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카메오 - 영화에서 튀어나온 그림 이야기
16. <패터슨> 예술과 아마추어리즘
아마추어 또는 아마추어리즘이란 말은 아주 단순한 뜻이지만 실재 이 말이 사용되는 방식이나 환경에 따라 매우 상이한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기자나 의사나 변호사 등에 ‘아마추어’라는 말을 쓰면 그것은 비난이나 비판의 말이 된다. 그것은 자신의 일에 요구되는 전문성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스포츠나 바둑을 즐기는 사람에게 아마추어라고 한다면 그것은 돈을 벌기 위해 직업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취미로 즐기는 사람이란 뜻을 가지게 된다. 여기에는 비판의 뜻이 없고 때로는 ‘순수성’에 방점이 찍혀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그럼 예술에 있어서 아마추어리즘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현대예술 이전에는 당연히 부정적인 의미, 즉 필요한 기능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한 어설픈 상태를 의미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현대예술에 이르면 프로페셔널리즘이 빠져들기 쉬운 엘리티즘이나 스노비즘에 대항하면서 기존의 관습성에 미묘한 파열과 파장을 일으키는 또 다른 예술적 효과를 말하기도 한다.
짐 자무쉬 감독의 2016년 영화 <패터슨>의 마지막 장면에는 마치 <매트릭스>의 ‘오라클’ 같이 세상살이에 도통한 사람 같은 일본인이 등장하는데 그가 주인공 패터슨(‘패터슨’은 영화 제목이며, 영화의 배경이 되는 미국 뉴저지의 작은 도시 이름이며, 영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시인 윌리엄 카를로 윌리엄스의 시집 제목이며,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카일로 렌의 역할을 맡아 갑자기 유명세를 타게 된 배우 아담 드라이버가 연기한 주인공의 이름이다.)과 나누는 대사에서 프랑스의 화가 장 뒤뷔페와 미국의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가 호출된다.
화가 장 뒤뷔페와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는 ‘아마추어리즘’이라는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해주기 때문이다. 이들은 두 가지 측면에서 아마추어이다. 즉 그림 그리기와 시 쓰기를 전문적인 직업으로 하지 않았거나 또는 뒤늦게야 직업적으로 시작했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장 뒤뷔페는 제대로 된 미술 교육을 거의 받지 않고 나이 40세가 넘어서야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윌리엄스는 평생 의사로 직업 생활을 하면서 시간을 쪼개어 시를 계속 써왔다. 또한 이들은 작품세계 자체가 아마추어리즘에 맞닿아 있다. 뒤뷔페는 아마추어 화가들의 작품이나 어린아이, 정신병자 같은 사회적 약자들의 작품에 매료되어, 자신의 작품세계를 거칠고 조야한 미술이라는 뜻의 ‘아르 브뤼’라고 칭하였다. 그는 “추하다고 여겨지는 것들도 사람들이 흔히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들만큼이나 아름답다.”고 말했다. 윌리엄스는 과장된 상징주의를 배제하고 평면적 관찰을 기본으로 한 ‘객관주의’ 시를 표방하면서 쉽고 단순한 일상적인 언어들로 시를 썼다.
뒤뷔페의 그림과 윌리엄스의 시 한 편을 보자.
읽어봐요(1934년) -윌리엄 카를로 윌리엄스
내가 먹어 버렸어
그 자두
아이스박스
속에 있던 것
아마 당신이
아침에 먹으려고
남겨 둔
것이었을 텐데
미안해
하지만 맛있었어
얼마나 달고
시원하던지
This Is Just To Say
I have eaten
the plums
that were in
the icebox
and which
you were probably
saving
for breakfast
Forgive me
they were delicious
so sweet
and so cold
우리가 기대하는 예술과는 꽤나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본다면 어린아이의 낙서장 또는 아이스박스에 써놓은 남편의 포스트잇 메모 정도로 보인다. 이들의 예술이 오늘날 높은 평가를 받게 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이 글의 한계도 목적도 뛰어넘는다. 단지 그들 예술 세계의 중심에 ‘아마추어리즘’이 스며있다는 사실 하나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짐 자무쉬 감독이 이 영화 <패터슨>을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짐 자무쉬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은 영화에서 아마추어라고 스스로 말하기도 했다.)
단언컨대 영화 <패터슨>은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가장 진지한 형태로 물어보는 영화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을 ‘아마추어리즘’이라는 키워드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물론 모름지기 모든 예술은 비범함과 탁월함, 고도의 전문성, 그리고 일상에서는 쉽게 돋아나지 않는 창의성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패터슨은 그 반대 방향에서 예술에 접근해 들어간다. 평범함과 일상성, “일상 그 자체를 평범하게 접근하는 것”이 그것이다.
