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6: 그래도 신앙의 사회적 존재가치가 있다면
리투아니아 사울레이의 십자가 언덕과 볼파스 엔젤맨
1
오래전, 친구 세 명과 대만 여행을 갔던 적이 있다. 우리 중 대만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가장 많은 친구가 준비 단계부터 일관되게 대만 동부의 항구도시 화련에 갈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들어봐. 대만의 바다는 우리나라처럼 육지에 둘러싸인 게 아냐. 그냥 태평양이라고! 거긴 한국의 바닷가에서 느낄 수 없는 광활한 대자연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다고!
사실 생각해 보면 한국의 바다는 태평양이 아니고 뭐 어디 지중해에라도 붙어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 찰진 설명 앞에서 누가 감히 토를 달 수 있었겠는가? 우린 마치 가보기라도 한 사람들처럼 그의 말에 동조하며 두말없이 따랐다.
문제는 날씨였다. 늦은 태풍이 기승을 부렸던 그해 가을, 여행에 들뜬 우린 누구 하나 일기예보 따위에 신경을 쓰지 않았고, 점점 강해지는 바람과 거세지는 빗줄기에도 '그냥 태평양'을 볼 생각에 마냥 즐거워하며 바닷가로 달려갔다. 친구의 말은 사실이었다. 가만히 서 있기조차 힘들 정도로 몰아치는 비바람과 3미터는 훌쩍 넘어 보임 직한 파도 앞에서 그토록 강조하던 대자연의 위대함을 몸서리치도록 무섭게 느꼈으니 말이다.
그때가 지금까지의 삶을 통해 자연 앞에서 사람이 얼마나 작고 무력한가에 대해 가장 분명하게 직면한 순간이었던 것 같다. 옆 사람의 빨리 차로 가자는 외침이 하나도 들리지 않을 만큼 거대한 바람 소리와 그보다 더 크게 느껴졌던 파도를 코앞에서 바라보며, 두려움이라는 말로 담을 수 없는 느낌에 사로잡혔더랬다. 그건 분명 종교적 경외심 같은 것이었다.
2
문화인류학이나 종교학의 엄정한 연구 결과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인류에게 종교나 신앙과 같은 영역의 출발은 아마도 앞서 언급했던 것과 비슷한 삶의 자리에서 출발했지 싶다. 항거불능의 자연현상이나 압도적인 경관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게 되는 느낌 말이다. 그리 시작했던 것에 차츰 많은 경우 교단, 교리, 예식과 같은 외형적 틀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경외감은 보이는 권력에 대한 두려움으로 변질하여 갔을 것임은 또한 어렵지 않게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의 은혜는 멀고, 인간의 권력은 가까운 법이니 말이다.
한국의 개신교는 이 같은 과정을 매우 부정적이고 압축적으로 지났다고 하겠다. 국가와 전통 가치의 붕괴, 강력한 외세의 침입 앞에서 완전히 무너져 내린 민중의 삶 앞에 나타난 기독교....... 그건 온 생명을 위해 대신 죽음을 당했다는 예수의 감동적인 이야기뿐 아니라,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현란했던 물질문명의 주인공이자 전 세계의 지배자였던 백인의 종교였다는 점에서 당시의 조선인들에게 항거불능의 경외감을 안기기에 충분했다. 교회를 따라 유입된 다양한 종류의 근대적 기술과 학문, 원조물자, 그리고 평소 눈도 마주치지 못했던 지배자들을 우습게 만들어버리는 그들의 위세 역시 그들과 그들의 세상을 가히 신국(神國)으로 인식케 했을 것이다.
해방 이후, 이 같은 개신교의 위세는 폭발적 교세 확장으로 이어졌고, 어느덧 권력과 부를 소유하게 된 한국 개신교 주류 세력은 수많은 교회와 그 위에 매달아 올린 십자가를 교인과 대중들에게 들이밀며 '예수 천당 불신 지옥'과 같은 구호로 상징되는 '두려움 마케팅'을 이어갔다. 뭔가 남들보다 빨라야 직성이 풀리는 분들이 많은 이 나라 대한민국은 서구에서 2천 년이 걸렸던 교회의 권력화, 권위주의, 변질과 쇠퇴를 불과 백 년 정도 만에 이룩한 것이다. '다이내믹 코리아 처치' 만세다....... 대한민국의 이 같은 상황에서 개신교 신앙은 과연 존재의 이유가 있는 것일까?
3
발트 3국이 품고 있는 위대한 맥주 볼파스엔젤맨을 찾아 카우나스로 가는 여정 중 사울레이의 십자가 언덕을 찾았다. 그곳은 극단적인 동서 대립이 격화되던 시절, 소련의 KGB에 의해 납치 후 살해당한 이들을 하나, 둘 묻기 시작하면서 형성된 추모영역이다. 소련의 감시와 탄압이 점점 더 심해짐에 따라 그 언덕의 십자가도 끝없이 늘어갔고, 어느덧 사울레이 언덕은 권의주의적 통제에 대한 투쟁과 해방의 상징이 되어 많은 사람의 순례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이 같은 모습이 당시 소련의 입장에선 무척이나 껄끄러웠을 것임은 자명한 일! 어느 날 밤, 사울레이 언덕의 십자가는 불도저를 앞세우고 들이닥친 KGB에 의해 모두 뽑혀 나가기에 이른다. 자유와 해방을 향한 리투아니아 시민들의 열망은 그날 밤, 부러져 나뒹구는 십자가들처럼 모두 쓰러져 버린 듯했다.
