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내란 1주년에 즈음하여 마시면 좋을 맥주 추천
: 올드 라스푸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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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의 겨울이 시작된 지 일 년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같은, 그 어떤 거대한 담론을 떠나 내겐 매우 개인적인 그날의 기억이 있다. 지난해 12월 4일, 그러니까 내란발표가 없었다면 그 다음 날 아침 일찍 대전으로 강의를 가야 하는 스케줄이 있었던 바, 강의안을 마지막으로 본 후, 가장과 수다를 좀 떨다 잠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밤, '좌파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와 같은 그 얼토당토않은 발표를 보며, 놀라고, 어이없고, 분하고, 어처구니없고, 장교 복무 시절 작전계획에서 봤던 계엄 매뉴얼을 떠올리고, 그게 정말 실제로 전 군이 움직이는 상황이라면 국회에도 가야겠기에 일단 동네 구청 정문 앞으로 가서 오래도록 군의 점령 여부를 살펴보고, 그런 움직임은 없기에 이게 좀 이상하다 싶어 하며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특전사치곤 그리 강력하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고, 우여곡절 끝에 국회의원들이 국회에 진입해 표결이 진행됨을 보고, 다시 그럼 나는 강의를 가야 하나 아침 일찍 국회로 가야 하나를 고민하고, 또 뉴스를 보고 그러다가 날을 새고 말았었다.
결국 대전 강의는 집행부의 할까 말까 논의 끝에 예정했던 시간보다 늦게 시작하는 것으로 조정되었고, 많은 신청자들이 나처럼 뜬눈으로 밤을 보낸지라 절반은 결석했거나 와서도 숙면으로 지난밤의 피로를 달래게 되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강의는 망한 것이다. 나쁜 윤석열.......
그뿐 아니다. 그날의 한 주 전, 나는 KBS 시사 기획 창에서 진행했던 포괄적 성교육의 토론자로 출연하여 녹화를 진행했다. 나 같은 듣보잡이 어디 공중파에 그리 나올 기회가 많았겠는가? 올해가 되어서야 세상이 주목했던 리박스쿨, 넥스트 클럽 같은 극우성향 교육단체들의 준동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성교육 현장의 문제를 시청자들에게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건만! 그 다음 주 발생한 내란 통에 시사 기획 창은 예정된 방송을 미루고 내란 상황을 집중 조명하기 시작했다. 사측에 의해 자막도, 나레이션도 없는 방송이 나간 것도 그때....... 아무튼 그리하여 내가 출연했던 방송은 올 3월이 되어서야 세상 빛을 볼 수 있었으니, 녹화한 지 자그마치 만 3개월이 지나, 늦가을에서 겨울을 넘어 봄이 되어서야 전파를 탈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사이 성교육 현장은 얼마나 더 심각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겠는가? 몹시 나쁜 윤석열....... 그랬던 그 날이 있은지 일 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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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벌어진 저 희대의 괴사건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맥주가 있으니, 그건 바로 캘리포니아 노스코스트 양조장에서 만들어내는 러시안 임페리얼 스타우트 '올드 라스푸틴'이다. 올드 라스푸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러시안 임페리얼 스타우트라는 맥주 장르와 '괴랄'한 인물 라스푸틴을 알 필요가 있다. 먼저 러시안 임페리얼 스타우트부터!
러시아의 근대화를 이끌었던, 반면 주변국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안겼던 표트르 1세, 예카테리나 2세 등의 러시아 전제군주들의 공통점은 모두 서방 순방을 통해 알게 된 영국산 에일을 사랑했다는 것이다. 전제군주가 더군다나 땅덩어리도, 힘도 점점 커지는 나라의 국왕이 맥주쯤 우습게 여겼을 것이 아닌가? 그들의 식탁에서는 언제나 영국 에일이 있어야 했고, 이를 위해 수송과 산패 등으로 인해 비싼 값을 마다하지 않고 연일 엄청난 양을 수입했다. 그러나 이 루트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싶었던 영국 에일 양조장에서는 깊은 고민이 있었으니, 당시에는 적지 않은 거리이며 험로 중 하나였던 영국에서 에스토니아 간 항해에 이른 육지 수송로, 거기에 여름엔 산패, 겨울엔 추위에 버티지 못하는 등의 문제가 있었던 거다.
