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건강을 위한다는 속보이는 이유를 내세워 담배세를 왕창 올린 어느 날, 몇 명의 동지들과 광화문 뒷골목에서 소주라는 탈을 쓴 화학약품을 들이키며 의기투합하여 담배를 집적 만들기로 했다.
제품명 “조세저항담배”
4명이 1인당 7만원씩 각출하여 담배모종을 구입하고 텃밭을 빌려, 비가 겁나 내리는 4월 어느 날 두 사람이 담배모종을 심었다. 담뱃잎을 수확할 때까지 담배 심은 사실을 머릿속에서 삭제하는 새로운 농사기법인 “태평농법”으로 담배를 키웠다. 텃밭에서 담배가 알아서 자라는 동안, 담배에 대해 나름 연구를 하였다.
담배, 그 연기의 이름?
담배는 포르투갈어 tabaco(영어 tobacco)에서 나왔다. ‘타바코’란 말의 어원 정확하지 않다. 스페인 사람들이 쿠바 사람의 담배 발음을 ‘타바코’로 잘못 들었다고도 하고, ‘타바코’는 담배를 피우는 관이나 파이프를 가리키는 인디언 말이었다고도 한다. 아무튼 아메리카 토착어를 유럽의 음성 기호로 나타낸 것임은 분명하다.
이 ‘타바코’가 일본으로 전래되면서 일본어로 ‘다바코’로 발음되었으며 우리나라로 전래되면서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 ‘담파고’, ‘담파괴’, ‘담마고’, ‘담박’, ‘담박괴’, ‘담파’, ‘담배’ 등으로 표기되었다. 초기 담배는 가래를 없애준다는 속설이 있어 ‘담파고’와 ‘담파괴’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또한 남쪽에서 온 풀이라는 뜻으로 ‘남초’ 또는 ‘남령초’, ‘남만초’로도 불리었고 식자층에서는 ‘연초’라고도 사용되다가 담배로 정착되었다.
담배, 그 전래는?
담배는 일본이 우리나라에 전파하였고 그 시기는 1609년에서 1614년 사이에 전파되었다는 설이 있고, 1618년(무오년) 전후에 전해졌다는 설이 있다. 『담바고 문화사』 라는 책을 쓴 안대희에 따르면 1609년을 기점으로 삼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국교가 단절되었다가 1609년 기유약조가 맺어지면서 국교가 재개되면서 부산 동래포구에 설치된 왜관을 통하여 담배를 팔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한 유몽인이 1612년쯤에 쓴 『담파귀설』에 의하면 “일본 장사치들이 부산 포구에서 담배를 파는데 3, 4년 사이에 담배가 온 나라를 휩쓸고 있다” 고 쓴 것으로 보아 1609년이 맞을 것 같다고 기록하였다. 담배는 전래 된지 10년이 못되어 전국을 휩쓰는 폭발적인 증가를 보였다.
조선시대 대표적 애연가들
“팔진미는 못 먹어도 남초는 먹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는 조선시대 숱한 애연가 중에서 대표적으로 몇을 고르면 정조, 정약용, 장유, 신광수, 신광하, 허필, 심노숭, 조희룡, 황현 등을 들 수 있다.
정조의 담배사랑은 지극했다. 당시 담배를 놓고 찬반양론이 거세게 일어났다. 국내 산업의 근간으로 확장을 거듭하던 담배가 비옥한 경작지를 확보하면서 큰 폐단을 드러냈다. 금연론자들은 금연책의 실시를 거듭 주장하며 경작지의 침탈을 막으려 했다. 그렇게 찬반양론이 격돌하던 치세 내내 정조는 담배가 일으키는 산업상의 폐단은 인정하면서도 담배의 재배와 유통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시종일관 거부했다. 또한 창덕궁 후원에 담배를 재배해 수확한 담배를 신하들에게 하사품으로 하사하였다. 심지어 초계문신에게 시 창작을 시험할 때도 흡연을 이용하였다. 승지 한 명에게 담배를 한 대 피우라 하고 다 피우기 전까지 시 한 수를 지어내도록 시간을 제한했다. 이 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바로 다산 정약용이었다.
다산은 담배를 매우 즐겨 시와 산문에 그 흔적을 여럿 남겼다. 애연가로서 다산의 모습은 1801년 경상도 장기로 유배 갔을 때 지은 『담배(煙)』란 시에 잘 나타난다.
『담배(煙)』
육우가 지은 『다경』도 좋고
유령이 지은 『주덕송』도 기이하나
지금 시대에 새로 출현한 담배야말로
유배객에 제일 친한 물건이라네.
가만히 빨아들여 향기에 젖어들고
슬며시 내뿜어 연기가 피어나네.