영화 <패터슨>은 한 버스운전사 노동자의 일주일 동안의 반복적인 삶을 보여준다. 주인공 패터슨은 잠시 버스를 대기하는 시간에, 운전하는 동안에, 혼자서 점심을 먹는 시간에,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지하의 작은 작업실(창고의 한 부분에 책상과 의자 하나를 겨우 들여다 놓고 50권 정도의 책들이 꽂혀 있는 패터슨의 서재는 얼마나 소중하게 느껴지던지……)에서 시를 쓰고 구상한다. 시로 숨을 쉬는 것처럼. 영화에 첫 번째로 나오는 시는 사실 너무 엉뚱해서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를 하나도 가지지 않고 보았을 때는 어떤 ‘모지리’에 대한 이야기처럼 느껴질 지도 모른다.
우리 집엔 성냥이 많다
항상 손이 닿는 곳에 있다
우리가 좋아하는 성냥은 오하이오 블루 팁이다
하지만 전에 좋아했던 성냥은 다이아몬드다
그건 우리가 오하이오 블루팁을 발견하기 전이었다
(……)
이렇게 시작하는 시를 영화는 앞부분에서 무려 5번이나 반복해서 읊는다. 그러나 영화를 모두 보고나면 시를 잘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이 노동자가 지은 시들이 범상치 않은 것임을 느끼게 된다. 실제로 영화에 등장하는 패터슨의 시들은 일상적인 언어로 시를 쓰는 미국의 시인 론 패지트(Ron Padgett)의 시들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2010)에서 주인공(윤정희 역)에게 시가 삶의 고통을 일거에 토해내며 그것에게서 벗어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면, 패터슨의 시는 반복되는 삶의 일상성 속에 가두어진 노동자의 삶 가운데로 파고드는 삶의 효소와도 같은 것이다. 여기까지다. 이 글에서 시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이 글은 그림에 대한 것이니 이제 그림으로 넘어가자.
이상하리만큼 사람들은 영화 <패터슨>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로라의 미술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웬만한 영화평론을 다 섭렵했건만 로라의 미술에 대한 언급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혹여 언급하더라도 로라는 그림을 그린다, 노래를 한다, 빵가게를 차린다 등과 같이 늘 꿈에 사로잡혀 사는 인물로 현실에 밀착된 주인공 패터슨의 삶과 대비시키곤 한다. 영화의 말미에 장 뒤뷔페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반려견 ‘마빈’을 그린 로라의 그림들이 언뜻 뒤뷔페의 화필을 느끼게 하는데도 말이다.
패터슨이 일하는 동안 로라는 하루 종일 집에서 그림을 그린다. 아니 그림이라기보다 인테리어 디자인, 또는 옷 디자인, 또는 케이크 디자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집안을 온통 검정색과 흰색의 문양으로 만든다. 옷도 그렇고, 커튼도 그렇고, 케이크도 그렇고, 기타도 그렇고, 사소한 소품까지도 그렇다. 영화 속에서는 전혀 설명이 나오지 않지만 로라는 미술을 전공했던 것임에 틀림 없다. 그녀가 그린 것이 분명한 다섯 작품이 액자에 끼워져 집안 벽에 등장하며 그중 반려견 마빈을 그린 두 작품은 클로즈업 되어 나온다.
이러한 로라의 삶과 작품을 통해 짐 자무시 감독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영화에서는 패터슨이 운전을 하는 동안 집에서 붓질하는 로라의 모습이 종종 오버랩된다. 이것이 팔자 좋게 집에서 온갖 취미생활에 여념이 없는 여성의 삶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 터이다. 이것은 일종의 대위법이다. 패터슨의 시와 로라의 그림은 음악의 대위법처럼 얽혀서 나간다. 만약 패터슨에게 시가 없었다면 그 반복되는 일상성은 얼마나 따분할까? 만약 로라에게 그림그리기가 없었다면 그 지루한 가사일은 얼마나 숨이 막힐까? 영화는 ‘아마추어리즘’에서 시작해서 ‘일상성’의 문제로 파고든다. 일상성을 부정적인 의미로 본다면 무엇인가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 존재함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주인공 패터슨이 ‘쌍둥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에 도처에 쌍둥이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이치와 같다. 일상성 속에는 이러한 수많은 특별한 것이 숨죽이고 있다. 영화는 우리에게 도전한다. 위에서 인용한 시인 윌리엄스의 자두처럼 깨어있는 일상성을 회복하라고.
사실 이 영화는 위에서 언급한 것이 전부는 아니다. 영화는 미국 노동운동사의 가장 중요한 파업투쟁인 1913년 패터슨 견직물노동자 파업의 현장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주인공 패터슨이 출퇴근하는 길의 빨간 벽돌 건물이 그것이다. 짐 자무쉬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버스운전사’라는 말 대신에 ‘노동계급 버스운전사’라고 꼭꼭 표현한다. 그는 ‘일상성’이라는 철학적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노동자의 일상성’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예술에 있어서의 아마추어리즘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깨어있는 일상성’으로 회복되기를 바라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