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암 속으로 잠겨버리고 싶었다. 모래를 반사하며 빛나는 작은 빛조차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눈을 감아도 얇은 꺼풀을 통과해 들어오는 걸 막을 수 없어서 케피예로 눈을 둘러 머리 뒤에서 묶었다. 그러나 눈을 막는다고 망막을 통해 들어온 사실에 대한 인식을 씻어버릴 수는 없었다. 망각은 작위를 가할수록 더욱 또렷하게 각인이 된다.
'무엇을 잊으려는 게냐?'
스승 쿠루쉬가 물었다.
스승의 음성에 아오슈나르는 목이 메어 대답할 수 없었다. 폐부에서 울컥울컥 솟구쳐 오르는 뜨거운 덩어리가 기도를 틀어막았다가 허망하게 그 부피를 줄이는 바람에 꽉 막혀있던 성대가 열리면서 기괴한 소리가 울음처럼 터져 나왔다.
아오슈나르가 어떤 기대를 품고 사막으로 나온 것은 아니었다. 고사(枯死)를 생각했다. 몸속의 액체를 모두 뽑아내며 서서히 말라죽는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말라가면서 흐트러진 의식을 재배열하고 종국에는 하나의 점 안에 응결시켰다가 운이 좋으면 폭발해버리고 싶었다.
'잊는 것은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의 지속일 뿐이지, 사실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허면, 잊으려 하는 것은 허망한 일, 그걸 넘어서야 하질 않겠느냐?!'
스승은 얼굴을 또렷하게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짙은 안갯속에 몸을 숨긴 듯 윤곽에 갇힌 음영처럼 보였는데, 달이 태양에 완전하게 안겼을 때 보이는 금빛 고리처럼 윤곽선을 따라 빛나는 광휘 때문이었다.
'어떻게요! 지금 이 더러운 몸뚱아리로 어떻게 그걸 넘어설 수 있단 말입니까?'
아오슈나르는 노기 띤 음성으로 스승을 향해 항변하고 있었다. 스승의 생전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아오슈나르, 아오슈나르여!'
스승 쿠루쉬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가만가만 읊조리듯 말했다.
'지금 너는 분노에 사로잡혀 있구나. 왜 아니겠느냐? 제국의 가장 낮은 곳을 찾아다니며 몸과 마음을 부렸으나, 누구보다도 큰 자존감으로 자신을 지켜왔지 않느냐?. 그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으니 상처에 진물이 흐르듯 분노는 자연스러운 것이지. 그러나 아들이여!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 말을 들어라. 알보루즈 산정의 위대한 철목(鐵木)은 그 크기가 하늘을 덮을 만하지만 셀 수 없을 만큼의 옹이가 지난했던 세월을 말해준다네. 장대한 나무는 위대한 상처를 안고 있는 법, 위대한 상처는 특별한 고난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극복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그러므로 아오슈나르여, 내 아들아! 먼저 분노를 태워 없애버려라. 거룩한 불에 의지하여 일체의 분심(忿心)을 태워버려라. 알보루즈의 거대한 철목은 가지가 찢기는 고통에 진물을 내어 그 자리가 썩지 않도록 옹이를 만들었으니 결국에는 하늘을 덮을 만큼 성장한 것이다. 옹이는 또 다른 고난이 찾아왔을 때 지난날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말해주며 그것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용기의 샘인 것이다. 그러니 아들이여······'
쿠루쉬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잦아드는 목소리와 함께 모습이 흐려지더니 사라지고 없었다.
