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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11 - 맥주는 평등하다! -3.8 여성대회를 맞이하며

에피소드 11

맥주는 평등하다!

-3.8 여성대회를 맞이하며-

 

 

1

 

여행력(?)을 자부하는 분들에겐 대개 자신만의 여행 콘셉트가 있다. 맛집, 소품 가게, 인스타 감성 카페, 빵지순례 같은 것들 말이다. 여러분들께서 '너야 뭐.......' 하실 것 같긴 하지만, 내겐 당연히 지역 양조장과 펍 방문이다. 특히,특히 맥주 양조시설은 꽤나 자주 보고 설명을 들어왔지만, 여전히 신기하고 경이롭다. 각각의 특징이야 모든 양조장에 다 있겠지만, 거의 예외 없이 양조 공간 한쪽엔 뭔가 가득 들어 있는 자루 같은 것이 쌓여 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 흘러 이제는 산업 현장엔 로봇만 가득하고 글도 발표 자료도 AI가 다 작성해 주는 시대라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람의 손을 타는 것은 있는지라, 양조 공간에서 그 무거운 것들을 운반하고 탱크에 넣고 하는 자리는 오랜 시간 사람, 그중에도 남자 사람의 전유물 같은 인상이 있었더랬다.

 

술자리는 또 어떤가? 많이 달라지고 있다곤 하지만 여전히 남성들의 만취는 많은 경우 낭만으로 인식되는 반면, 여성은 심지어 그가 피해자인 경우에도 그 음주와 늦은 귀가가 일정 부분 원인을 제공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여전히 부정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단언컨대 맥주는 그런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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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문명 대부분에서 술의 처음은 신비였다. 그도 그럴 것이 효모의 존재를 몰랐던 시절, 썩어가는 것 같았는데 뭔가 전혀 다른, 게다가 엄청 기분이 좋아지고 자꾸 생각나는 그 맛으로의 변화는 고대인들에게 있어 신의 조화가 아니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영역이었다. 맥주도 예외가 아니었다. 인류 최초의 맥주 문명인 수메르의 경우, 이 신비한 맥주 양조술을 전해 준 것은 인간을 너무도 사랑했던 여신 닌카시였다.

 

대지에 흐르는 강에서 탄생한 이여,

엔릴 신께서 정성껏 돌본 이여,

닌카시여!

당신은 큰 삽으로 향기로운 속재료와 꿀을 섞으십니다.

당신은 커다란 화덕에서 '밥피르(양조용 빵)'를 굽고

껍질 벗긴 곡물을 갈무리하셨나이다.

당신은 항아리에 물을 붓고 파도처럼 출렁이는 맥주를 빚으십니다.

당신이 다 빚은 맥주를 큰 그릇에 따를 때,

마치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범람처럼

웅장한 소리가 울려 퍼지나이다.

 

닌카시 여신을 위한 찬가 중 일부 -

(Miguel Civil, "A Hymn to the Goddess and a Drinking Song" Studies Presented to A. Leo Oppenheim, 1964에서 발췌)

 

전해주신 이가 여성이시니, 이를 계승하는 권한 역시 여성 사제에게 있었을 터! 수메르에서 맥주 양조 기술뿐 아니라 판매에 이르는 전 과정은 여성들의 독점적 영역이었다. 그 같은 사회에서 여성들이 맥줏집에 모여 늦도록 술 한잔 나누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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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초기의 유럽 역시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록 기독교에선 여성들의 공적 활동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거둘 생각이 없었지만, 맥주를 빚고 판매하는 것은 에일와이프(Alewife), 즉 여성 양조사들의 영역이었다. 그녀들은 헌신적인 노력을 통해 동네마다의 맥줏집을 운영했고, 이를 통해 가정 구성원들의 생계를 책임지기도 했다. 이들은 마케팅을 위해 맥줏집 현관문 위에 큰 빗자루를 걸어두었고, 자신이 직접 큰 모자나 잔을 들고 문 앞에 나가 손님을 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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끓는 맥아가 담긴 큰 솥, 커다란 빗자루와 검고 긴 모자....... 훗날 이 같은 이미지들은 중세에 마녀사냥이라는 광풍이 불 때, 빗자루를 타고 밤하늘을 날아다니는 마녀의 전형적 이미지로 둔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실상은 그들이 가진 경제력을 빼앗기 위한 음모이거나, 이들이 쥐고 있던 상권을 장악하기 위한 남성 정치 권력 및 종교 권력 기반 양조장의 모함이었다. 결국 이들 에일와이프들은 마녀로 비난받으며 삶의 자리에서 내몰렸고, 술 마시는 여성은 신앙을 버리고 타락한 존재, 교회에 의해 남성 아담을 파멸에 이르게 한 장본인으로 규정되었다. 정죄당한 또 다른 하와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여성을 솎아낸 맥주의 자리에서 남성은 마치 처음부터 자신들의 소유였던 것인 양 행세하기 시작했고, 이는 전 사회적 가부장제 질서 속에서 대물림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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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3.8 여성대회가 있는 이 3월에 꼭 말하고 싶었다. 맥주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적지 않은 광고 속에서 남성성 뿜뿜하는 남성들이 멋들어지게 들이켜는 그게 다가 아니라고, 맥주란 남성 질서 가득한 세상 속에서 거의 유일했던 여성들의 영역이었다고, 그 유산을 따라 지금의 맥주가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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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정신에 기반해 크래프트 비어 업계에서는 2007년부터 시작된 여성운동의 흐름이 있는데 '핑크 부츠 소사이어티(Pink Boots Society: PBS)'가 바로 그것이다. 이 단체는 미국의 브루마스터 테리 파렌도프에 의해 설립된 이래 맥주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교육과 네트워킹을 통해 그들의 커리어를 지원하는 세계 최대의 비영리 여성 양조인 단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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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BS의 여러 활동 중 가장 유명한 활동은 세계 여성의 날에 개최하는 'Collaboration Brew Day'와 여성 양조사들을 위한 장학금과 전문 교육비 지원 프로그램 등이다. 이를 통해 PBS는 업계의 유리 천장 타파, 즉 여성들이 맥주 산업에서 단순 보조 인력이나 매장의 얼굴이 아니라 레시피를 설계하고 공정을 책임지는 마스터로 자리 잡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여전히 강고하게 남성 중심적 젠더 위계가 작동하는 세상에서 어떤가? 점차 봄이 다가오는 3월, 마음에 드는 맥주 한잔 가득 담아 들고 모두의 평등을 외치는 술자리 한번 가져보시는 것, 멋지지 아니한가?

 

[추신 ] 핑크 부츠 소사이어티 가맹 양조장은 출시하는 맥주에 분홍색 장화 라벨을 붙인다. 한국에서는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브루마스터 김정하 대표가 운영하는 바네하임(서울 공릉동), 여성 양조사 육성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고릴라 브루잉(부산 해운대), 개성 있는 맥주 실험을 이어가는 미스테리 브루잉(서울 마포), 이제는 레전드라 말할 수 있는 화수브루어리(울산, 경주, 서울 수유동)와 플레이그라운드 브루어리(경기 일산) 등이 PBS에 참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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