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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사태와 중국의 쌍궤제 8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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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6월 4일의 비극과 중국 공산당의 방향 전환

중국에서 천안문 사태는 '6·4'라고 불린다. 1989년 6월 4일에 인민해방군의 폭력적인 시위진압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5·18'과 달리, 중국의 '6·4'는 금기어이다. 또한 5·18이 훗날 민주화의 동력이 됐던 것과 달리, 6·4는 아직 어떤 성과로 이어지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천안문 사태는 오늘날 중국의 체제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우리가 기대하듯, 민중의 역량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 반대로 중국 공산당이 그런 체제를 설계하도록 만들었다.

 

수백 명이 수도 베이징 한복판에서 학살당한 끔찍한 이 사건은 중국 공산당 지도부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정치적으로는 노동·학생운동과 자유주의 사상이 공산당의 붕괴를 초래했던 동구권과 같은 사태가 중국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긴장을 촉발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촘촘한 제도적 설계를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더 과감한 시장주의적 개혁을 도입해 인민의 불만을 무마시키도록 했다. 말하자면 정치적 자유는 소거하고, 경제적 자유는 확대하는 정반대의 정책을 동시에 구사했던 셈인데, 이것이 그 후 30여 년간 매우 성공적으로 작용했다.

 

쌍궤제 80년대 – 밀수, 금융사기, 부패

이번 칼럼에서는 천안문 사태를 불러일으킨 중국의 80년대를 묘사해 보고자 한다. 중국의 80년대는 쌍궤제 혼란기라고 부를 수 있다. 쌍궤제(雙軌制, 투 트랙)란 계획경제와 시장경제가 공존한다는 뜻이다. 중국은 1978년을 공식적인 개혁개방의 원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직후인 80년대는 개혁이 막 시작되어 과거에 없던 일이 벌어지던 혼란기였다. 쌍궤제 아래 계획경제와 시장경제의 공존은 회색지대를 낳는다. 재주가 있는 사람은 거기서 이득을 보고, 재주가 없는 사람은 거기서 소외된다. 그리고 둘 다 현재 체제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된다. 그 양상을 하나씩 살펴보자.

 

먼저 밀수가 공공연히 이뤄졌다. 1978년 말부터 자유화의 바람이 불자 그 훈풍을 먼저 맞았던 남부지역에서부터 밀수가 횡행했다. 전설적인 사례가 1984년 하이난(海南) 자동차 밀수 사건이다. 당시 막 특구로 지정된 하이난에서 수입규제가 완화된 틈을 타 자동차가 대거 수입된 것이다. 당시 극빈 도서(島嶼)였던 하이난은 재정이 매우 부족했는데 자동차 한 대를 전매하면 1만 위안 이상을 벌 수 있었다. 결국 관민을 막론하고 하이난 전체가 자동차 수입 광풍에 휩쓸려 한 해 동안 8만9천 대의 자동차가 수입됐다. 이는 1950~1979년까지 수입된 전체 자동차 수와 맞먹는 것이었다. 수입에 사용된 금액은 3억 달러였다. 84년 중국의 경상수지가 적자가 12억7천만 달러였다는 것을 생각하며 하이난 밀수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시 하이난의 당서기는 수입된 차가 모두 섬 안에서 팔렸다고 허위보고하여 경질됐고 조직적 밀수는 일단락된다. 이 과정에서 외화가치가 폭등했다. 당시 공식 환율이 1달러당 2.8위안이었는데 하이난에서는 6위안까지 치솟았다.

 

저장성(浙江省) 원저우(溫州)에서는 금융사기 사건이 나타났다. 먼저 상대적으로 건전한 사금융인 전장(錢庄)이 1984년 9월에 문을 열었지만, 당국의 압박으로 얼마 안 가 문을 닫고 말았다. 지하로 들어간 사금융은 일종의 계 조직이 되어 84년 전후 약 3억 위안 규모로 성장했다. 84년 중국의 경제 규모가 7,171억 위안이었으므로 일개 도시의 사금융치고 대단히 큰 규모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조직은 점점 다단계 금융사기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새 멤버가 오면 기존 멤버가 보상을 받는 피라미드형 폰지(ponzi) 사기였다. 87년까지 원저우 각지에서 약 30만 명이 이 금융조직에 연루됐고 총 규모는 12억 위안에 이르렀다. 결국 이와 관련된 강력사건이 벌어지고 자살과 야반도주가 잇따랐다. 마침내 주동자는 사형에 처해지고 당국은 저장성 일대의 민간 금융 조직을 모두 농촌신용사에 합병시켰다. 이 사건으로 원저우 전역에서 약 8만 가구가 파산했다고 한다.

