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바이
- 죽은 이에게 갖추는 예의
살아 있는 이에게 '죽음'이란 쉽게 언급하기 힘든 영역이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종착역은 분명히 죽음인데도 누구나 그곳에 다가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물론 자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타인의 죽음을 목격하는 것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지만 죽음은 결국 삶의 한 부분을 이루는 평범한 일상 중의 하나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영화가 있다. <굿, 바이>라는 이 영화, 애초에 가졌던 선입견과 달리, 결코 음울하거나 무서운 영화는 아니었다. 일본 영화 특유의 잔잔하고 소박한 감동과, 시침 뚝 떼고 능청맞게 웃겨주는 센스가 살아있는 영화였다.
주인공은 작은 악단의 첼리스트였으나 악단이 갑자기 해체되는 바람에 고향에 내려와 얼떨결에 시신을 염하는 염습사가 된다. 그런 그를 고향 친구는 외면하고 아내는 '더럽다'라며 떠나간다. 하지만 그는 사장 염습사가 시신을 염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그 일이 얼마나 숭고하고 고결한 일인지 깨닫고 자기 일로 받아들인다. 한편 주인공은 어려서 가족을 버리고 집을 나간 아버지에 대한 마음의 상처를 갖고 있는데….
이처럼 영화의 내러티브는 단 몇 줄로 요약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하다. 하지만 그 단순한 이야기 안에 풍부한 비유와 상징이 곳곳에 포진되어 있어 관객에게 숨은그림찾기의 매력을 선사한다.
인체를 닮은 악기 첼로를 연주하던 주인공은
이제 죽은 인체를 다룬다.
우선 염습사의 전직이 첼리스트라는 것이 눈여겨볼 대목이다. 첼로는 악기 중에서 인체의 외형을 가장 많이 닮았다. 그런 첼로를 어루만져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내는 첼리스트가 시신을 어루만져 아름답게 치장해 내는 염습사가 되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주인공이 정성을 다해 시신을 염하는 장면과 그가 첼로를 연주하는 장면이 교차 편집으로 전개되는 장면이다.
주인공이 움직이는 주요 공간이 시신을 염하는 장례식장과 목욕탕이라는 것도 재미있는 설정이다. 염이란 죽은 이의 몸을 씻는 일이지만, 목욕탕은 산 사람의 몸을 씻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신을 염하는 것은, 죽은 이를 정화하는 순결한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염(殮)은 죽은 이의 몸을 씻기는 일이지만
목욕은 산 사람의 몸을 씻는 일이다.
그 외에도 이 영화는 상징과 비유를 풍부하게 사용한다. 영화의 초반, 아내가 요리를 하기 위해 사 온 문어가 아직 살아서 꿈틀대자 바닷물에 놓아준다. 하지만 문어는 죽어 있다. 이것은 마치 주인공의 처지를 대변하는 것과 같다. 첼리스트로서의 한계를 느끼고 보장되지 않은 자신의 미래에 힘들어하는 주인공은 살아있으나 죽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는 자주 마치 관처럼 보이는 작은 구석방에 죽은 듯이 웅크려 앉아 있다.
사장을 따라 첫 염습을 하러 나갔다가 처음으로 시신을 마주하고(그것도 부패한!) 충격을 받은 주인공은 그날 밤 아내를 강제로 덮치다시피 해서 성관계를 갖는다. 흔히 삶의 본능인 에로스와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는 서로 극과 극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맞닿아 있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처음으로 죽음을 목격하고 그에게는 더욱 삶에 대한 집착이 살아난 것이다.
이 영화에는 두 염습사가 뭔가를 먹는 장면이 세 번 나온다. 곶감을 먹거나, 문어를 구워 먹거나, 치킨을 먹는다. 이때 이들이 먹는다는 행위는 모두 그들의 직업상의 행위와 연결된다. 먼저, 물기가 다 빠져 말라비틀어진 과일인 곶감은 마치 시신의 성질과 닮았다. 그들은 그 물기가 빠져 버린 시신을 염하는 일로 생계를 이어간다.
죽은 문어를 구워 먹으며 사장 염습사는 "이것도 시체다. 생물은 생물을 먹고 살 수밖에 없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들이 시신을 만지고 산다는 이유로 그들을 천하게 여기고 무시한다. 그런 이들에게 사장 염습사는 묻는 것이다. 사람의 시체와 동물의 사체가 다를 것이 무어냐고. 자신들은 그 일을 하며 살아갈 뿐이라고.
첫 염습을 나갔던 날, 생 닭고기를 보고 토하던 주인공은 염습 일에 익숙해지자, 치킨을 무척 맛있게 뜯어 먹는다. 그것은 삶에 대한 강한 집착으로 보인다. 먹고 사는 일의 엄숙함! 그러므로 이 영화는 죽음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사실은 삶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치킨을 맛있게 먹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삶에 대한 강한 집착이 보인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죽음은 지극히 일상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평소 어린 여학생들이 즐겨 신는 루즈 삭스를 신고 싶어 했다며 손녀가 할머니의 발에 루스 삭스를 신겨드리고 숨죽여 웃는 모습, 죽은 가장의 얼굴에 집안의 여자들이 빨간 루즈 자국을 남기고 깔깔 웃는 모습 등에서 우리는 죽음이 결코 두렵고 무서운 것이 아닌, 우리 옆에서 늘 전개되고 있는 일상의 한 부분임을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이 영화는 인간의 죽음 앞에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말하고 있다. 무생물인 돌멩이로도 마음을 전할 수 있다는 '돌 편지' 우화처럼, 이미 숨이 끊어져 무생물과 다름없는 인간의 죽음 앞에서도 산 사람을 대하듯 예의를 갖춰야 한다는 것을.
물론 영화에 흠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이 별 갈등 없이 염습사라는 직업을 받아들이는 것,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초반부에는 불분명하게 처리되었다가 후반부에 뜬금없이 격한 증오의 감정을 드러낸다는 점, 어린 시절 강가에서 아버지와 돌멩이를 주고받을 때부터 이미 그것이 부자간 화해의 매개체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는 것 정도. 하지만 그다지 큰 흠은 아니다.
그런데 영화의 제목이 왜 <굿바이>가 아니고 <굿, 바이>일까. 주인공이 하는 일이 죽은 자를 좋은(good) 모습으로 치장해서 보내주는(bye)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