아오슈나르는 머리를 감싸 쥔 채 이빨이 부딪쳐 요란한 소리를 낼 정도로 심하게 떨고 있었다. 스승의 목소리와 어슴한 형체가 사라지고 희붐한 빛조차 어둠에 잠겨버렸다. 케피예로 가린 망막에 기괴한 표정으로 열락의 파고를 타고 오르내리며, 형용할 수 없는 기성과 거칠고 음습한 입김을 내뿜어내던 굴바하르의 모습이 물결 위에서 일렁이듯 드러났다가 사라지곤 하였다. 그때마다 아오슈나르의 목구멍이 닫혔다 열리며 무리에서 낙오한 사막 늑대의 처연한 울음이 삐져나오고 있었다. 분노를 불살라버리라던 스승 쿠루쉬의 나지막한 음성은 불기운이 스미도록 잘 저며진 비곗덩어리와 같았다.
'너는 단 한 번의 수치에 이리도 쉽게 무너지는구나. 니루샤의 여인들이 살이 찢기고 영혼이 말라 바스러지는 고통을 수없이 견뎌내며 목숨을 부지한 것이, 다만 죽지 못해서였겠느냐? 비록 그녀들이 문자를 알지 못하고 사유의 전후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상처를 옹이로 전환하는 지혜는 가지고 있다. 네가 굴바하르에게 굴욕을 당하고 있을 때, 레일라는 더한 치욕을 견뎌냈다. 그런데도 네가 굴욕감과 무기력으로 무너지고 있을 때 네게로 와 위로하였다. 그게 쉬운 일이었겠느냐? 그녀가 일상적으로 수치와 폭력에 적응해서였겠느냐?. 레일라는 고통 속에 있는 너를 긍휼히 여겨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나아온 것이었느니, 그래서 지혜는 지식을 뛰어넘는 것이니라!'
모습을 숨긴 스승의 목소리는 잘 벼려진 강철 검의 날 같았다.
바람이 부는지 케피예 자락이 날려 귀밑을 훑었고, 모래 흩날리는 소리가 수백 마리의 사막 풍뎅이가 일제히 움직이는 것 같이 들렸다. 얼굴에 와서 부딪치는 바람결에 궤도를 이탈하고 떨어진 별똥별에서 나는 듯한 유황 냄새가 묻어 있었다. 유혹이었다.
아오슈나르에게 혼잡의 시간1)이 다가왔다. 그는 도저히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에바에게 손상된 육신을 가진 굴바하르가 아오슈나르의 게티그(gētīg 육적인 것)를 훼손시켰으므로 그의 메노그(mēnōg 영적인 것)가 온전할 리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게티그는 메그노의 집이 아닌가. 돌이킬 수 없는 혼란의 시간, 죽음의 그림자가 자신을 에워싸고 조여 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후라 마즈다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이 일치할 때, 그때에야 우리는 새로워지는 게 아닐까?'
언젠가 알보루즈 산맥의 발라데흐(Baladeh) 인근 산간 마을을 떠돌다 지쳐 피정할 요량으로 수사에 들렀을 때였다. 신학교에서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던 동기 사제 소흐랍(Sohrab)이 살집 좋은 몸을 흔들며 기도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네가 교수가 되고 내가 전도 사제가 돼야 했었네.'
소흐랍은 이미 훌륭한 교사로 소문이 나고 있는 터여서 그의 말은 의외였다.
'스승과 책으로만 전해받은 지식을 가지고 아이들과 씨름하다 보면, 우리에 갇혀 으르렁거리는 늑대가 된 듯하다네. 스스로 사냥하지 않고 사육사가 던져준 먹이에 길들여 있다가, 어느 날 자신의 야성을 깨달은 늑대 말일세.'
그는 몹시 지쳐있는 듯했다.
'자네는 이미 훌륭한 사제를 길러 세상에 내보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자네의 일을 대신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자네는 여러 개의 몸을 가진 거나 다르지 않지.'
아오슈나르가 친구를 위로했지만, 그는 여전히 공허한 눈빛으로 건너편 책장을 바라보았다.
'새로워질 수는 있는 걸까?'
소흐랍은 탄식처럼 말을 했다.
