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93

새 교황의 이름, 레오 1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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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주교였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추기경이 266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프란치스코라는 교황명을 선택했을 때 대부분의 가톨릭(천주교) 신자들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떠올렸다. 이를 통해 그는 가난함과 평화를 기본 가치로 살 것이라고 예감하게 했다.

 

그는 사람들이 기대했던 가치를 몸소 실현하는 방식의 삶을 선택했고, 그렇게 살았다. 난민들이 희생당한 현장으로 달려갔고, 행려자들을 바티칸으로 초대했다. 분쟁지역을 방문하고 정치지도자들이 대화하도록 초대했다. 세월호 침몰사고의 희생자 유족을 감싼 모습은 여전히 감동으로 남아있다.

 

그래서인지 그는 가톨릭 신자들에게서만이 아니라 여러 종교의 신자들, 심지어 신앙을 갖지 않은 이들로부터도 사랑받은 인물이었다.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이들에게 그는 어떤 기준을 줄 수 있는 어른이었다. 힘들어하는 이들이 마음을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내게도 당연히 교황 프란치스코는 위로를 주는 사람이었다. 2024년 12월 3일 밤. 계엄이 선포되고 이 친위쿠데타가 미수로 그친 뒤, 그 엄중한 사건을 일으킨 주범을 심판하는 과정 내내 우리 사회는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우리의 현실을 걱정하며 속히 우리 사회가 안정을 되찾기를 기도하면서도, 동시에 기도했던 것이 극도로 건강이 악화되어 입원 중이던 프란치스코의 건강 회복이었다. 그가 이생을 마감하면 내적인 혼란이 더 심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때문이었다. '우리를 감싸고 있는 짙은 안개가 걷히고 나면 그때 프란치스코를 보내드릴 수 있겠나이다.'라고 기도했다. 그만큼 나는 그를 편히 보낼 수 없었다.

 

2025년 4월 4일. 계엄을 선포한 내란수괴가 파면이라는 역사적 심판을 받았다. 그 사이 프란치스코는 건강을 회복했고 퇴원할 수 있었다. 이후 교회는 부활축제를 신학적인 기쁨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기쁨으로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우리는 12년 동안 자신에게 맡겨진 양 떼들은 물론 세상의 아픈 사연들을 대변하고자 했던 착한 목자 프란치스코를 영원의 영역으로 떠나보내야 했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신앙 차원에서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감을 의미한다. 그래서 기뻐야 하는데, 이번에는 이별을 대하는 인간적인 슬픔이 더 컸다. 위기처럼 느껴졌던 시간 동안 마지막까지 우리를 지켜준 그에게 마음 깊이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그리고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를 거쳐 새로운 교황이 탄생했다. 미국 시카고 출신이지만 페루 국적도 가지고 있다는 로버트 프랜시스 프레보스트 추기경. 그가 선택한 교황명은 레오 14세. 이 교황명을 듣자마자 많은 이들이 레오 13세를 떠올렸다. 그는 세상을 향해, 소외된 이들의 삶을 책임감 있게 받아들이라고 했던 인물이다.

 

역사적으로 256대 교황이었던 레오 13세는 1878년부터 25년간 가톨릭교회를 이끌었다. 그가 1891년 5월 15일 반포한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는 가톨릭 사회교리의 출발점으로 기록된다. 회칙(encyclic)은 사회적 의미로는 어떤 단체나 조직의 규정 혹은 규칙을 의미하지만, 종교적 의미로는 교황이 전 세계 가톨릭 신자에게 보내는 공식적인 서신이나 교리적 지침을 가리킨다. 회칙 「새로운 사태」는 '노동자들의 권리', '인간의 존엄성', 공동선에 바탕을 둔 '사유재산권', 노사문제 등을 주요 주제로 다루고 있다. 그래서 이 회칙을 「노동헌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배경에는 18세기 중반 시작된 산업혁명이 있었다. 산업혁명은 인류문명을 엄청나게 변화시켰으나 극심한 빈부격차와 부가 특정 계층에게만 몰리는 결과를 야기했다. 가난한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공장이 있는 도시로 몰려들었고, 도시의 물가와 집값이 크게 오르는 등 도시문제, 사회문제가 생겨났다. 대부분 노동자의 삶은 계속 빈곤하였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나이 구분 없이 생계를 위해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렸다. 노동자들의 인권은 중요하지 않았다.

