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곤96

케.데.헌의 조상, 만신 김금화 선생...

케.데.헌의 조상, 만신 김금화 선생을 추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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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의 열풍이 2025년 여름 지구촌을 휘몰아치고 있다. 태풍의 계절에 등장한 이 폭풍은 대한민국의 새로운 리더 탄생을 축하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흐뭇하다. 이번 케데헌의 신드롬은 10여 년 전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던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 왕국"과 비교할 수 있는데, 한국의 문화가 듬뿍 담긴 덕에 사뭇 그 정서가 다르게 다가온다.

 

2013년은 내 아이들도 꼬꼬마였던 시기다. 또래 유치원생들이 귀여운 목소리로 "레리꼬~ 레리꼬~"를 따라부르고, 여자아이들은 파란 드레스를 입고, 마치 자신이 엘사 공주가 된 양 판타지를 즐기는 모습을 전국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케데헌에 열광하는 모습은 국내가 아니라 해외에서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그들이 "영어니 개질 수 엄는~"이라 즐기며 노래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입장이 된 것이다. 알려진 바대로 이 애니메이션은 우리나라에서 제작한 콘텐츠가 아니다. 일본 영화사 소니픽쳐스에서 제작했고, 글로벌 배급사인 미국의 넷플릭스가 투자 배급의 주인공이다. (디즈니와 멀티플렉스 극장들은 울고 있다고 한다) 영화 소재가 K-Pop과 한국 전통의 무속 신앙이고, 주요 사건이 벌어지는 곳이 뉴욕이나, 도쿄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다. 케데헌 탄생의 주역인 한국계 캐나다인 메기 강;Maggie Kang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케데헌의 시작은 7년여 전에 구상했던 "동양인 여성 주술사가 악귀와 맞서 싸우는 이야기"였다고 한다. 그 아시아의 여성 주술사를 감독 자신의 백그라운드가 되는 코리아의 문화에서 찾았고, 그래서 무당이라는 인물로 주인공의 배경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몇 년 후에 BTS와 블랙핑크로 대표되는 K-Pop에 열광하는 글로벌 팬덤이 점점 커지는 것을 보고, K-Pop을 데몬 헌터스와 접목해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굿타령으로 세상의 악령을 잠재우는 무당이 케이팝 걸그룹으로 계승된다는 영화적 설정이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무당과 케이팝이라는 우리의 문화를 알리게 된 것이고 이 글로벌 신드롬을 즐기게 된 것이다. 굿 보고 떡 먹는 격이랄까?

 

굿 이야기가 나왔으니 큰 무당 김금화 선생과의 인연을 소개해보겠다. 오해하실까 봐 미리 말씀드리지만, 개인적인 인연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분의 굿을 직접 보게 되었고, 무속에 관심이 생긴 인연을 말하려는 것이다. 지척에서 선생의 영험을 목도했을 뿐 개인적인 친분은 없다.

 

나라 만신이라 불렸던 김금화 선생을 알게 된 것은 내가 대학 2학년으로 복학했던 1993년 경이다. 그 시절 내 모든 사랑의 감정을 가져가 버린 한 여학생이 있었다. 그녀를 생각하며 울고 웃었던 시절이 이야기다. 이 모든 운명은 여성학개론의 첫 수업 시간에 시작되었다. 그 시절 모교를 대표하는 교양 과목이었던 "여성학개론"은 아직은 낯설었던 페미니즘을 살짝 소개했고, 주로는 남녀 서로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성(차별, 인식, 역할)에 대한 토론을 끌어내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전교생에게는 비공식 단체 미팅 기회로 알려지면서(남녀가 비슷한 비율로 조를 이루고 토론해야 했기에) 수백 명의 수강 신청자들을 소화하기 위해서 서로 다른 두, 세 명의 강사가 동시에 클래스를 개설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히 남초 학과(공대, 경영대) 남학생들에게는 졸업 전 들어야 할 필수 과목이었다. 경영학과였던 나도 같은 동아리 전자공학과 친구들을 꼬드겨 강의를 수강했다. 대망의 첫 시간 그녀는 강렬한 모습으로 나를 홀렸다. 아직 미성년자인 신입생은 수강할 수 없다는 강사의 선언에도 본인은 재수생이기에 이미 성인이고 수강 자격에 문제가 없다고 어필하며 결국 수강 허락을 받아낸 그녀의 당돌한 모습에 반해버렸다. 물론 아주 예뻤다. 나는 가장 헌칠하고 말빨 좋은 친구를 동원해서 여차저차 그녀 일행과 같은 조를 이루는 데 성공했고, 조별 과제를 진행하며 자연스럽게 친밀감을 형성할 수 있었다. 신입생에게 작업 거는 복학생이라니…. 나의 일방적인 짝사랑이었지만 어떻게든 그녀와 시간을 더 보내고 싶었던 감정에서 다음 학기에 나는 그녀의 전공 선택 수업에 수강 신청을 했다. 수강 제목이 기억나지 않지만 "한국 토속 신앙"에 관한 사학과 전공 선택 수업이었다. 주된 주제는 "굿"이었기 때문에 현장 관람도 필수 과제였다. 여성학개론의 조별 과제를 통해서 이미 친밀해진 그녀와 자연스럽게 굿판 동행 취재를 계획했다. 그 굿판이 그 시절 가장 대중적으로 접하기 쉬웠던 김금화 선생의 "대동굿"이었다. 이미 무형문화재로 선정된 김 선생님의 대동굿은 개인이나 특정 공동체의 안위를 기원하는 굿이 아니었기에 하나의 전통 예술 공연을 관람하는 느낌이었다. 물론 작두도 타고 통돼지를 삼지창에 꽂아 세우는 무속 특유의 살벌한 퍼포먼스도 빠지지 않았기에 일반 국악 공연 또는 마당극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험함이 존재했다.