'자네는 이미 훌륭한 제자들을 통해 새로워지고 있다네. 나 같은 떠돌이 사제가 매일 다른 환경과 상황에 맞닥뜨리면서 힘든 게 뭔지 아나? 변화를 못 느끼는 거야. 분명 매번 다른 그림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데 똑같다고 생각되는 거야. 그건 시간에 담긴 사건이 똑같은 패턴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지. 우린 파동 위에 앉아 늘 다른 시간 속으로 흘러가는데 일정한 무늬를 가진 파동에 감각이 무뎌지고 있는 것이지. 그게 두 번째 시간2) 속에 갇힌 우리의 한계가 아니겠나?'
아오슈나르의 말에 소흐랍은 아주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뭔가 미진하다는 듯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 그 시간 말일세.'
그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아후라 마즈다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일치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거듭나게 되는 거 아닐까? 나는 그 시간을 찾고 있다네!'
몇 해 후, 소흐랍은 거룩한 주와 자신의 시간이 일치하는 때를 찾아냈던 모양이었다. 그때 아오슈나르는 제국의 서북쪽 투스파(Tušpa) 사원에서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의 마지막 모습이 얼마나 거룩했던지 사람들은 그가 기어코 세 번째 시간3)을 만났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세 번째 시간······, 세 번째 시간······'
아오슈나르는 갈증을 느꼈다. 그러나 물주머니를 찾지는 않았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는지 알 수 없었다. 스승의 말대로 분노는 얕은 쾌락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안다. 사람을 천박하게 만드는 감정의 찌꺼기라는 것도 알겠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기껏 미치광이풀을 달인 즙에 영혼이 뭉개지고, 여인의 요니에 박힌 링가를 통해 전해지는 얕고 얇은 쾌락에 온몸의 세포가 들뜨지 않았는가. 이런 따위의 영혼과 몸으로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실〉이 가능하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평생을 거짓과 위선의 날들로 채워야 하는 게 아닌가.
'그건 사는 게 아니다!'
'무엇이 너를 더럽혔느냐?'
이제 쿠루쉬의 음성이 노기를 띠고 있었다.
'네 몸의 어디가 더럽혀졌는지, 내게 보여 봐라!'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스승의 목소리가 거칠어지고 있었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되느니······, 네가 거친 땅을 헤집고 다닐 때, 사람들은 너를 성자처럼 대접했다. 너는 그런 대접을 받아 마땅했었느냐?'
아오슈나르는 움찔했다. 전도 사제로 떠돌면서 그는 촌부들로부터 손님으로서의 환대가 아니라 거룩한 존재의 현현인 것 같은 환대를 받았다. 때로는 그것에 도취되어 스스로 그렇게 행동하게 되기도 하였다. 민망하기 그지없는 젊은 날의 치기는 두고두고 거울에 낀 때처럼 그를 괴롭혔다.
그는 벌떡 일어나 눈에 두른 케피예를 풀고 서쪽 하늘을 향해 절을 하기 시작했다. 참회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절을 멈출 수 없었다. 스승은 그에게 다시 일어서라고 하지만, 그는 스승의 가르침과 세 번째 시간의 환영 사이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저 자신을 기만할 수 없습니다. 썩은 몸에 향료를 바르고 악취를 감추는 짓은 못하겠나이다. 스승이시여, 거룩한 스승이시여! 제게 아후라 마즈다의 시간을 보여 주소서! 제가 감당하겠나이다. 거짓 쾌락에 오염된 몸뚱이를 새롭게 하소서. 제가 그것을 감당하겠나이다!'
아오슈나르는 뜨거운 기온에 증발하는 땀보다 더 많은 땀을 내쏟고 있었다. 무릎을 곧추세워주던 힘이 무너져 후들거리고 있었지만, 절을 그만둘 수 없었다. 무릎을 굽혀 땅에 얼굴을 댈 때마다 결별의 시간인 듯한 빛이 그에게로 오다가 굴절하여 사라지곤 했으며, 몸을 세워 동공에 잡히지 않는 서쪽 하늘을 볼 때마다 스승의 간절함이 점멸하는 빛처럼 다가오다 스러져 갔다. 혼미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려 애쓸수록 안개 짙은 황혼 녘에 몸을 숨기는 그림자를 따라가듯 의식이 흐려져 갔다.