객지의 잠자리라 늘 편치 못하여
봄날은 갈수록 더디기만 하구나
조선시대 금연론자들
조선시대에도 많은 금연론자들이 있었다. 조선 후기 성리학의 태두인 남당 한원진은 젊은 시절 20년 동안이나 담배를 피우다가 과감하게 끊고서 시를 지었다. 이 일은 많은 후배 학자들의 금연에 모델이 되었다.
『다짐』
친숙한 것 잊기 어려움은 예로부터 걱정거리
욕망을 이기려면 마음 모질게 가져야지
이제부터 남방서 온 담배를 끊으려 하니
이십 년 세월 동안 피운 것이 잘못이다.
담배의 도입과정을 직접 목도한 유몽인은 『담파귀설』에서 담배는 건강에 치명적인 해를 가하므로 피워서는 안 된다고 금연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가법으로 금연을 하는 집안도 많았다. 인조 때의 김광환은 부친의 일로 담배를 금하였고 그 후손은 거의 10대가 지나도록 금연을 하였다. 서울 남산아래 회동에서 거하며 많은 정승을 배출한 정태화 집안도 가법으로 흡연을 금하였으며 그의 손자 정각선(1650~1720)은 『두릉만필』이란 책에 삼정승에 이르기 전에는 흡연을 하지 말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가문의 전통으로 금연이 당시의 양반가에 상당히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조시대 선비 이윤영은 바둑으로 유명한 그의 아우 이운영이 고급스런 담뱃갑을 장만하고 형에게 멋진 글을 부탁하자 다음과 같은 흡연의 해로움을 써주었고, 새기도록 했다.
음식이란 것은
생명에 보탬을 주는 것일 뿐
그래서 뜻있는 선비는
고량진미에 뜻을 두지 않네.
기호와 욕망이 갈수록 치올라
먹지 않는 것이 없어졌네.
독이 있는 연기까지 먹어
네 이가 검게 변하고
네 입이 독한 기운에 쏘이네.
재를 버려 물건을 더럽히고
책들이 불에 타버리며
불똥이 돗자리를 태워먹네.
나는 천 가지 백 가지 손해를 보나니
무슨 이익이 있는가?
조선 3대 명품 담배
조선시대 담배이름은 생산지명과 뒤에 초(草)를 붙여서 불렀다. 평안도 성천에서 나는 성천초, 충청도 보은현 회인에서 나는 회인초, 경상도 안동에서 나는 안동초 등등 이중 애연가에게 인정을 받으며 100년 이상 명성을 유지하면서 명품 담배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조선의 3대 명품 담배는 평안도 “성천초”(삼등초와 양덕초 포함), 전라도 “진안초”, 경기도 광주 “금광초” 다. (평안도 “성천초”- 성천, 삼등, 양덕은 인접한 지역으로 이 지역에서 나오는 담배를 통칭하여 “서초” 라고 불렀다.)
『춘향전』 (동양문고본)에 나오는 한 대목으로 이몽룡이 춘향이를 처음 찾아 같을 때 춘향이 이몽룡에게 담배를 권하는 장면으로 당시의 명품 담배를 모두 이야기하고 있다.
“은침 같은 열쇠 내어 금거북 자물쇠를 떨컥 열고 각색 서초를 다 내어올 때, 평안도 성천초, 강원도 금성초, 전라도 진안초, 양덕 삼등초 내어놓고, 경기도 삼십칠 관(官) 중에 광주 남한산성 금광초를 한 대 뚝 떼어”
담뱃잎 수확
수확할 때까지 담배 심은 사실을 머릿속에서 삭제하는 “태평농법”으로 담배를 키워 수확량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적고, 대부분이 벌레가 먹어 성한 것이 없는 천연 유기농 자연산 담뱃잎을 획득하였다. 8월의 폭염 속에 한 사람이 따가운 자외선과 사투를 벌이며 담뱃잎을 수확(?), 아니 그냥 쓸어 담아 왔고, 지금까지 놀고 있던 나에게 쓸어 담은 담뱃잎이 전달되었다.
담뱃잎 말리기
담뱃잎을 말리는 방법은 두 가지다.
1. 그늘에 널어 두어 바람에 자연스럽게 말리는 방법으로 “양건” 이라고 불린다.
2. 불에 쪄서 말리는 방법(커다란 가마에 담배를 채워놓고 아래에서 약한 불로 열기를 보내어 담배를 말림, 약 7일 이상-너무 뜨거우면 담배가 탈 수 있으므로 불길 조절이 중요함)으로 “화건” 이라고 한다. “화건”이 “양건”보다 담배가 순함.
우리는 “양건”으로 말릴 경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화건”으로 말릴 수 있는 장비도 없어 변형된 담뱃잎 말리기에 시도하였다.
