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희51

곁에 있는 하나님을 돕는 사람 - 김은미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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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있는 하나님을 돕는 사람 –김은미 조합원 

 

 

김은미 조합원이 일하는 용산구청 앞 정원은 꽃과 나무가 반을 차지하고 나머지 반은 속이 꽉 찬 배추가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정원에 웬 배추? 구청 정원이라 그런가?’ 자동차들이 매연을 내뿜으며 달리는 도로 옆 정원에서 배추가 이렇게 실하게 자라다니! 배추는 우리네 밥상에 빠지지 않고 오르는 소중한 먹거리인데…… 그 배추 농사를 지은 손길이 궁금했습니다. 사회 복지사로 일하고 있는 김은미 조합원은 “내가 맡은 대상자 한명 한명이 나에게는 하나님이죠. 잘 돕고 싶어요.”라고 했습니다. 속이 꽉 찬 배추가 떠 올랐습니다. 

 

Q: 용산구청에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요?

A: 복지정책과 희망 복지팀에서 일하고 있어요. 취약계층 주민 중 주민센터에서 만성적이며 복합적인 어려움이 있는 이용자를 구청으로 의뢰하면 구청 희망 복지팀에서 집중적으로 이 업무를 지원합니다. 이용자가 스스로 위기를 해소하고 문제를 해결하여 안정적으로 일상생활을 유지하여 지역사회 일원으로 살아가도록 돕는 일을 하는 통합사례관리사입니다

 

 

보수적인 여수교회에서 향린교회로 오기까지 

 

Q: 향린교회 장로직을 맡고 계시지요? 향린교회는 언제부터 다니셨나요? 

A: 제 고향은 여수이고 우리 집은 불교 집안인데 초등학교 때 동네 분을 따라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여수에서 쭉 살다가 2006년에 남편이 ’진실화해위원회‘ 일을 하게 되어 서울로 이사를 와서 향린교회에 다니게 되었어요. 

 

Q: 향린교회를 선택한 까닭이 있나요? 

A: 남편이 ’한 중 일 포럼‘에 참석했는데 그 모임에 홍근수 목사님이 오셨어요. 목사님이 주일날 교회를 버리고(?) 시민단체 모임에 올 수 있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정말 멋있다는 생각이 들고 궁금했어요. 저런 교회 교인들은 어떤 사람일까? 기회가 되면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래서 향린을 선택했는데, 처음에는 경계인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때로는 제가 다양한 것을 못 받아들이고 툴툴거리며 부적응 발언을 해도 교인들이 기다려 주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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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여수의 교회는 분위기가 어떤가요? 

A: 여수는 여순사건이 일어났던 곳이지요. 좌우익 대립이 심했고 좌익이 많이 죽임을 당했던 곳이라 이데올로기에 대단히 민감한 도시예요. 교회에 다니는 것이 우익이라는 징표가 되는 거지요. 그래서 대부분의 전라도 교회들은 진보성이 있는데 여순 사건의 피해지역인 ‘여수, 순천, 광양’ 교회들이 보수적이에요. 

여수사람들은 여순사건이라는 역사적인 배경을 피할 수 없어요. 우리 집안 삼촌들도 여순사건에 연루되고, 여순사건 화재 때 일곱 살, 다섯 두 언니가 죽었어요. 그런데도 우리 엄마는 절대 그 말을 하지 않았어요. 아무도 몰랐던 사실을 나중에야 들려주셔서 깜짝 놀랐어요. 우리 엄마는 늘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나대지 말고 잘난 척하지 마라’라고 가르쳤어요. 그런 배경에서 자라 우익성향이었고, 제가 다니던 교회도 아주 보수적이었어요. 

 

Q: 그 교회에서 성장했나요? 

A: 청년 무렵 기장교회로 옮겼는데, 작고 초라한 교회였지만 기독인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가치관을 바꾸게 해주었어요. 그 교회에서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을 배려하고 나누는 삶을 사는 친구를 보고 큰 배움을 얻었어요.