'그때 네가 내 집에서 보았던 것은 굴바하르의 요니 아래에서 보았던 것과 다른 것이었느냐?'
스승의 목소리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아오슈나르는 깜짝 놀랐다. 돌연 내던져진 이야기는 분명 둘 사이의 금기가 분명했다.
'스승은 어디까지 알고 계셨던 것일까?'
부들부들 온몸이 떨려왔다. 스승은 한 번도 언급했던 적이 없는 이야기, 아니 아오슈나르의 목숨을 내어놓으라고 요구할 수도 있었던 치명적인 이야기, 유예된 처벌이라고 할 수 있는 그것을 꺼내 든 것이었다. 혀를 깨물고 싶은 부끄러움이 불에 달군 칼날에 얼굴을 덴 것처럼 결정적으로 찰나의 틈을 비집고 솟구쳤다.
그가 신학교의 마지막 학년을 앞두고 스승의 집을 찾아갔을 때였다. 열네 살의 앳된 소년은 어느덧 스물셋의 헌헌장부가 되어 있었다. 스승은 마침 인근 지역의 유력자 집안 결혼 주례를 위해 출타 중이었다. 하인들의 호들갑을 뒤로하고 중정을 지나 스승 쿠루쉬의 서재로 들어서려는데, '아오슈나르!'하고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돌아서자 파르자네흐(Farzaneh)가 웃으며 서 있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 아오슈나르는 심장에 벼락을 맞은 듯 꼼짝할 수가 없었다. 질 좋은 아마 튜닉이 젖은 채여서 몸매와 살결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욕실에서 막 나온 모양이었다. 아오슈나르는 숨이 멎을 듯하였고 시선은 그녀의 가슴에서 떠날 줄을 모르고 있었다. 파르자네흐는 아오슈나르의 얼어있는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굳어있는 그의 몸을 어루만졌다.
스물세 살의 청년에게 파르자네흐에게서 풍겨오는 농익은 복숭아 향은 모든 이성을 휘발시켰고, 나이 많은 남편과 살고 있던 여자에게 스물을 겨우 넘긴 남성의 몸에 서린 강렬한 정기는 견딜 수 없는 자극이었다.
금기의 단지가 깨어지고 나자 두 사람은 거침이 없었다. 천국은 이미 그들에게 와 있었으므로 죽음조차 두려울 것 같지 않았다. 하루 밤낮을 서로의 몸에만 탐닉하여 모든 에네르기가 방사된 상태에서 진공의 시간이 찾아왔고, 뒤따라 두려움이 벽의 작은 틈을 비집고 흘러들었다.
아오슈나르는 도저히 스승을 뵐 자신이 없었다.
'아오슈나르, 두려워하지 말아라.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단 말이냐? 학교로 돌아갈 때 스승님을 뵙고 가.'
파르자네흐는 아오슈나르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얹으며 말했다.
한동안 아오슈나르는 영혼이 없이 살아갔다. 처음엔 세포 하나하나에 기억된 열락의 순간이 되살아나 한숨을 내쉬며 그것을 복기하고 있었고, 시간이 지나자 환락의 끝에 이르렀던 진공과 함께 찾아왔던 두려움이 몸집을 키웠으므로 그의 영혼이 돌아와 자리 잡을 틈이 없었다. 쾌락의 꼬리는 길었고 두려움은 무거웠다. 그가 문득 정신을 차려 이성의 뒤꿈치를 잡았을 땐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아오슈나르가 신학교로 돌아가면서 스승을 찾아뵌 것은, 두 개의 마음이 요동을 치며 갈등하는 상황에서도 어쩌면 파르자네흐를 보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스승에 지은 죄의 무게가 파르자네흐에 대한 그리움의 무게보다 가볍게 여겨진 것은, 순전히 젊은이의 뜨거운 피에 심긴 죽음의 씨앗이 심한 갈증을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해 가을 무렵 파르자네흐가 죽었다. 그녀와 아오슈나르가 대기를 뜨겁게 데웠던 순간을 훔쳐본 하인 녀석이 있었고, 그가 그걸 이용해 그녀를 협박했던 모양이었다. 파르자네흐의 죽음으로 쿠루쉬가 비로소 일의 자초지종을 알았고, 그는 하인에게 상전을 모욕한 죄를 물어 투석형을 선고해 죽였으나 아오슈나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말하지 않았다.
