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례91

바둑이 대화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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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집 강아지는 덥수룩한 흰털을 깎아내면 숨어있던 콩알만 한 검은 점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바둑이입니다. 처음 식구로 맞은 건 19년 가을입니다. 수의사선생님은 이빨을 살펴보시곤 2-3살 정도 되었을 거라 하셨습니다. '아기 강아지였네'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강아지는 사람보다 수명이 짧아 사람나이로 치면 20살쯤 됐던 걸 겁니다. 산에서 동복형제들과 무리 지어 다니며 들개로 살다 청년이 다 되어 인간세상에 홀로 던져진 셈입니다. 저야 물론 구조와 보호라는 명분이긴 했습니다만 이 친구 입장에서는 납치와 감금으로 느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이 친구의 매력은 제가 사랑한다며 다가가도 귀찮다는 듯 한숨을 폭 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게서 멀찍이 떨어져 앉는 데 있습니다. 그래도 여느 집 강아지처럼 외출했다 돌아오면 꼬리를 슬쩍 흔들어 반기기는 합니다. 인사가 30초를 넘어가는 일이 드물긴 하지만요. 처음엔 당황스럽고 섭섭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강아지 얼굴에 고양이 영혼을 지닌 녀석의 하이브리드한 개성이 참 좋습니다.

 

산책하다가 다른 강아지를 만나도 꼬리를 빳빳하게 흔듭니다. 세상 모든 강아지가 다른 강아지를 만나면 같이 놀자며 반가워하는 줄 알았던 순진한 초보 반려인 시절엔 그 꼬리짓을 크게 오해했습니다. 친구를 만들어 주겠다며 이웃집 백구와 서로 만나게 했다가 이빨을 드러내며 위협적으로 짖어대는 통에 아주 혼이 났더랬습니다. 이제는 그 꼬리짓이 '저리 가, 다가오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라는 신호란 걸 압니다. 처음엔 친구한테 못되게 군다며 녀석을 타박하기도 했습니다. 누군가를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하고 다정하게 굴어야 한다는 가치관은 저의 것입니다. 이 친구의 성격과 선호가 저와 다른 것을 나무라는 건 웃기는 일이지 싶습니다. 지금은 경계를 지키고 고독을 즐길 줄 아는 그 태도가 멋스럽다 여깁니다.

 

이 친구의 또 다른 매력은 아쉬울 때면 기척 없이 살금살금 다가와 새초롬한 눈빛을 보낸다는 겁니다. 저와 눈이 마주칠 때까지 몇 발짝 떨어진 자리에 앉아 10분이고 1시간이고 하염없이 기다립니다. 그러다 제가 알아차리고 말을 걸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듭니다. 그 몸짓은 분명 뭔가를 요구하는 신호입니다. 다만 그 정확한 의미는 같이 산지 5년이 지난 지금도 단번에는 못 알아듣겠습니다. "산책 갈까?" 물으며 현관으로 가면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고, "물 줄까?" 물으며 물그릇을 들이 밀면 주춤주춤 물러납니다. "간식 줄까?" 물으며 냉장고 문을 열면 살랑이던 꼬리가 배속으로 나부낍니다. '그게 바로 정답!'이라는 대답입니다.

 

서너 번 만에 통하는 날은 서로 신호가 잘 안 맞은 날입니다. 보통 두 번 만에 맞춥니다. 척하면 척하고 잘 통하는 날도 더러 있는데 그럴 땐 꽤 희열이 느껴집니다.

 

사람 사이 대화도 바둑이와의 소통과 닮은 듯합니다. 같은 단어를 두고 상대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와 내가 이해하는 의미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강아지가 꼬리를 흔드는 게 반가움이기도 하고, 요구이기도 하고, 경계이기도 한 것처럼요. 그러니 누군가 "외롭다"라고 말할 때 내 경험에 미루어 "외롭구나"라고 퉁치면 제대로 된 이해가 아니게 됩니다. 외로움을 어디서 어떻게 느끼는지, 어떤 상황에서 주로 느끼는지, 그럴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 세세히 물어보고 나서야 비로소 "아, 너는 이럴 때 이렇게 느끼면 외롭다고 표현하는구나"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제야 "너 참 헛헛하니 힘들겠다."하고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그 외로움에 머물러 같이 느껴주는 게 좋을지, 내가 손을 잡고 나란히 걸어가 주는 게 좋을지, 웃어 떨칠 수 있게 함께 놀아주는 게 좋을지 알 수 있습니다.

 

모르면 물어보면 됩니다. 시행착오는 당연히 있습니다. 내가 전혀 모르던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일인데 단숨에 맞아떨어지는 것도 희한한 일입니다. 흙탕물 속에서 사금을 건지는 기대감으로 묻고 또 물으면 됩니다. 상대는 이미 온전하며 고유한 존재라는 전제를 가지고 하면 됩니다. 그러면 서로 합을 맞추는 과정에 삐걱대던 순간도 애정과 사랑의 경험으로 남습니다.

 

제가 다가가는 걸음걸음을 인내심 있게 기다려 준 바둑이가 저에게 가르쳐 준 소통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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