 

Q: 그 교회에서 남편을 만나셨나요? 

A: 네 그 교회에서 한 오빠를 만났는데, 그 사람은 뭔가 철학적이고, 성서를 보는 관점이 달라 보였어요. 처음에는 그 오빠가 운동권인 것이 무서웠어요. 하지만 옳은 일을 한다는 생각이 들어 천천히 녹아들었어요. 결국 그 오빠와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신앙생활을 했어요. 

 

가정을 도맡느라 바쁜 나날에서 ’살아있자‘로 삶의 목표를 바꾸고  

 

Q: 남편이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소장으로 일하시는 이영일 님이시지요? 사회운동을 하는 남편과 사는 어려움은? 

A: 남편이 자기 하고 싶은 일, 바른 일을 하려면 생계는 내가 맡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조그만 공부방과 학습지 지부장 일을 했어요. 남편이 하는 일을 돕겠다는 생각이라기보다는 남편이 하는 일을 말리지는 못하겠구나 ~100% 이해는 못 하지만 옳은 일을 한다고 하니 참아보자는 생각이었어요. 그렇지만 가정에 대한 기본적인 생활자금과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기, 나 없을 때 밥 차려주기 정도는 해주기를 바랐어요. 

 

Q: 위기는 없었나요? 

A: 학습지 교사 일이 휴일에 쉬려면 평일에 수업을 꽉 채워야 해요. 주일은 교회에 가면 또 봉사해야 하잖아요. 찬물 알레르기가 있는데 설거지를 하면 비염이 도지고, 시댁에 가서 며느리 역할도 해야 하니 일주일 내내 여유가 없는 생활을 했어요. 내가 일하느라 제때 내 아이들을 돌보지 못한 것 같아 속상한 마음이 늘 있었어요. 그러다가 큰아이가 중2 일 때 내 몸이 아파 버리더라고요. 자율신경실추증. ‘삶’도 의미가 없고 ‘신랑’도 싫고, ‘나라와 민족’도 싫었어요. 화살을 남편에게 돌리며, 남편에게 나라보다 먼저 집안부터 잘 챙기라고 말했어요. 남편이 그때 깜짝 놀라 서울 병원으로 나를 데리고 다니며 치료를 받게 했어요. 

저도 그때 깨달았어요, 내가 목표를 너무 크게 잡았구나~ 내가 좋은 엄마가 된다는 목표에 도달은커녕 죽을 수도 있겠다고. 그래서 ‘살아 있자’ 라고 목표를 바꾸었어요. 

 

Q: 내려놓게 되던가요? 

A: 아프기 전에는 남편에게 물질적 결핍에 대한 보상으로 온전히 나를 이해해주기를 바랐던 것 같아요,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개구라(? ㅎㅎ 빵 터졌어요)를 믿으며 남편을 바꿔 보려고 독재를 부렸던 것 같아요. 하지만 아픈 뒤에는 남편이 달라지기를 바라지 않기로 저의 인정욕구를 포기했어요. 그동안은 최선을 다하는 억척같은 엄마라는 자부심으로 살았지만 정작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기다려 주거나 공감하거나 하는 시간이 부족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 후 아이들이 원하는 삶을 살도록 인정하고 존중하기로 하니 아이들의 성적, 학벌에 대해서도 마음이 편해졌어요. 

 

Q: 쉬어야 몸이 회복될 텐데 그 후로는 쉼이 있는 생활로 바꾸셨나요? 

A: 서울로 이사 온 뒤 한동안은 일산에서 학습지 지부장으로서 교사들에게 힘을 주고 기를 세워주는 일을 하려 노력하고 신나게 일했다가 다시 체력이 고갈되어 5년 정도 쉬었어요. 남편이 ‘진실화해위원회’에 근무하면서 시민사회단체에서 일할 때보다 많은 월급을 받아 날 쉬게 해주어서 고마웠죠. 그 뒤 운동하러 다니고 장구도 치고, 배드민턴도 치고, ‘사회 복지사’ 자격증도 따고, ‘미술상담사’ ‘자기 주도 학습사‘, ’방과 후 교사‘도하며 놀았어요. 