'왜 제겐 죄를 묻지 않으신 거죠?'
아오슈나르가 숨이 막혀오는 두려움을 느끼며 스승에게 물었다.
'잘 들어라. 너는 여태껏 파르자네흐와 이슈바트(Ishvat)의 죽음 위에 서 있었다. 그러니 너를 통해 그들이 죽지 않도록 해줘야 한다. 잊지 마라!'
스승의 음성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오슈나르는 그게 더 아팠다. 밖으로 폭발하는 힘은 종국에는 소멸로 이어지므로 두려울 게 없지만, 내파하는 에네르기는 그 힘을 증폭하면서 아울러 응축하기에 헤아릴 수 없는 공포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네 머릿속을 부유하는 죽음의 시간을 안다. 그러나 내 아들, 아오슈나르여! 그것을 순전히 개인적인 것으로 만들지 마라!'
말을 마친 스승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흐린 물에 비친 사물처럼 윤곽이 뭉개져 있어서 얼핏 알아보기 어려웠으나, 분명한 말투와 실루엣에서 풍겨 나오는 특유의 기운은 부인할 수 없는 스승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는 뒤돌아서서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가 아오슈나르로부터 멀어지면서 흐릿한 모습은 점점 또렷해지고 있었다.
'죽음을 순전히 네 개인의 것으로 만들지 말지니······,'
알보루즈 산정에서 들었던 메아리처럼 커다란 울림을 뿌려 놓고, 스승의 모습은 강한 바람에 등불이 훅하고 꺼지듯 사라졌다.
아오슈나르는 통곡조차 할 수 없었다. 가슴이 뻐개지는 통증을 느끼며 모랫바닥에 얼굴을 묻고 겨우겨우 밭은 숨을 내쉴 뿐이었다. 스승 쿠루쉬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상처한 후 오랫동안 홀로 지내다 어렵게 맞아들인 젊은 아내와 가장 신뢰하던 제자가 그려냈던 푸르디푸른 불꽃을 외면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하인 이슈바트가 파르자네흐를 협박하여 그 일이 드러나기 전에 이미 그는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승은 한 번도 그 일을 아오슈나르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여전히 아들이라 부르고 있다. 스승의 시간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아오슈나르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지금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 제자에게 스승은 묻고 있다. 파르자네흐에게서 전이되었던 쾌감과 치욕스럽다고 여기고 있는 굴바하르에게서 이염되었던 감각이 다르더냐고, 네가 구별하고 구분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었더냐고, 그래서 성속이 어디로부터 왔으며, 네 의식은 어디에 있었냐고 묻고 있다.
아오슈나르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들어 스승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일어서서 손을 내밀고 그곳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스승의 흔적을 잡을 수 없었다. 완벽한 허공에 그려졌던 허상이었다. 허상이었다. 그의 눈에서 비로소 눈물이라는 것이 흐르기 시작했다.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는 눈물에 세상은 흐려졌고, 코를 통해 맑은 점액성 물질이 흘러내렸고, 그리고 목구멍으로는 좀 더 짙은 물컹한 덩어리가 솟구치면서 기도를 막아 켁켁 뼈가 목구멍에 걸린 들짐승의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혼절하고 말았다.
