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걸음 뒤의 세상 : '후퇴'에서 찾은 생존법
저자 우치다 타츠루 외 | 역자 박우현 | 이숲 | 2024.05.01
일본에게는 '과제선진국'이란 별명이 있다. 지금까지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다양한 문제들을 앞서 겪으면서 해결책을 선도적으로 마련해야 할 운명에 처한 나라를 뜻한다. 현재 일본은 급속한 인구 감소와 고령화, 지방 소멸, 막대한 재정 적자, 장기 디플레이션, 사회보장제도의 지속가능성, 핵발전소 사고 처리, 기후위기에 따른 재해 등등 나열하기 겁날 정도로 수많은 난제에 봉착해 있다. 한국도 10년 내외의 시차를 두고 마주할 문제들이다.
이에 대해 일본의 무도인이자 실천적 사상가 우치다 타츠루는 '후퇴학'을 제창한다. 그가 주장하는 '후퇴학'은 단순히 뒤로 물러서거나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신, 경제 성장과 인구 증가를 전제로 한 관성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쇠퇴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이에 맞춰 새로운 사회 시스템과 삶의 방식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무작정 성장을 추구하는 것은 더 큰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하며, 아름다운 후퇴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후퇴학'의 화두를 각계각층의 전문가들에게 던지고 얻은 답글들을 엮어서 낸 책 "한걸음 뒤의 세상 : '후퇴'에서 찾은 생존법"을 소개한다.
"일본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최고령 국가 단계에 진입할 것입니다. 따라서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노인뿐인 나라'라면 어떤 제도를 마련해야 사람들이 나름대로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 일본은 세계에 모델을 제시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일본이 후퇴 전략만큼은 피해를 최소화해 연착륙에 성공했다."라고 세계에 알리고 싶습니다." (11~12쪽)
뾰족한 문제의식에서 비롯한 장문의 질문덩어리를 던졌지만, 답글들은 필자마다 살아가는 현장과 고민의 수준에 따라 천차만별에 개성적이고 흥미로웠다.
후퇴학의 또 다른 주역인 홋타 신고로 교수(나라현립대학)는 그동안 시도되었던 수많은 성장 위주의 정책과 처방전들이 왜 효과가 없었는지 그 근본 메커니즘을 밝히고 현실을 정확히 진단해야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급격한 우상향을 보였던 인구 증가와 경제 성장이 '근대' 최대의 특징이라고 본다면, 놀랍게도 우리는 이미 근대에서 벗어났다. 그렇다면 근대는 '극복' 대상이 아니라 '벗어난' 것으로 되돌아봐야 할 대상이 아닐까?" (30쪽) 가속화하는 자본주의와 테크놀로지로 스테이지를 갱신하려는 흐름이 더이상 지속가능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쇠퇴에 맞춰 삶의 가치와 방식을 바꾸자는 것이다. 그는 젊은층(사토리 세대)을 중심으로 일본 사회에 감도는 '체념의 공기'가 어쩌면 근대 시스템을 벗어날 조짐이 아닐까 전망하고, 깊은 생활습관병을 앓고 있는 일본의 회복을 목표로 후퇴학을 전개한다.