 

Q: 아이고 맙소사 그것이 놀았다는 거예요? 

A: 그러니까~ 저는 놀지를 못하는 거예요. 

   

새로운 삶-사회복지사

 

Q: 사회 복지사 활동을 시작하게 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9년 전 노원구청에서 진행하는 드림스타트 사회복지사업의 ‘아동 통합 사례 관리사’ 일을 하게 되었어요. 0~12세 취약계층 아동들의 인지, 언어, 신체, 건강, 정서, 행동, 양육자 및 양육환경에 어려움이 있는 아동들이 부모와 같이 잘 지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일입니다. 지역자원을 연계해서 취약아동 가정의 자립적 삶을 돕는 것이에요. 아이들은 오랜 기간 도움이 필요해요. 한 아이는 갓난아기 때부터 8살까지 돌본 경험이 있어요. 학교와 치료실, 가정에서 잘 지내는지 지속해서 살피고 계속 그들과 소통하는 일을 해요. 마을이 다 도와서 이 아이를 돌보는 거지요 이 활동을 8년간 하다가 정년퇴직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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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어려움도 많겠지만 보람을 느끼는 순간도 많겠어요?

A: 늦은 나이에 새로운 일을 시작해서 일을 배우느라 자존심 상할 때도 있었고 힘도 들었어요, 다행히 그곳 복지사 선배들이 ‘복지의 신’이라 불릴 만큼 좋은 분들이었어요. 복지에 대한 철학을 가지고 무조건 퍼주는 복지가 아니라 이용자의 인권을 존중하며 어떻게 잘 도울지 고민하고 공부하는 사람들이었어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많이 시켰어요. 나는 신입일 때 그 멋진 분들을 만나 ‘아 사회복지를 이렇게 멋지게 하는 사람들이 있구나’라는 사실에 감동하였어요. 선배들 덕분에 좋은 사회 복지사가 되고 싶은 마음도 생겼어요, 함께 일하는 공무원들도 우리를 파트너로 인정해주는 것도 좋았어요. 

 

Q: 이 일을 계속하게 하는 에너지는 어디서 얻었나요? 

A: 제가 처음 사회복지 일을 시작해 힘들어할 때 상담 공부를 하고 있던 딸이 

“처음 하는 일이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엄마가 자신 없어 하는 모습을 처음 봐요. 하지만 엄마가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고 공부하고 이겨내었으면 좋겠어요.”

라고 했어요. 그 말에 힘을 얻었어요. 그리고 교회에서 성가대를 하면서 찬양 속에서 힘을 얻었어요. 저는 초4 때부터 합창단이었고 중고등학교 때도 합창단이었어요. 화음이 주는 매력이 너무 좋아요. 

 

Q: 사회복지 일이 직업인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A: ‘내가 선한 의지를 실천하는 일을 하는데 돈까지 준다’라는 생각을 해요. 

 

정년퇴직 후 다시 희망 복지지원팀에서- 그들이 김은미를 잊고 자립하기를 

 

Q: 용산구청 희망 복지지원팀 일은 어떻게 하게 되었나요? 

A: 정년퇴직후에 용산구청에서 희망 복지 일을 할 사람을 모집하기에 지원했어요. 나이 때문에 될까 했는데 노원구청에서 일한 경력을 높이 평가해서 뽑아주었어요. 이 부서에서 젊은 사람을 뽑으려고 했는데 제가 면접이나 경험이 워낙 월등해서 안 뽑을 수가 없었대요(웃음). 저는 다시 일을 할 수 있어 행복해요.

 

Q: 희망 복지지원팀에서 일하면서 기억에 남는 사례자들이 많겠네요?

