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카메오 - 영화에서 튀어나온 그림 이야기
15. <작가미상> 자유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을까?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는 그것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생명 창조에 대한 신비를 벗긴 1953년 4월 영국 과학잡지 <네이처>에 실린 왓슨과 크릭의 한 쪽짜리 짧은 논문을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힘들다. 아무리 교양 있는 사람일지라도 DNA가 두 가닥의 핵산이 서로 꼬여있는 나선형 사다리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읽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 턱이 없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몇 단계의 통역사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한쪽짜리 논문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투덜거리지는 않는다.
본래부터 과학적 지식이 일반인의 이해를 완전히 벗어나 있던 것은 아니었다. 지동설을 밝힌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1543)나 만유인력의 법칙을 설명한 뉴턴의 <프린키피아>(1687)는 과학자가 아닌 당대의 지식인들도 읽을 수가 있었다. 고맙게도 뉴턴은 이 책에서 미적분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당시의 사람들의 이해력을 고려해서라고 한다. 이는 마치 렘브란트나 루벤스를 당대의 미술애호가들이 충분히 이해하고 그 가치를 분별해낼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하니 오늘날의 교양 있는 지식인이라 하더라도 아일랜드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이나 이탈리아의 미술가 루치오 폰타나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고, 백남준과 그 친구들의 이상스런 행동들에는 그저 혀를 내두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미술전문가가 아닌 다음에야 이러한 현대미술을 몇 단계의 적절한 통역사 없이 이해할 수 없을 터이다.
그러나 미(美)나 미학이 아무리 찢겨지고, 뒤집어지고, 해체되어 있는 현대미술이라 하더라도 종종 인간, 삶, 자연, 고통, 자유 등 보편적인 개념으로 통하는 ‘비밀의 문’이 하나씩 열려 있는 경우가 있어서 간혹 놀라운 공감이나 충격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해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독일의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감독의 2018년 영화 <작가미상>은 그러한 비밀의 문을 통해 생존해 있는 독일의 대표적인 현대미술가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의 초기 작품으로 우리를 이끌어 준다.
나치 정권이 기획한 <퇴폐 예술 전시회>에 전시된 20세기 초의 현대 미술 작품들
3시간 9분에 달하는 이 영화의 러닝타임에서 우리는 20세기 초반기 독일어권 현대미술의 대표작들을 풍요롭게 만난 수 있다. 많이 알려진 칸딘스키, 몬드리안, 폴 클레를 비롯해서 미술애호가라면 대략 접했을 만한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 마르크(Franz Marc), 딕스(Otto Dix), 그로스(George Grosz), 베크만(Max Beckmann), 놀데(Emil Nolde) 등의 그림들이 화면을 장식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그림들은 영화의 도입 장면에서 독일의 나치 정권이 현대미술을 조롱하고 탄압하기 위해 1937년부터 순회전시를 한 ‘퇴폐 예술 전시회(Entartete Kunst)’를 통해서 이다. 3분 40초에 달하는 이 첫 장면에서 미술관 도슨트는 현대미술에 대한 나치의 시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또한 이것은 현대미술을 접하는 영화의 관객에게 던져주는 첫 번째 도전이다.
“현대 미술. 예, 그렇습니다. 국가사회주의 정권이 서기 전까지 독일에 ‘현대 미술’이란 것이 있었고, 그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해마다 종류가 달라졌습니다. 국가사회주의는 독일 미술로 돌아가길 원하며 그 미술은 민족의 창조적 가치로서 영원한 가치에 기반을 둬야 합니다. 우리 민족의 영원한 가치를 대변하지 못하면 현재에도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독일 여성들은 조롱당하고 창녀로 묘사되었습니다. 군인들은 살인자 또는 무차별 학살의 희생자로 그리죠. 군인의 용기를 존경하는 마음의 싹을 자르려는 온갖 시도가 자행됩니다. 광기와 정신병이 의미를 규정하는 원칙으로까지 격상되었죠. 동포를 타락하고 쓸모없는 이로 보고 들판을 파란색으로 하늘을 녹색으로 구름을 유황색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고요? 소위 이 ‘예술가’라는 사람들은 정말 그렇게 보기 때문에 자신들이 묘사하는 대로 믿는 겁니다. 그들 시력이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인지 유전병 때문인지 반드시 밝혀야 합니다. 전자라면 안타깝지만 개인의 불행이고 후자라면 제국 내무부에 보고하여 그런 끔찍한 시각적인 질병이 후대로 전해지지 않게 막아야 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들이 묘사하는 현실을 믿는 게 아니라 다른 동기가 있을 수도 있죠. 허튼 짓으로 나라를 좀먹으려는 겁니다. 이 경우 그런 일탈 행위는 범죄에 해당합니다. 그게 예술과 무슨 관계입니까? 어떻게 정신을 고양시키고 예술적 능력을 보여 주죠? 예술을 하려면 예술가여야 합니다. 칸딘스키의 이 그림을 얼마에 샀는지 아세요? 2천 마르크입니다. 독일 노동자의 1년 급여보다 많죠. 독일 노동 인구 세금에서 나간 2천 마르크입니다.”