힘도 하나 없이 늘 눌리고 지기만 하는 것 같은 민중이 어느 순간 자리를 털고 일어나 역사의 한중간에 우뚝 서는 모습에 대해 민중 신학자 안병무는 '땅 밑에 있어 평소 잘 인식할 수 없지만, 때가 되었을 때 마침내 지표를 뚫고 올라오는 마그마'라 평했다던가? KGB가 다 끝났다고 안심하며 맥주 한 잔 거나하게 마시고 뻗었을 그날 새벽부터 매일 밤, 리투아니아인들은 몰래 십자가를 가지고 와 다시 세우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사울레이 언덕은 부수는 자와 다시 세우는 자가 벌이는 전쟁터가 되기 시작했다. 길고도 지루한 시간이 지난 뒤, 그 언덕의 승자는 놀랍게도 민중들이었다. 그들은 KGB가 백 개의 십자가를 뽑으면 이 백 개의 십자가를 세우는 투쟁을 전개했고, 투옥되면 다른 이들이 그 싸움을 이어가며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리투아니아가 꿈에 그리던 독립을 쟁취한 이후, 이 언덕은 독립투쟁을 기념하고 수많은 열사를 기리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이에 대해 199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직접 방문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이곳은 리투아니아인들의 사랑, 평화, 희망 그리고 희생을 기억하는 공간'임을 천명했다. 당대 전 세계를 양분했던 세력에 대항해 독립과 자유를 향한 투쟁을 전개했던 리투아니아인들에게 신앙은 눈앞의 어려움과 두려움 너머의 희망과 위로가 되어 주었다. 이제는 더 이상 일식이 일어나는 하늘을 보며 제사를 드리지 않는 세상에서 여전히 신앙의 존재적 가치가 있다면, 그건 위세와 권위를 내세우며 신자와 민을 지배하는 자세가 아니라, 민중의 삶 속, 가장 어렵고 힘든 자리에서 희망의 우물을 길어 올리고 이를 기꺼이 나누는 모습이 아닐까? 사울레이 언덕 너머, 조그만 예배당에는 십자가가 없다. 대신 통상 십자가가 걸려있는 정면에는 사울레이 언덕을 향해 통유리가 설치되어 있다. 그곳에 앉아 멀리 보이는 그 수많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나는 신앙의 사회적 존재가치에 대해 묵상하고, 또 기도했다.
4
리투아니아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와 함께 오랜 시간, 북유럽과 동유럽 강대국들의 각축장이었고, 동시에 해양과 대륙을 연결하는 가교였다. 이 과정에서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은 비극을 피해 갈 수 없었지만, 인근의 다른 국가는 가질 수 없었던, 예컨대 영국과 독일 등의 맥주 양조 기술의 전래같은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맥주에 대한 리투아니아의 높은 수준은 수많은 양조장이 다양한 장르의 맥주를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는데, 볼파스엔젤맨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세기 중엽에 문을 열었다. 원래는 카우나스 시 내에 별도로 운영하던 두 양조장, 볼파스와 엔젤맨이 볼파스의 엔젤맨 합병을 통해 이름을 합친 것이다. 그런데 이 양조장의 이름이 이후 격변했던 리투아니아의 근현대사와 그 운명을 함께 한다. 우선 1차 세계 대전 이후 리투아니아 간절히 염원했던 독립 국가 수립의 꿈을 항구 확보에 열을 올리던 러시아가 짓밟아버렸다. 이때 볼패스엔젤맨은 강제 국유화되었고, 이름도 러시아식으로 개명되기에 이른다. 이후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 의해 점령되면서 양조장의 이름은 다시 독일식으로 변경되었다가 전쟁 말기 재점령한 소련군에 의해 또다시 양조장의 간판은 교체되고 말았다. 이름뿐 아니라 양조장의 간판 맥주 역시 점령국이 요구하는 장르로 왔다 갔다 했던 적도 있었고, 심지어 정부의 명령에 따라 빵, 베이킹 효모 등의 생필품 생산 공장이 되어야 할 때도 있었다. 가히 비운의 양조장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애초의 이름, 볼파스엔젤맨을 다시 찾은 것은 리투아니아가 완전한 독립에 이른 후인 1991년이다.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볼파스엔젤맨은 다시 찾은 이름 아래에서 블랑, 헤페, IPA 등 다양한 장르를 생산하고 있으며, 라투아니아에서 가장 대중화된 맥주로 명성이 높다.
| 추신 |
우리나라 대형마트 등에서 만날 수 있는 볼파스엔젤맨의 캔은 500ml가 아니다. 이건 맥덕들에게 500은 너무 부족한 것이 아니겠냐는 양조장의 배려, 일종의 덤이다. 덤이 추가된 볼파스엔젤맨 캔은 568ml이다.
구매자에 대한 배려는 이뿐이 아니다. 캔 입구 부분은 고급스러운 포일로 감싸여 있는데, 이건 캔에 입을 대고 마시는 이를 위한 것이다. 포일을 벗기면 그 아래는 먼지가 적을 테니까 말이다.
유명한 양조장이 모두 그렇듯 볼파스엔젤맨 본사에 가면 매우 으리으리한 펍을 운영한다. 필자는 2024년 설레는 마음을 안고 찾아갔었으나, 아쉽게도 회사 사정으로 문을 닫았던지라 눈물을 삼키고 돌아섰더랬다. 언제고 꼭 가볼 수 있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