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정한 세상을 바란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 돈을 많이 벌고 싶다. 그런데 이 경쟁사회에서 여자애들이 상위권을 대부분 차지한다. 게다가 여자들은 군대도 안 간다. 좋은 자리는 여자들이 차지하며, 돈을 못 버는 남자들은 무시당한다. 심지어 잠재적 성범죄자 취급을 받는다. 억울하다."
『민들레』 154호 「남자아이들이 위험하다」에 실린, 35년간 남자중학교에서 근무한 안정선 교사가 전한 소년들의 목소리다. 그런데 이런 남성들의 호소는 특정 세대의 문제일까? 어쩌면 단순한 불만이 아니라,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린 불안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비슷한 현상은 미국에서도 나타난다. 『소년과 남자들에 대하여』의 저자 리처드 리브스는 "성평등이 여성의 삶은 바꾸었지만, 남성의 삶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라고 지적한다. 그는 젠더 문제를 논의할 때 경제적 불평등을 함께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리브스는 미국 사회의 남성 문제를 인종과 계급의 관점에서 분석하며, 2019년 이후 여성의 학사 학위 취득 비율이 남성보다 15% 높고, 생산 자동화로 인해 남성 중심의 제조업 일자리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고 말한다. 즉, 남성들은 더 이상 경제력을 갖춘 여성에게 '필요한 존재'로 여겨지지 않으며, 전통적인 남성성을 유지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새로운 남성성의 모델은 아직 부재하다. 그 사이에서 많은 남성들이 혼란과 방향 상실감을 겪고 있다.
한국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교육부의 「2024년 학업성취도 평가」에 따르면 여학생은 국어에서 남학생보다 15.1%, 영어에서 9.8% 높은 성취를 보였고, 수학은 큰 차이가 없었다.
또한 성평등가족부의 「2025 통계로 보는 남녀의 삶」에 따르면 상용근로자 비율은 남성 58.9%, 여성 55.1%로 거의 비슷하며, 15년 전 대비 남성은 6.3%P, 여성은 12.0%P 증가했다. 반면,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30대 남성의 1인 가구 비율은 여성보다 9.3%P 높다. 이처럼 경쟁사회에서 남성은 여성에게 위협을 느끼고 있다. 학교에서는 성적에서 뒤처지고, 사회에 나와 노동시장에서는 여성들이 바짝 뒤쫓아 오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생활관계망에서는 남성은 소외되고 있다. 구조는 이미 변했다. 여성이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돌봄과 가족의 형태가 다양해졌음에도 남성은 "남자가 돈을 벌어야지", "아내보다 적게 벌면 자존심 상하지 않냐?"와 같은 압박에 시달린다.
성평등 담론은 오랫동안 여성의 권리 신장에 초점을 맞춰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남성들이 겪는 혼란과 부담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들의 불안은 때로 '역차별'이라는 언어로 표현되지만, 실제로는 성과 중심 경쟁사회가 만들어낸 구조적 불안에 더 가깝다. 이 '억울함'은 다른 의미에서 사회가 요구해온 전통적 역할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야 하는 시대적 징후로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위기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 나는 그 답을 '돌봄'에서 찾고 싶다. 돌봄은 오랫동안 여성의 몫으로 여겨져 왔지만, 이제는 사회 전체가 함께 감당해야 할 공적 가치다. 최근 남성들이 돌봄의 영역으로 진입하고 있다. 2025년 간호사 국가시험에서 남성 합격자는 4,292명으로 전체의 18.1%를 차지했고, 전체 간호사 면허자 중 남성 비율은 7%를 넘어섰다. 또한 항공사 에어부산은 남자 승무원만으로 비행을 운영하며 성별 고정관념을 깨는 실험을 진행했다.
'돌봄'은 직업의 영역을 넘어 삶의 태도로 확장되어야 한다. 남성들이 일상에서 돌봄을 실천할 때, 경쟁 중심 사회의 피로를 줄이고 관계 중심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지금의 경쟁 체계를 그대로 둔다면, 남성은 여성을 '적'으로 여기며 도태될 때마다 억울함을 느낄 것이다. 반면 돌봄이 사회의 핵심 가치로 자리 잡는다면, 위계와 격차는 완화될 것이다.
이를 위한 정책적 전환도 필요하다.
첫째, 노동시간 단축은 필수다. 돌봄을 사회 전체의 책임으로 확장하려면 개인에게 시간을 돌려줘야 한다.
둘째, 기본소득은 단순한 복지가 아니라 돌봄 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재정적 기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셋째, 사회복무제 확대도 검토할 만하다. 모든 청년이 일정 기간 돌봄 노동에 참여한다면, 이는 손익을 따지는 '공평'의 논리를 넘어 공존의 새로운 형태가 될 수 있다.
성평등은 여성에게만 기회를 넓히는 일이 아니다. 남성에게도 '맨박스'(남성다움의 틀)에서 벗어나 가부장적 부담 없이 살아갈 권리를 되돌려주는 일이다. 성평등은 대립의 언어가 아니라, 회복과 관계의 언어다. 남성 역시 변화의 주체로 서야 한다. 불안과 상처, 오래된 역할의 압박을 함께 바라볼 때 우리는 서로의 현실을 이해하게 된다. 그때 비로소 성평등은 경쟁이 아니라 공존의 이름으로 새롭게 시작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