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길에 펼쳐지는 풍경은 계절의 변화와 그에 조응하는 의식의 찰나적 깨달음을 선사한다.
내란의 6개월이 지나고 취임식 하는 날 금강변 갈대밭을 걷다 누런 옛 잎을 밀어 올리고 있는 초록의 새것이 눈에 띄었다.
지난해의 생을 마감한 옛 잎들이 여전히 반쯤을 차지하고 있고, 그 아래로 올해 태어난 푸른 잎들이 기지개를 켜듯 과거를 밀어 올리고 있다. 갈대는 과거를 '한번'에 정리하지 않는다. 그것은 제거하거나 버려지는 대상이 아니다. 갈대의 줄기줄기는 과거와 현재를 한 공간에서 공존시킨다. 아니 공존하며 변화하는 것이다.
변화와 개혁으로 과거를 일시에 단절하고자 하는 욕망이 일렁이는 계절이다. 오늘 걸으며 갈대의 과거는 제거가 아니라 병존일 수밖에 없음을 확인한다. 어제의 실패 위에서 다시 기능해야 하는 국가, 오작동하는 사법 시스템과 여전히 기득권적 의도를 가진 언론, 무기력한 행정 조직들과 함께 가야 하는 숙명이 놓여 있다.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 그리고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는 역사란 허구일 뿐이다. 성숙은 고통스러운 과거를 껴안고 그 위에 새로운 생명의 푸르름을 피워내는 것이다.
옛것을 보내고 새것을 맞이하는 갈대밭 뒤로 원수산이 보인다. 그 자락에 새로운 청와대 터가 이미 마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