아오슈나르는 흑암으로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곳에서 희붐한 빛을 보았다고 여겼을 때, 그러나 그것은 빛이 아니라 탁한 인광에 휩싸인 어떤 것들이었는데 그 모습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눈에 보이되 무엇인지 분간할 수 없을 때 두려움은 공포가 된다. 아오슈나르는 두 손을 내저으며 그것들이 다가오는 것을 막아보려 하였으나, 그것들은 몸을 가진 존재가 아니었는지 그가 내두르는 손길을 휙 지나치며 그의 주위를 맴돌 뿐이었다. 조금 뒤에는 원한에 사무친 소리인지, 비껴갈 수 없는 절망에 찌든 소리인지 알 수 없는 기괴한 소리가 바싹 마른 대기에 얹혀 비틀리고 있었다. 그는 휘휘 내두르던 두 손을 가져다 귀를 막고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소리라고 하는 것이, 꼭 고막을 통해 들리는 것만은 아닌 모양이어서 그 기성에 섞였으나 소음이 되지 않고 또렷하게 뇌리를 파고드는 말소리가 있었다.
'그대는 죽은 자들의 상처도 잊지 말아야 해!'
귀에 익은 그 목소리는 스물세 살 무렵 그의 귓가에 묻어나던 농익은 복숭아 향과 같은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점점 가늘어지고 알 수 없던 흐릿한 인광의 덩어리도 빛을 잃어가면서 멀어져 갔다.
'죽은 자들의 아픔, 죽은 자들의 상처······를 위해 기도해 줘.'
아오슈나르는 뼛속을 파고드는 한기를 느끼며 눈을 떴다. 동쪽 하늘은 먹장구름이 덮어 매우 어두웠고, 서쪽 하늘은 명멸하는 별빛으로 찬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두 개의 하늘이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는 두 개의 하늘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그리고 죽은 자들의 상처를 잊지 말아달라던 가녀린 목소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궁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들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로 들어갔다가 돌아 나오며 탁한 입김이 되어 뱉어지곤 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남쪽을 향해 앉았다. 두 개의 하늘이 한꺼번에 그의 눈에 들어왔다. 명징한 하늘과 어둠이 중첩된 하늘. 그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두 개의 하늘은 너무도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아있어 눈을 뜨고 있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고 잔상을 지워버리려 애썼다. 서쪽 하늘의 명멸하는 별은 더욱 또렷해지고 있었으며, 동쪽의 어둠 짙은 하늘은 뭉게뭉게 그것을 펼치려 무진 애쓰고 있는 듯했다. 애초에 하나였을 두 하늘은 영원히 대립하며 서로를 진멸하려는 전선 같았다. 아오슈나르의 몸이 더워지기 시작했다. 생각의 늪 속으로 빠져들수록 잘 마른 화목을 넣은 난로처럼 몸이 뜨거워졌다. 단전에서부터 솟구치기 시작한 화기는 장부를 거슬러 목구멍을 통해 머리로 직통하면서 정수리를 달구기 시작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머리와 얼굴에서만 땀구멍이 열리고 끝없이 솟는 샘물처럼 밀어내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선 두 개의 시간이 충돌하고 있었다. 두 개의 시간이 벌이는 쟁투는 모든 뇌신경을 마비시킬 지경으로 격렬해서 아오슈나르 자신이 소멸해버릴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에 흐르던 수십 개의 물줄기가 멈추고 마르더니 붉은 열꽃이 점점이 피어 머리를 덮었다.
'그 시간 말일세! 그게 알고 보니 내 시간의 질량을 절댓값으로 하는 거더구먼. 거기에다 삶의 속도 그러니까 생각의 속도가 작용하면서 선회하는 소용돌이가 만들어지는데 거기에 뛰어들 것인지 아닌지는 내가 결정하는 거지!'