 

국유기업 관리자들의 부패 행위는 국가의 재정을 위태롭게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여전히 국유기업이 국가의 보호를 받는 상태에서 기업 자주권만 확대되자 발생한 부작용이었다. 기업의 관리자들은 국가에 납부할 금액을 줄이기 위해 원가를 조작하고, 상여금을 남발하는가 하면 심지어 공공 물자를 빼돌리기까지 했다. 오늘날 세계적인 냉장고 제조업체로 성장한 하이얼은 원래 칭다오(靑島)의 한 국유기업이었다. 84년 당시 하이얼의 모습은 아래와 같은 기록으로 남아있다.

 

당시에는 상부에서 '반드시 성과를 내라'는 요구가 내려오면 며칠 지나지 않아 성과에 대한 통계를 내기 시작했고, 심지어 홍보대를 조직해 작업장에서 성과를 홍보하기도 했다...... (직원들은) 출근은 8시에 했으나 9시가 되면 공장을 떠나기 시작해 10시가 되면 공장에 수류탄을 던져도 죽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재앙적 물가폭등과 긴축정책의 고통

쌍궤제가 초래한 부작용은 재앙적 물가폭등으로 이어졌다. 나라의 자원이 국유부문에 동원되어 생산량이 부족한 가운데 사람들의 욕망은 해방되어 수요가 폭증했던 것이다. 이러한 공급과 수요의 불균형은 물가인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국유부문은 국가가 정한 가격에 묶여 있는데 시장에서는 수요에 의한 높은 가격에 거래가 되면서 단순히 물가가 높은 것이 아니라 동일한 제품에 두 개의 가격이 존재하는 불안한 상태였다. 물품의 가격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환율도, 금리도 그런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는 차익을 보고 누군가는 피해를 보게 된다.

 

1989년 천안문 사태의 파국을 낳은 직접적 원인은 물가관리 실패였다. 공식가격과 시장가격 사이의 괴리를 견디지 못한 당국은 87년 9월, '가격관리조례' 반포를 통해 가격 자유화를 추진하고자 했다. 88년 5월에는 더욱 구체화된 가격과 임금 자유화가 결의됐다. 그런데 준비 안 된 자유화 방침은 물가인상에 대한 더 큰 기대를 불러일으켰고 더 빠른 물가인상으로 이어졌다. 여기저기서 사재기 현상까지 나타났다. 결국 소비자물가지수가 88년 7월 20%, 8월 23.2%, 12월 26.7%와 같이 한 해 동안 18.7% 상승하자 당국은 급격한 긴축정책으로 돌아섰다.

 

급격한 긴축은 수많은 소상공인을 파산시켰고 대다수 인민의 삶의 질을 떨어뜨렸다. 89년 하반기에만 자영업자 300만 개가 감소했고 사영기업 수도 20만에서 9만으로 급감했다. 각지에서 민영기업에 대한 혹독한 세무조사가 벌어졌고, 고급상품으로 간주하던 TV에는 가혹한 특별소비세가 부과됐다. 막 형성되기 시작한 가전 전문매장 수는 2,000여 개에서 120개로 급감했다.

 

이러한 경제관리의 실패는 인민들의 불만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던 학생들은 학생대로, 삶이 피폐해진 인민들은 인민대로 불만을 터뜨리기 직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개혁적인 총리였으나 보수파에 의해 숙청된 후야오방(胡耀邦)이 89년 4월에 갑자기 사망하자 그의 추모를 위해 사람들이 천안문에 모이기 시작했다. 두 달 후 비극적인 파국의 전조였다.

 

다음 달 칼럼에서는 천안문 사태 이후라서 더 극적이었던 90년대 개혁개방에 대해 다뤄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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