. 사찰에서 길에서, 시코쿠 곳곳에서 시코쿠헨로의 순례자들을 마주칠 수 있는데 이들을 '오헨로상'이라고 한다. 전통적인 오헨로상의 복장은 백의에 삿갓을 쓰고 등에는 사물함을 진 채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모양새다. 이들의 삿갓과 백의 위에 얇게 걸친 옷(오이즈루)에는 '동행이인(同行二人)'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 말은 '홍법대사와 함께 걷는다' 혹은 '홍법대사와 함께 걸으며 수행한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그렇게 혼자든 여럿이든 홍법대사의 상징인 지팡이(금강장, 金剛杖)를 쥐고 앞으로 조금씩 내딛으며 한 발 한 발 전진한다. 젊은이도 있고 연세가 지긋한 분도 있고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 일본인도 있고 외국인도 있지만 다들 한결같은 얼굴과 모습이다.

 

사찰에 도착한 순례자는 먼저 물로 입을 가시고 두 손을 씻어 몸을 정화한 후 (사찰엔 반드시 씻는 곳이 있다) 종을 친다. 본당에 가서 양초와 향과 금전 등을 봉납하고 나서 염주를 굴리며 본존을 향해 합장하고 불경(반야심경 등)을 독경한다. 홍법대사를 모시는 대사당 앞에서도 비슷한 절차로 참배를 하고 진언(주문)을 3번 말한다. 경내의 다른 불당과 부처를 차례차례 경배하면서도 각각 정해진 진언(주문)을 칭한다. 이렇게 참배를 마치면 지정된 장소에 '후다'라는 부적 같은 명찰을 바치는데 이것을 '오사메후다'라고 한다. 종이 한가운데에 홍법대사를 상기시키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오사메후다'를 봉납하면서 각 영장 사찰에 참배했다는 증거로 납경장에 붉은 도장을 받는다. 이 모든 과정에서 순례자들의 모습은 참으로 진심으로 다가온다. 진심으로 기도하고 진심으로 독경하고 진심으로 봉납한다. 경내를 걸을 때에도 하나하나 새김질하듯 천천히 걸으며 조용하게 움직이고 한 동작 한 동작에 정성을 기울인다.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면 꽃이 핀다'라고 했던가. 모든 모습에서 마음이 느껴진다.

 

종교를 떠나 그들의 마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그들의 진심을, 그들의 정성을 돌아본다. 무엇을 위해 저리 기도하고 읽고 걷고 하는 것일까. 끝없이 반복되는 길 위에서 수없이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그들은 마음에 뭘 담아가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담아가는 게 아니라 덜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놓아주면서 그저 나라는 존재 안으로 회귀하는 것일까. 그리고 함께하는 존재와의, 그것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그 무엇이든, 그 어떤 존재와의 공존을 느끼며 한 뼘씩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세상의 숱한 번뇌와 고통에서 멀리 떨어져, 존재함만으로 위안을 얻는 실존적이고 평등한 깨달음이 순례길 내내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어딘가에 마음을 다한 적이 있었던가, 문득 사무침이 든다.

 

이런 생각들에 미치니 시코쿠헨로를 전부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진다. 출발이 있고 도착이 있는 직선적인 산티아고 순례길과는 달리 윤회하듯 88개 사찰을 다 돌고 나면 다시 시작한 자리로 돌아오는 시코쿠헨로의 의미가 새삼 가슴에 와닿는다. 시코쿠헨로를 경험한 자는 평생 계속 시코쿠를 찾는다는 말도 있듯이 나도 그 언젠가 다시 이곳을 찾으리라는, 그때는 오롯이 혼자 길 위에 서서 나의 마음을 온전히 감당해내리라는 예감이 든다. 설레고 또, 두렵다.

 

* 시코쿠헨로에 대한 설명은 <현대 일본의 순례 문화> (한양대학교 출판부, 박규태)를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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