소흐랍이었다. 그는 오른쪽으로 회전하는 소용돌이를 거슬러 돌면서, 아오슈나르가 미쳐 불러볼 시간도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소흐랍이 사라지고 난 자리엔 흐릿한 윤곽을 가진 두 개의 거대한 기체 덩어리가 엉겨 돌아가고 있었는데, 서로 어긋나는 파장을 가진 여러 개의 소리가 선회하는 기체 덩어리에 얹혀 무슨 신호를 보내는 듯했다. 얼핏 스승 쿠루쉬의 탄식, 파르자네흐의 안타까워하는 음성이 어지럽게 뒤섞인 파장 안에서 들리는 듯도 했으나 이내 형체를 잃은 소용돌이를 따라 해체되어 갔다.
아오슈나르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혼돈에 빠지는 것을 느끼며 머리에 돋아난 열꽃들이 하나씩 하나씩 터져나가는 환각 속에서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언젠가 수도자가 머리에 돋은 열꽃을 이겨내지 못하면 죽게 된다며 선홍빛 잇몸을 드러내며 웃던, 신두강 너머에서 왔다는 수도승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어떻게, 어떻게 이겨낸단 말이오?'
송곳이 두개골에 박히는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아오슈나르가 소리를 내질렀다. 목구멍 돋은 가시가 음절을 찔러 온전한 말이 되지 못하는 소리였다.
'차라리 죽음이 빛이겠구나! 죽음이 빛이야!'
아오슈나르는 더는 견뎌내지 못할 것 같았다. 그의 눈엔 흑암의 거대한 벽에 부딪혀 형체도 없이 스러지는 빛의 덩어리가 보였다.
'끝이로구나, 세 번째 시간을 보지도 못하고 끝이 나는 게야!'
혼미해지는 정신이 어떤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결국, 저 명징한 세계와 흑암이 층층이 쌓인 세계가 다른 차원에서 하나가 될 수는 없단 말인가? 내 시간은 어디서 볼 수 있는가?'
아오슈나르는 몸이 해체되어 가는 환각 속에서 목구멍에 돋은 가시 더미에 성대가 무참히 찢겨나가는 통증을 느끼며 겨우 말을 만들어 외쳤다.
'정신 차리오! 이게 무슨 꼴이랍니까?'
아오슈나르는 문득 다른 세계에 진입한 듯 놀라 눈을 떴다.
'레 레일라? 여긴 웬일인가?'
뜻밖에 눈앞에 레일라가 서 있었다. 그녀의 갈색 피부가 더없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오라버니는 무슨 고함을 그리 질러대시오. 아직도 수수께끼를 풀고 있어요?'
레일라는 아오슈나르의 외침을 들었다며 얕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좁고 긴 천을 펼쳐놓고 한쪽을 한 번 뒤집은 다음 양 끝을 이어 붙이면 두 개의 면은 하나로 연결되게 되오. 앞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뒷면에 이르게 되고, 뒷면을 따라가면 곧 앞면에 다다르오. 두 개의 면은 이제 하나가 되어 구분이 무의미해진다오. 삶과 죽음이라고 다르겠소?'
레일라의 말에 아오슈나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앞뒤가 하나로 이어지는 띠라니······'
정수리에서 척수를 따라 번개가 내리꽂은 것 같았다. 그는 벌떡 일어나 레일라를 향해 섰다.
그러나 레일라는 거기 없었다.
동쪽 지평선으로 막 해가 떠오르고 있었고, 주홍빛 햇살이 퍼져가는 하늘의 서편에 수줍은 듯 하얀 그믐달이 걸려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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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에바와 악마들이 게티그를 손상시켜 그 안에 들어감으로써 선과 악이 뒤섞여 혼합된 유한의 시간.
2) 혼잡의 시간을 말한다.
3) '결별의 시간'이라고 일컬어진다. 선과 악의 싸움에서 선이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고, 악과 영원히 결별하는 시간이다.
오낙영(글쓴이, 조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