A: 보육원에서 도망 나와 60세가 넘도록 평생 주민등록증 없이 살던 분에게 주민등록증을 만들어준 일이 기억에 남아요, 

또 아무것도 하기 싫어하는 무기력 자들은 병에 걸려도 병원에도 잘 안 가려고 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조차 잘 몰라요. 이분들에게 국민기초생활보장을 위한 지원과 병원 치료부터 경제, 안정, 고용, 법률, 생활환경, 사회적 관계 확장 등을 도와줍니다. 이분들이 위기를 해소하고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될 때는 제가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Q: 그분들이 도움을 받도록 하려면 어려움이 많겠어요?

A: 이 일을 위해서는 상담기술이 필요해요. 단순히 행정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상담을 통해 당사자의 욕구를 찾아내고, 당사자들의 강점을 알게 하고 주변에서 그를 도울 수 있는 자원들을 찾아내게 하지요. 복지사들은 역량 강화를 위해 전문가들로부터 사회복지 관점이론, 상담기술, 정신건강 이해와 실천, 사례분석을 통한 방향 찾기 등 다양한 내용을 정기적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민·관의 복지기관들과 협력하여 돕는 것도 소중한 일입니다.

 

Q: 사회 복지사로서 꼭 지키려고 하는 자세가 있으신가요?

A: 나에게 주어진 대상자 한명 한명이 나에게는 하나님이죠. 잘 돕고 싶어요. 전문가답게 설득하려 하지 않고 전달하려고 해요, 그렇지 않으면 실천하지 않거든요. 저는 이용자가 자기 인식을 가지고 낙인감 없이 자립과 성장을 이루도록 돕는 지지자, 중재자 입장에 서요. 해결사가 아니라. 당사자와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고 자신이 가진 자원을 알아채고 변화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돕는 것이지요. 상담할 때도 방문목적을 말하고 도움을 줄 방법과 수단에 대해 합의를 합니다. 당사자의 눈높이와 속도를 따라 기다려 주는 것이 중요해요.

또 복지는 인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개인 정보보호에 신경을 써요. 치료사한테 갈 때도 공개할 정보에 대해서 당사자에게 반드시 허락받아요. 

다른 기관들과 연결해서 일할 때 그 사람을 돕기 위해서라면 욕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중심은 항상 ‘당사자에게 이로운가? 잘 돕고 있는가?’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해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김은미를 잊고 지역사회 일원으로 안정되게 생활하기를 바랍니다.

 

Q: 공무원이나 관청과 손잡고 일한다고 하면 왠지 제약이 많고 답답하지 않겠냐는 선입견이 있는데요 실제로 일해보니 어떠셨나요? 

A: 우선 좋은 점은 관청이 예전처럼 권위적이지 않고 민간이 잘하는 것들을 수용해요. 공무원들이 우리를 파트너로 여기며 힘을 실어줬다고 할 수 있죠. 오히려 관의 행정력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아요. 희망 복지팀의 예산은 부족하지요. 하지만 돈보다 더 중요한 건 지역자원이에요. 적십자, 규모가 큰 재단, 시민사회단체 같은 공식적인 후원기관과 이모, 숙모 등 이용자들의 인맥과 교회, 자원봉사자 같은 비공식적인 자원은 공식적인 자원보다 더 유익할 때가 많아요.

아쉬운 점이라면 공무원들은 예산이나 일의 변화 즉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려고 하면 일이 늘어나니 싫어하는 기색이 보일 때도 있어요. (우리가 피동적일 때도 있지요) 그러면 대안으로 익숙한 우리가 자청해서 일하기도 했어요. 왜냐면 이용자를 더 잘 돕는 방안이니까 능동적으로 대처하지요. 그리고 공무원은 순환보직이라 담당자가 자주 바뀌어요. 함께 손발을 맞추었다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그런 점이 아쉽지요. 모든 공무원이 그런 것은 아니고 아주 창의적인 공무원도 만나 보았고, 갑질하는 공무원도 있긴 한가 봐요. 관청마다 차이는 있는 것 같아요. 