 

레오 13세 교황은 「새로운 사태」를 통해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알리고 광범위하게 드러난 사회문제에 대해 답을 찾고자 했다.

 

"새로운 산업의 성장과 새로운 기술의 발전, 변화된 노사 관계, 극소수의 막대한 부유와 대다수의 빈곤, 노동자들의 자기 신뢰 증가와 상호 결속의 필요성, 그 밖에 윤리의 타락이 투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같은 사태는 사람들의 마음을 우울하고 불안하게 만들 정도로 극히 심각하여 각계각층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 문제 해결에 고심하게 하고 있다."(RN, 1항)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고 개선해 나갈 것인지에 대해 방향을 제시한 레오 13세의 시도는 그를 계승한 교황들에게도 지속적인 영감을 주었고 발전해왔다. 「새로운 사태」 반포 40주년을 맞은 1931년, 비오 11세 교황은 회칙 「사십주년」을 반포하였고, 요한 23세 교황은 회칙 「어머니요 스승」과 「지상의 평화」로 그 흐름을 이어갔다. 1991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회칙 「백주년」을 발표하여 「새로운 사태」 반포 백주년을 기념하였고 가톨릭 사회교리를 더 현대적으로 다듬었다.

 

2004년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는 「간추린 사회교리」를 발표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2009년 회칙 「진리 안의 사랑」을 반포했다. 이어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권고 「복음의 기쁨」과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통해 인권은 물론 위기에 처한 지구 환경에 대해서도 교회의 메시지를 제시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역대 교황들에 비해 진보적이었기에 새로 선출될 교황은 상대적으로 교회를 특유의 보수적 태도, 언뜻 보면 세상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새 교황이 레오 14세라는 이름을 선택하고, 그가 어디에서 사목을 해왔는지를 알게 된 후 교회는 계속해서 하느님 백성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걸어나갈 것임을 예감하게 되었다. 레오 14세가 즉위한 후, 그를 가장 먼저 공식 알현한 한국인이 이태원참사 유가족이었다는 뉴스를 접했다. 마음속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이들이 기댈 수 있는 어른을 성령께서 보내주셨다는 기분이 들었다. 프란치스코가 병상에 있을 때 나는 영화 "콘클라베"를 감상했는데, 실제의 콘클라베는 영화에서처럼 서로 간의 알력을 주고받으며 열린 것이 아니었다. 콘클라베에 참석한 추기경들은 성령을 청했고 하느님의 이끄심을 신뢰한 이들이었다.

 

「새로운 사태」가 백삼십여 년 전에 우려했던 인권문제, 빈부격차 등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여전히 교묘하게 남아있다. 교회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주체는 아니다. 하지만 교회가 이런 문제를 개선하라고 외치는 예언자의 직분을 수행하는 것은 사실상 의무라고 본다.

 

레오 14세가 즉위미사 강론에서 한 이 말은 매우 의미 있고 가슴을 뛰게 한다. "성령의 빛과 힘으로, 우리는 하느님 사랑 위에 세워진 교회, 일치의 표징인 교회, 선교하는 교회, 곧 세상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말씀을 선포하며, 역사 앞에서 "마음의 불안을 느끼고", 인류를 위한 화합의 누룩이 되는 그런 교회를 세웁시다."

 

새 교황이 언급한 "마음의 불안"은 우리 인간의 나약함을 고백한다. 우리는 확증편향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지 몸소 체험했기에 이 솔직한 고백이 중요하다. 그만큼 마음의 불안은 감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 신중하게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하느님의 뜻을 찾아 나서도록 이끄는 힘이 될 것이다.

박종인(예수회소속 천주교 사제).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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