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규99

자신이 가진 신앙의 눈으로... - 손끝이 맞닿는다면

자신이 가진 신앙의 눈으로 보는 사회적 이슈, 손끝이 맞닿는다면

 

 

지난 11월 30일, 교회는 대림절이라는 절기를 다시 맞이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네 주 동안, 우리는 기대와 설렘, 그리고 희망을 품으며 이 땅에 주어질 평화를 기억합니다. 동시에 우리 주변의 고통의 현장을 바라보고, 그곳에 함께 존재하기 위한 연대를 다시 다짐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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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세이 에큐메니칼 연구소

 

 

올해 대림절을 저는 스위스 베른 근처의 작은 개혁교회에서 맞이하고 있습니다. 11월 28일부터 12월 1일까지, 보세이 에큐메니칼 연구소 프로그램의 한 과정으로 '스위스 교회 방문(Parish Visit)'에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세계교회협의회(WCC)에 소속된 보세이 연구소에는 올해 3개 대륙, 22개국에서 모인 28명의 학생이 함께 공부하고 있습니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던 작은 학교를 떠나, 우리는 저마다 다른 지역의 교회와 가정으로 흩어져 낯선 곳에서 대림절을 맞이했습니다.

 

3박 4일 동안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집에서, 새로운 땅에서 일상을 보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문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 '나는 지금 낯선 곳에 있다'라는 감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 날 베른역에서 모두 다시 만났을 때, 친구들의 얼굴에 스친 안도감과 서로를 끌어안는 포옹을 보며 비단 저만 느낀 경험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목적이 '교회 방문'과 '문화 교류'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더라도, 낯섦 앞에서 스스로를 보호하는 긴장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경직됨은 어쩌면 오래전부터 제 안에 자리 잡고 있던 감각이었습니다. 대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 새로운 사역지에 처음 문을 열었을 때, 그리고 보세이에 처음 왔을 때도 저는 저만의 방식으로 몸을 단단히 하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갑옷'을 두른 셈이죠. 사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 다른 갑옷이 한 벌씩은 있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사람과 인사하는 순간, 그 사람과 장기간의 동행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혹은 서로의 차이를 조심스럽게 알아차리는 순간마다 우리는 갑옷을 걸칩니다.

 

보세이 연구소의 학생 공동체도 예외는 아닙니다. 대륙 사이의 미묘한 긴장, 신학적 성향의 차이, 성서와 공동체를 바라보는 관점의 간극 같은 '조용한 벽들'이 여기저기 세워져 있습니다. 이렇게 22개국에서 모인 28명도 각각의 벽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전 세계 26억 기독교인들은 또 어떤 모습일까요? 세계교회협의회 소속 356개 교단만 보더라도 '어떻게 일치를 이뤄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너무도 자연스럽습니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던 창조 질서를 회복하려는 헌신이며, 인류 공동체를 위협하는 도전을 함께 마주하려는 연대의 움직임입니다. 또한, 인간을 넘어 온 생명의 공동의 집을 지키기 위해 신학적 차이를 넘어 대화·이해·협력의 길을 찾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여전히 높습니다. 5명이 모여도 쉽지 않은데, 28명, 더 나아가 356개 교단은 과연 어떻게 함께할 수 있을까요?

 

보세이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사' 수업에서 마르틴 교수님은 에큐메니칼을 이렇게 표현하신 적이 있습니다. "에큐메니칼은 관계(relationship)다." 처음엔 가볍게 들렸지만, 곱씹을수록 그 말의 깊이를 알게 됩니다. 실제로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느냐에 따라 일이 풀리기도, 막히기도 하니까요. 이후 우리가 교수님과 나눈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관계를 만들 수 있을까?'

 

회의를 오래 한다고 관계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문서가 일치를 가져오는 것도 아닙니다. 문서는 일치를 위해 모였다는 증거일 뿐, 일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여전히 사람과 사람의 만남입니다. 교수님이 강조하신 말처럼, "문서 자체가 에큐메니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문서를 만들기 위해 서로에게 다가간 노력이 에큐메니칼한 것입니다."

 

비록 인맥 중심이나 '끼리끼리'라는 비판도 존재하지만, 저는 이것이 100년 이상 서로 그야말로 '박 터지게' 부딪히고, 다투며, 또다시 화해하며 지났던 세계 교회의 경험에서 나온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보세이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에큐메니칼 신학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뿐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서로에게서 배우고 관계를 쌓을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즉 관계의 장입니다. 그러나 그런 보세이 안에서도 우리는 다시 벽을 만납니다. 서로 갑옷을 두른 채 스쳐 지나가고, 때로는 대화보다 멀어짐을 택하기도 합니다.

 

그러던 중 스위스의 작은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저는 그럼에도 함께 살아갈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낯선 곳에서 느꼈던 긴장과 불편함 사이사이에, 우리를 이완시키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호스트 가족의 작은 친절, 목사님의 세심한 배려. 거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갑옷을 벗기지 못하더라도, 손끝이 맞닿는 정도의 작은 접촉이면 충분한 순간들이 존재했습니다. 어릴 적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에서 새끼손가락을 살짝 걸던 그 정도의 접촉. 어쩌면 그보다 더 작은, 아주 미세한 온기만으로도 벽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보세이에 온 첫 한 달 동안 저는 한국 교회에 대한 제 안의 분노를 선명히 마주했습니다. 한국에서는 너무 당연해서 보이지 않았던 감정이, 거리를 두자 오히려 선명해졌습니다. 여전히 그 분노가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저는 아주 작은 용기를 배우고 있습니다. '아예 다르다'라고 생각했던 이들과 손끝을 맞닿는 일이, 뜻밖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요. 물론 다시 더 단단한 갑옷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아마 그럴 가능성이 더 클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와 손끝을 맞닿는 우연한 순간, 뜻밖의 생명이 그 사이에서 피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배웁니다. 어쩌면 이것이 예수님이 낯선 이들을 찾고, 경계를 넘나들며 발휘하셨던 용기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갑옷은 때로 강철같아 폭력 앞에서 누군가를 지킬 수 있고, 때로는 설탕처럼 작은 온기에 녹아내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서로를 마주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변화도 시작될 수 없습니다. 어느 수업에선가 들었던 말이 문득 떠오릅니다. "일상의 작은 폭력이 전쟁을 만들고, 일상의 작은 환대가 평화를 만든다." 우리의 일상이 평화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평화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이 낯선 곳에서 겪은 벽과 환대의 순간을 나눠보았습니다.

 

모두의 대림절이 다정한 용기를 품은 평화의 시간으로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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