 

Q: 사회 복지사로서 우리나라 사회복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A: 지금은 자원이 한정적이니까 취약계층에게만 복지가 제공되지만, 이것이 보편적인 서비스로 가야 해요. 아직 선별적인 돌봄 받아야 할 대상들이 많긴 하지만, 경계에 있는 사람에게는 어려워진 후에 돕는 것보다 예방적인 복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저소득층을 위한 지역아동센터에서 소득과 관계없이 초등생을 돌보는 키움 센터가 확대되어야 하지요. 아동이든 성인이든 구성원들의 욕구를 잘 파악하여 예방적인 서비스를 지원한다면 취약계층이 줄어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청·장년의 좌절감에 대하여서 일자리, 주거, 건강지원을 통한 일상생활 유지를 위한 보편적인 서비스 지원이 더 간절합니다. 이 계층이 건강하여야 아동, 노년들의 행복도 보장되지요.

 

Q: 복지사에 대한 복지는 어떤가요? 

A: 대부분 복지사는 일을 잘하려다 보니 지쳐 있어요, 에너지가 고갈되지 않도록 그들을 위한 복지가 보장되어야 해요.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우리끼리 방법을 정했어요. ‘뭣이 중한디? 우리 건강이 최고다. 우리를 살피면서 해야 한다. 제일 먼저 서로 위로하고 비난하거나 상처를 주지 말자. 웃으면서 말하자, 밥을 같이 먹자 문제 해결을 위해서 강점을 보자‘라고. 복지사들이 인격 존중을 받고 생활이 안정돼야 하는데 급여 인상이 없는 점은 아쉬움이 있어요. 기관에서 복지사들의 힐링에 필요한 다양한 복지와 더 공부 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문성과 균형감 있는 성장과 건강이 보장되어서 이용자를 더 잘 도울 수 있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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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언제 가장 힘들다고 느끼나요? 

A: 현장에서 일이 잘 안 됐을 때, 혹은 내가 잘못 도왔다고 낙심하며 지쳐서 사무실에 돌아왔는데, 동료로부터 지지나 따뜻한 위로나 공감을 받지 못하면 되게 힘들어요. 그래서 우리도 상담도 받고 어려운 사례 해결을 위한 전문가의 도움도 받고, 힐링의 시간을 지원받기도 해요.

 

Q: 힘이 날 때는 언제인가요? 

A: 우리가 이용자가 원하는 욕구를 다 못 해줄 때도 있어요. 그런데 

“선생님 그거 못 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애를 쓰는 그 모습이 나는 이미 좋았어요.”

라고 말해요. 그러니까 목표를 정상치까지 두지 않고, 지금보다 조금만이라도 달라지는 것에 목표를 두고 서로 확인하여 이용자가 삶의 주체로 변화를 시도할 때 보람을 느끼고 힘이 나지요.

 

장래 희망은 사랑방

 

Q: 장래 희망은 무엇인가요? 

A: 저는 노년에는 뜰이 있는 집에 꽃을 키우면서 살고 싶어요, 사랑방 같은 공간을 가지고 몸과 마음이 지친 사람들에게 된장국이라도 끓여 같이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어요. 앞으로는 자식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노인들이 없잖아요. 노인 단독가구들이 많아질 텐데 말벗이나 생활을 도울 수 있는 보편적인 복지가 필요하잖아요. 우리가 노인이 되면 우리끼리 잘 놀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남녀노소가 어울려 서로 돕는 작은 생활 공동체이면서 개별 독립생활이 보장되는 예쁜 마을을 소원해 봅니다. (향린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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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미 조합원을 만나 그가 생각하는 복지나 그동안 겪은 사례들에 관해 이야기를 들었는데 지면 관계로 여기에 세세하게 다 싣지 못하는 것이 아쉽습니다. 김은미 조합원은 저를 배웅해주고 야근을 하러 구청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해가 다 저물어 캄캄한데도 구청 정원의 배추는 여전히 탐스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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