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맥주 인문학 투어는 내가 바라는 여행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 같다. 예술 투어나 그냥 인문학 투어라면 나는 좀 고민을 하다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내 입맛에 딱 맞는 주제로 여행이 계획되었나! 이건 운명이다.
몇 년 전부터 나의 카카오톡 상태 메시지 창엔 '오티움'을 고정해놨다. '꽃이 피면 님과 꽃놀이하고 비가 오면 벗과 술을 마시리'라는 단순한 속내를 포장한 말이다. 다정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즐거운 자리에서 술은 잘 마시지 못해도 흥에는 한껏 취하는 것이 나의 행복이고, 그즈음의 술은 와인과 막걸리와 매실주와 위스키였다. 싱거운 맥주는 두 모금 이상 마시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2024년 5월이었다. 그 봄의 어느 밤, 사회적협동조합 길목에서 진행했던 '트라피스트 수도원 맥주 강의'를 접하고 여러 종의 수도원 맥주를 시음하면서, 맥주에도 다채로운 맛과 역사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날카로운 첫 키스처럼 톡 쏘는 맥주를 천천히 음미하면서 강의 자료 속 사진에서 맥주와 함께 해맑고도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는 고상균 목사님을 엄청 부러워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목사님을 따라 해외 맥주 탐방을 가고 싶다는 기약 없는 꿈을 꾸었더랬다.
그런데 그 기회가 이리 빨리 올 줄이야! 역시 꿈은 꾸고 볼 일이다. 올해 2월, 건강상 이유로 생각보다 몇 년 일찍 퇴직했고 맥주 인문학 유럽투어(앞으로 맥투라고 지칭)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신청을 할 수 있었다. 여행 전에 독일과 맥주에 관해 샅샅이 공부하리란 다짐을 했건만, 하루하루 열심히 놀러 다니다 그만 자전거 사고로 왼쪽 팔꿈치 뼈가 박살이 나는 바람에 공부는커녕 하마터면 여행도 못 갈 뻔했지만, 다행히 순조롭게 재활하여 행복한 여정에 동참할 수 있었으니, 이 또한 운명이다!
7박 9일의 여정이라고 하면 사실 유럽까지 가는 여행치고는 긴 편이 아니다. 10시간이 넘는 비행시간을 견디고 도착한 만큼 여행지에 오래 머물면서 가능한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시간을 갖고자 하는 욕심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번 맥투는 절대로 짧은 시간이라 느낄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많은 내용과 체험이 집약적이고도 풍성하게 들어있었다. 베를린, 라이프치히, 뉘른베르크, 뮌헨 그리고 잘츠부르크의 주요 관광지와 기념물, 비어가르텐과 수도원 양조장 등의 다양한 형태의 맥주펍을 들렀으며 그곳에서 기억할 역사와 더불어 우리가 지금 생각해볼 이야기를 마음에 닿도록 생생하고 확실하게 전달받았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추모비와 학살된 유대인, 집시, 성소수자를 위한 기념물, 뉘른베르크 나치 전당대회장과 전범재판 기념관, 호엔잘츠부르크성에 얽힌 비극적인 역사는 내가 이 맥투를 하지 않았더라면 모르고 지나쳤을 일이다. 베를린 도착한 여정 첫날부터 이루어진 이러한 행보는 다른 여행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의미 있고 마음에 기억이 깊이 남는 맥투만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캄캄한 밤의 숲속을 걸어 룩셈부르크의 추모비를 찾아갔던 일과 2,711개의 콘크리트 비석으로 이루어진 미로같은 기념물 사이를 숙연한 마음으로 천천히 걸었던 일도 인상 깊다.
도토리와 마로니에 열매가 뚝뚝 떨어지는 비어가르텐의 나무 밑에서 음악을 들으며 술잔을 기울였고, 라이프치히의 바이어리셔 반 호프의 고젠 맥주의 풍성한 맛에 감탄했으며, 뉘른베르크의 밤도 복비어로 인해 더욱 유쾌했다. 옥토버페스트의 전통 의상인 '디른들'을 입고 그 유명한 하커-프쇼르 텐트에서 1리터짜리 거대한 맥주잔을 두 손으로 겨우 들고 마신 것도 재밌었으며, 신나게 연주되는 음악에 스카프를 휘날리던 일행 중 큰언니의 모습에 외국인들과 함께 연호하며 축배를 들던 기억도 축제 퍼레이드를 지켜본 일도 너무나 즐거운 기억이다.
단순히 지식의 허영심만을 채우는 인문학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있는 자리를 돌아보고 다양성에 관해 생각을 가다듬으면서 아울러 맥주의 환상적인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던 이 여행이 가능했던 것은 스태프분들의 많은 준비와 노력 덕분이다. 우선 이 여정을 계획하고 리드하신 고 목사님의 역사와 맥주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이해, 그것을 풀어내는 유려하고도 설득력 넘치는 화술, 여행 경험에서 나오는 유능한 인솔력과 배려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한 목사님의 강인한 체력과 의지가 없었더라면 이 여행은 불가능했다. 강민정 매니저는 그 능력만큼 성격도 매우 매우 좋아서 많은 인원을 인솔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이국의 도시를 이동하면서도 짜증 한 번을 안 내고 늘 경쾌한 텐션으로 활기찬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여행 중 일어나는 각종 돌발 사태에도 당황하지 않고 노련하게 일을 처리하는 유능함을 보여주었다.
또한 맥투 구성원들은 연령대와 종교가 다양하고 (서로 아는 면면도 있었지만) 처음 보는 인물들도 많았음에도 하나같이 맥투에 관심을 갖고 서로에게 호의적이고도 유쾌한 태도를 갖고 있어 여행 내내 어울리는데 즐거웠고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리운 얼굴들이 떠오른다. 환상적이었던 날씨와 인솔하는 스텝과 참여하는 동행자들이 모두 함께 조화를 이루었기에 맥투라는 환상적인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건 단순히 참여한 나의 의견이니 스태프분들이 여행을 인솔하는 어려움에 밤마다 얼마나 골치를 앓았을지는 사실 알 수가 없는 노릇이긴 하다.)
하여튼 나는 이번 가을에 너무나 즐겁고 유쾌하고 알차고 가성비와 '가심비'가 어마어마하게 훌륭한 맥투를 즐겼다고 자랑하고 다닌다. 이젠 나도 맥주잔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웃을 수 있는 내공이 생겼으니 말이다. 이 여행을 주최한 사회적협동조합 길목과 문화를 생각하는 사람들께 감사하며 다음 맥투를 진심으로 고대한다.

오티움과 일기일회를 좌우명으로 건강 회복에 힘쓰고 있는 백수
여행 계획과 사진 찍기가 취미
 
               띵동 강의에 참가하고
							띵동 강의에 참가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