1. 수확한 담뱃잎을 그대로 잘 펼쳐서 녹색이 사라질 정도로 말려 물에 씻은 후 찜통에 찜
2. 흙과 벌레로 가득한 담뱃잎을 하나씩 씻어 찜통에 담고 중불로 1시간을 찜
(담배를 만들어서 피워본 결과 탁월한 선택이었음)
3. 찐 후의 상태
4. 담뱃잎 에서 나온 물
5. 찐 담뱃잎을 큰 채반에 널어서 말림 - 천연, 유기농, 등을 강조하다 보니 담뱃잎이 너무 커서(제일 큰 것이 어른 손바닥만 함) 잎을 펼쳐서 말릴 수 있는 상황이 안되어 그냥 널어서 말림
6.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날 때 마다 뒤집어 주어야 함 (썩을 수 있음) - 적당히(부서지지 않을 정도) 마른 후 담뱃잎에서 굵은 줄기를 제거함(아따~~ 손 많이 가네)
담뱃잎 썰기
담뱃잎은 잘게 썰수록 맛이 부드럽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보유한 공구로는 잘게 썰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그냥 식가위로 정성을 다하여 대충 잘랐다.
1. 잘게 썬 담뱃잎을 펼쳐서 하루 이상 두어 완전히 말린다(그래야 썩지 않음)
2. 완전히 말라 만지면 부서지는 담뱃잎을 잘 펼쳐놓고 물을 스프레이 해준 상태에서 키친타올을 덮어 다시 말림(담뱃잎이 수분을 먹어서 약간 부드러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 담뱃잎이 부서지지 않고 맛도 좋아짐)
이 과정을 3번 반복하자 담뱃잎이 말라도 부서지지 않고 부드러운 상태를 유지함. 이때 2번은 담배의 잡냄새를 제거하기 위하여 물 대신 더치커피(겁나 비싼)를 뿌려줌
이옥의 『연경』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담뱃잎을 그늘진 처마 안에 걸어서 완전히 말린 후 지붕 위에 널어놓아 밤에 이슬에 완전히 젖었다가 낯에 마르기를 반복하는 방법으로 담뱃잎을 건조하였다고 한다.(아따~~ 진짜 손 많이 가네)
인터넷에 올라온 글 중에 담뱃잎을 말릴 때 꿀을 바르던지 독한 소주를 뿌리면 향이 좋다고 하였는데, 조선시대에도 있던 제조 방식이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담배를 “별향초” 라고 불렀으며 18세기 후반 이후에 상당히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말리는 과정에서 뿌려 주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말려진 담뱃잎을 피우기 전에 꿀물을 뿌리던지 소주를 뿌려서 피웠다. 춘향전에도 꿀물을 훌훌 뿜어서 피우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이유는 보관용기의 밀폐 기술이 떨어지던 당시 오래 보관하여 습기가 빠지고 바싹 말라 부스러지기도 하고 담배 맛이 떨어지므로 담배 맛을 보강하기 위한 방법으로 보고 있다.
지금도 파이프나 곰방대로 담배를 피울 시에는 충분히 도전 해봄직한 일일 것 같다.
드디어 담배 제작
담배튜브 및 담배 넣는 기계 구매했다. 인터넷 검색하면 많이 나온다. 우리 같은 사람이 많은가 보다. 나는 라이타타임 이라는 회사에서 온라인으로 구매함. 담배튜브 - 필터가 달려있는 속이 빈 종이튜브 100개 1Box에 2,500원. 튜브에 담배 넣는 기계는 12,000원.
완성된 담배이다.
맛?? MSG(시판되는 담배는 온갖 화학약품 속에 잠수하였다가 나온 것임)가 듬뿍 들어간 음식을 먹다가 MSG가 전혀 첨가되지 않은 음식을 먹는 느낌이랄까.. 그래도 내 손으로 직접 만든 이 세상에 오직 하나인 담배인데 일러 무슨 말을 하리요.
여러분들도 즐거운 도전을 시작해 보시길 바란다.
참고문헌 :
조선시대 담배에 관한 전문서적으로 이옥(1760~1815)이 쓴 『연경(烟經)』이 있다.
서문 외에 4권으로 구성 되어있으며 그 내용은
1권 : 담배씨를 거두는 내용인 ‘수자’에서부터 담배 뿌리를 보관하는 ‘엄근’에 이르기까지 담배의 재배법과 과정을 17조에 걸쳐 상세하게 기록했다.
2권 : 담배의 원산지와 전래, 담배의 성질과 맛, 담배를 쌓고 자르는 방법, 태우는 방법 등을 19조에 걸쳐 소개했다.
3권 : 흡연도구를 12조에 걸쳐 상세하게 설명했다.
4권 : 흡연의 멋과 효용, 품위와 문화를 10조에 걸쳐 다각도로 묘사했다.
이곳에 쓰여있는 담배에 관한 내용의 전부는 『담바고 문화사』(안대희 씀, 문학동네), 『연경-담배의 모든 것』(이옥 씀, 안대희 옮김, 휴머니스트)에서 뽑아온 글이며 겁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으므로 꼭 사서 읽어보기를 추천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