이 같은 어려움을 두고 고심하던 끝에 영국의 양조사들은 얼어 터지는 것을 막기 위해 맥아를 쏟아부어 엄청 파워풀한 도수의 스타우트를 이끌어내고, 부패 방지를 위해 홉을 다량 투하한 맥주를 빚어냈다. 이 새로운 형태의 맥주는 당시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맛과 풍미를 선사했고, 곧 러시아 황실은 물론, 귀족들의 사교 문화, 더 나아가 러시아 일대의 맥주 문화 전반을 바꾸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이 신기방기한 맥주는 러시아의 황실에 판매하기 위해 만들어진 스타우트였기에 러시안 임페리얼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이 장르의 맥주는 고도수이기에 더운 날 야외에서 마셨다가는 바로 옆에 있던 사람도 못 알아보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반면 옷깃을 여미는 날, 더욱이 내란으로 분개하고 거리로, 남태령으로, 국회 앞으로 나섰던 이들이 돌아가며 그 추위와 분기를 달래주기에는 더없이 좋은 아이템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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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맥주의 이름에 등장하는 인물 '라스푸틴'은 누구인가? 풀네임 '그리고리 예피모비치 라스푸틴(Grigori Yefimovich Rasputin, 1869~1916)'은 그리고리라는 이름에서 눈치 챌 수 있듯 수도사였다. 게다가 제정 러시아가 앞서 언급했던 전성기를 지나 곤두박질치고 있었던 니콜라이 2세 치하의 황실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이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매우 비범했고, 방랑 성자(Starets)로 전국을 떠돌며 가난한 이들을 옹호하며, 치유의식을 행함으로 민중의 강력한 지지를 이끌어냈다. 후삼국 시기 궁예와 비슷하달까? 아무튼 그렇게 명성을 얻게 된 라스푸틴은 병약했던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의 상태를 호전시키면서 일약 황실의 전폭적 지지를 받는 스타로 성장한다.
신기한 수도승 라스푸틴의 인생이 급변하는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부터이다.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전선으로 나간 사이, 국정을 담당하는 황후로부터 절대적 신임을 받았던 라스푸틴은 상담과 자문 정도를 넘어 매관매직에 의한 장관 임명뿐 아니라 외교 정책에까지 관여하는 등 실로 심각한 국정농단을 자행하기에 이른다. 결국 그의 권력 남용과 부적절한 행실은 러시아 황실 자체의 붕괴와 민중 생존권의 파탄을 가속화하기에 이르렀고, 종국에는 제 정 러시아가 몰락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어떤가? 종교적 자문을 통해 국가 핵심 권력의 배후가 되고, 전횡을 통해 국가를 파탄의 지경에 이르게 하는 행위....... 어쩐지 무속, 신천지, 통일교 등 여러 종교 권력과 습합하며 국정을 농단했던 지난 정권이 연상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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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 1주년, 그러나 아직 주범들은 당당하고, 재판부는 그 앞에서 눈치를 보며, 수많은 부역자들이 여전히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는 지금, 내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목도하게 된다. 그뿐인가? 그 시기 높은 곳으로 오른 세종호텔 노조의 고진수 지부장은 다시 몹시도 차가운 겨울을 그곳에서 맞이하고 있고, 수많은 삶의 자리에서 불평등과 혐오는 여전히 차갑고도 무섭게 휘몰아친다.
이러한 때, 부디 주눅 들거나 냉소적인 마음에 빠지지 마시길, 우리 몸을 기분 좋게 데워주는 러시안 임페이얼 스타우트 한 잔 나누며, 이 겨울, 그같은 온기가 필요한 삶의 자리로, 역사의 한 자락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면 한다. 바로 그 같은 움직임이 일 년 전 이 땅을 몹시도 춥게 했던 내란을 진정으로 종식시키는 힘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