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지100

약속하지 않는다

꽃 피고

나비 날고

풀벌레 울고

 

저마다 제 몫을 하고 있는

그 곁에

땅에 묻혀 제 구실 하는 씨앗도 있다

 

뭐라 하지 마라

네 눈에 어찌 보이든

다 제 할 일 잘하고 있으니.

 

<자화상>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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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섬 생활 5년 차가 되었다.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어느새!

어차피 아무 계획이 없이 왔으니 빠르고 늦고 할 처지도 아니지만 그래도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갈 줄은 몰랐다.

 

적어도 책은 좀 읽고 글은 좀 쓸 줄 알았는데, 아니면 있는 자료들이라도 정리가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한 게 없다. 교회도 그대로이고 교인 수도 그대로이고 안팎으로 뭐 딱히 달라진 게 없다.

 

그런데 한편 또 뭔가 달라진 것 같기도 하다. 언뜻언뜻 예전과는 다른 나를 발견하곤 하는데 여유로워졌달까. 느긋해졌달까, 표나게 드러나는 변화는 없지만 사람이 좀 달라진 것 같다.

 

가끔 하나님은 왜 나를 이곳으로 보내셨을까, 나는 그 지점을 정확히 이해하고 순종하고 있을까, 묻곤 하는데 아직 정확한 답을 얻지는 못했다. 그냥 너 하고 싶은 대로 살아봐라, 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쟤가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까, 한심해하고 계시는 건 아닐지 눈치가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섬은, 섬사람들은 따뜻하고 유쾌하게 나를 환대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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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우리도 김장했다. 가구 수도 적고 그에 따라 노동인력도 적으니 네 집 내 집 따로일 것도 없이 다 함께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며 했는데 그래봤자, 세 집이다. 다행히 날씨가 춥지 않아 바닷물에 간 절이고 솜씨 좋은 어르신들 덕분에 뚝딱 해치웠다. 하고 나니 큰 추위가 닥쳐서 다들 회관에 앉아 날리는 눈발을 보며 '아이고, 해부러서 다행이다, 다행이다.'를 연발하셨다.

 

그런 걸 보면 또 내 눈에 뚝딱일 뿐, 몸이 힘들고 마음에 짐이 되신 게 분명하다. 배추에 양념을 넣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가다가 가장 연로한 어르신께서 '내년에도 우리가 오순도순 이러고 있을까?' 하셔서 속이 울컥했다. 그러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지만 누구도 장담할 수는 없다. 더욱이 올해 건강하던 이웃이 갈수록 쇠약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더 착잡한 심경이다.

 

내일이 어찌 될지 알 수 없다는 것.

내가 섬에 들어와 달라진 것 가운데 하나는 약속하지 않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약속을 꽤나 중요하게 생각했고 지키려고 노력하고 약속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배가 언제 들어올지를 확신할 수 없으니 부득이 약속할 수 없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이제는 약속을 거절하는 일에도 꽤 편하고 자연스러워졌다.

 

가끔은 아무렇지 않게 내일, 모레 혹은 보름 후를 약속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제는 좀 놀라기도 한다.

'뭐지? 저 자신감은...'

 

물론 우리에게도 여러 계획이 있고 생각이 있고 섬 밖에서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대답은 한결같다.

"아, 그때 가 봐야 알지라."

 

약속이 없는 세상은 물속처럼 고요하고 자유롭다. 그리고 의외로 사는 데 별로 지장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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