경제사상가 사이토 고헤이 교수(도쿄대학)는 코로나19와 달리 엔데믹이 없는 인구감소와 기후위기가 초래할 '만성적인 긴급사태' 속에서 느긋한 후퇴나 연착륙은 불가능하다고 진단한다. 더 늦기 전에 자본주의 비상정지 버튼부터 눌러야 한다. 그렇다고 러시아 혁명 당시 볼셰비키의 '전시 공산주의'에 영감받은 '생태적 레닌주의'를 실행할 수 있을까? 국가의 힘에 의존하다가 민주주의가 훼손되고 전체주의의 참사를 불러올 수 있다. 그는 아래로부터 커먼(공공재)의 재생을 통해 국가 권력을 민중이 관리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이외에도 감염병 전문가, 도서관 큐레이터, 이슬람 법학자, 뮤지션, 극작가, 생명과학자, 영화감독, 빵집 사장, 역학자 등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인 전문가들이 생각하는 일본 사회의 문제에 대한 힘 있고 현실적인 진단과 본질적 문제 해결에 대한 제안들이 이어진다. 그 가운데,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더숲/2014년)"의 주인공인 와타나베 이타루, 와타나베 마리코 부부의 답글(149~176쪽)이 반갑다. 도시에서 시골로, 직장인에서 자영업으로, 근대식 분업에서 전근대식 가내 수공업으로, 순수 배양균에서 야생균으로, 종이 기저귀에서 면기저귀로 '후퇴'를 다양하게 실천해 왔고, 지금은 인구 소멸위기 지역에서 자연의 혜택을 누리며 천연균으로 발효한 빵과 맥주를 파는 부부의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전진보다는 후퇴의 과정에서 더욱 충만하고 즐거운 삶을 살 수 있음을 이들은 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마지막 답글은 우치다 타츠루의 오랜 친구인 히라카와 가쓰미의 "지극히 사적인 후퇴론"이다. 어려워진 사업을 정리하고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삶에 들어선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 가운데 빚(채권-채무관계)에 대한 고찰이 인상적이다. 빚이란 등가교환(청산)의 유예로 미래 어느 시점에 갚지 않는 한 채무자와 채권자는 지배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구가 늘고 경제가 활성화해 기업이 성장하는 단계(자본주의 발전단계)에서는 등가교환이 사회적 방식으로 위력을 발휘한다. 주식 투자든 빚의 청산이든 미래 어느 시점에 투자자/채권자/채무자 모두 유리한 조건으로 청산되리라는 믿음에 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경제가 정체돼 금리가 제로에 수렴하거나 마이너스 상태가 된다면 이 믿음은 무너지게 된다. 등가교환이라는 사고방식의 대척점에는 증여교환이 있다. 모든 빚을 한꺼번에 갚고 나서 그의 삶과 사고방식은 크게 변한다. 자유경쟁, 자기책임, 자기계발, 세계경쟁 같은 사고방식과 대척을 이루는 원리의 언어로 생각할 수 있다면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기 시작할 것이다.
"상상 이상으로 시원하고 쾌적했다. 빚이 사라진 일상이란 얼마나 정신적 부담이 없는 삶인지 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 회사를 접고 하루벌이 삶을 살아갈 걸 그랬다. 도대체 왜 나는, 그토록 힘들게 사업을 끌어갔을까. 왜 사업 후퇴에 거부감을 느꼈던 것일까. "(255쪽) "지금은 사업 후퇴가 단지 자신이 도전했던 세계에서의 패주가 아니란 걸 알고 있다. 다시 말해 하나의 도전에서 도주는 또 하나의 다른 도전을 뜻한다. 중요한 건 후퇴는 가느냐, 마느냐의 양자택일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양자택일을 자신에게 강요했던 기존의 세계관과 전혀 다른 세계관으로 패러다임 전환을 이루는 일을 의미한다."(256쪽) "문제는 경쟁 원리 그 자체를 대신할 수 있는 원리가 어떤 세계를 만들어 갈 것인지, 거기에는 어떤 희망과 함정이 기다리고 있는지,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이미지로 보여줄 수 있느냐이다." (258쪽)
'후퇴론'은 일본과 비슷한 문제에 직면한 한국 사회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세계 최저 출생률 추세가 이어진다면 머지않아 한국은 일본보다 더 빨리 쇠망할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을 어떻게 잘 성찰하여 행복과 낙관을 이야기하고 실천할 수 있을까? 길목협동조합은 지난 2024년 3월 월례강좌 주제로 "천만국가. 최후의 방어선..-대한민국 저출생 위기"를 다룬 바 있다. 강사로 모셨던 우석훈 박사님이 저술한 "천만국가"(레디앙/2024년)를 다음 기회에 소개할 것을 약속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