 

만신께서는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 문화사절단의 초청으로 미국의 주요 박물관과 뉴욕 한국문화원에서 3개월 동안 순회공연을 하며 세계인들에게 전통 예술, 종합 예술로의 굿을 알리셨다. 이것을 계기로 유럽까지 진출하게 되었고, 로마 대학에서 교황님을 위한 진혼굿을 올리며 교황청의 찬사도 얻게 되었다고 한다. 88올림픽의 성공을 이어가려는 정부의 적극적인 글로벌 홍보 정책과 자주적인 민족 문화를 장려하는 문민정부의 탄생이 전통문화 발전에 큰 힘이 되었다. 도올 김용옥 교수는 한민족 정신 사상이 집약된 동학을 공중파를 통해서 설파하고 있었고, 김금화 선생은 전국을 돌며 대동굿으로 한민족의 부흥을 축원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대형 실내 공연장에서 일반 대중을 모아놓고 굿판을 펼치는 일이 가능했던 것은 하해와 같이 품이 넓은 김금화 선생님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겠다. 말 그대로 만신萬神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어른이셨다. 경제적으로도 90년대는 풍요의 시대였고(1997년 IMF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 서태지와 아이들의 파격과 김금화의 전통 굿거리까지 모든 것을 포용할 줄 아는 시대였다. 그래서 우리 "평화고리"도 그때 시작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한 마디로 문화적 다양성을 포용할 줄 아는 시기였다. 곳간에서 인심 나는 시대였다고 할까? 풍요의 시대는 IMF 사태로 막을 내렸지만, 아이러니랄까 대중문화는 점차 성장하고 있었다. 2002년 월드컵 성공 덕분이었을까? 한국인들은 꿈은 이루어진다를 되뇌며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하고 있었다. 영화와 K-Pop은 아시아 시장으로 뻗어나가며 성장하고 있었지만 나이가 들어 쇠퇴하는 만신의 존재감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인생의 전반과 중반까지 무당년이라 천시받으셨던 만신 김금화 선생은 노년에 주요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무당의 본업은 모든 사람이 한 식구가 되도록 쓸어가며 보듬어 안고, 보듬어 울고, 걱정해 한 마음 한뜻으로 모으는 것"이라고 하셨다. "혹세무민하며 제 욕심 채우는 선무당들 때문에 나까지 덤으로 오해도 많이 받고…."라며 상업화에 치중하는 후배 무속인들의 세태를 안타까워하셨다.

 

흔히 무당은 점을 통해서 앞날을 예측하고, 굿을 통해서 액을 막고, 한을 풀어내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중들은 이러한 영험함을 기대하고 그것을 위해 크고 작은 정성을 바치며 위안으로 삼는다. 대중의 기대와 욕심이 커지면, 무당은 어떻게든 그에 맞춰보려고 노력한다. 영험함의 결실은 장담할 수 없지만, 기대와 욕심은 부풀어 간다.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고, 국모가 된 양 착각에 빠졌다. 과연 그들의 허울이 좋은 영험함 속에서 나락 가는 것을 경계한 인물이 있었을까?

 

김금화 선생께서 케데헌의 글로벌 열풍을 목도하셨다면, 혼문을 지키는 헌트릭스의 조상으로써 흥겨운 원조 대동굿판을 다시 한번 선보이셨을 터인데…. 안타깝게도 이제 나라 만신의 자리는 공석이 되었고, 선무당들만 득실거리는 세상이 되었다. 시퍼런 작두날 위에 서서 대한민국의 발전과 백성의 평안을 축원하시던 김금화 선생의 모습이 그리울 따름이다. 그녀도 선생님을 기억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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