주인공 리히터(영화에서는 리히터 본인의 요구에 의해 이름을 바꾸어 ‘쿠르트’로 나온다)는 어린 시절 이모의 손을 잡고 이 전시회를 구경한다. 우리는 나치의 인종주의적인 시각 때문에 현대미술에 대한 이러한 도전은 쉽게 물리칠 수가 있다. 그런데 영화에는 이 나치 도슨트의 현대미술에 대한 해설 이외에도 두 번에 걸쳐 제법 긴 ‘미술이란 무엇인가? 현대미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강의가 나온다. 주인공 리히터가 접하는 두 번째 강의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동독을 장악한 사회주의가 미술대학에서 가르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시각이다.
“허영심을 버리고 대의를 위해 자기를 바친 예술가의 모습이 보입니까? 인민을 위해서 말입니다. 태도에 공을 들이세요. 손길에 공을 들이세요. 그러면 올바른 예술이 흘러나옵니다. 본받지 말아야 할 예로 파블로 피카소를 보죠. 그의 강렬한 (초기의) 현실주의 그림은 노동계급과의 진정한 연대를 보여 주었죠. 그러나 그는 이내 퇴폐적이고 외설적인 형식주의에 빠졌습니다. 왜 일까요? 전통주의자가 아닌 혁신가로 보이길 원했죠. 혁신, 창조적 독립, 예술적 자유…… 예술가에게 처음엔 솔깃한 말이죠. ‘나, 나, 나’ 그러나 현대 예술가가 진정한 자유를 얻으려면 인민의 이익에 도움이 돼야 합니다. ‘나, 나, 나’의 태도는 불행으로 이끕니다. 기껏해야 퇴폐적이고 부유한 수집가의 돈이나 받겠죠. 노동자를 착취하며 자긴 그들과 다르고 예술 취향도 다르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자들. 타락, 신비주의, 포르노그래피, 형식을 위한 형식, 인위적 구조, 반점, 선, 구, 뿔. 혁신가로 인정받기 위해 이런 걸 동원해요? 네, 새롭긴 하죠. 하지만 잘못된 겁니다. 또한 헛되고 어리석고 비민주적이고 타락했죠.”
주인공 리히터는 워낙 솜씨가 탁월한지라 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작품도 이내 인정받아 거대한 벽화들을 그리게 된다. 한마디로 출세가도가 열린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거부하고 베를린을 가르는 장벽이 세워지기 직전에 서독으로 탈출한다. 거기서 그는 현대미술의 중심지인 뒤셀도르프 예술학교를 다니게 된다. 뒤셀도르프 예술학교는 1950년대 말부터 1970년대 말까지 전성기를 이루었던 곳으로 영화에서 교수로 나오는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영화의 주인공인 리히터(Gerhard Richter), 영화에서 조연으로 나오는 귄터 우에커(Günther Uecker) 등이 활동하였으며, 플렉서스 멤버였던 백남준이 교수로 재직하며 활발히 활동한 곳이다. 여기서 주인공은 현대미술에 대한 요셉 보이스의 강의를 듣는다.
“SPD(독일사회민주당)? CDU(독일기독교민주연합)? 어느 당을 찍겠나? 아무도 뽑지 마. 다시는 정당에 투표하지 말고 예술에 투표하도록.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해. 오직 예술에서만 자유는 환상이 아니야. 나치의 재앙 이후 예술가만이 사람들에게 자유의 감각을 돌려 줄 수 있어. 사람은 누구나 청소원이든 농부든 예술가가 될 가능성이 있어. 외부의 가르침 없이 자기의 능력을 개발한다면… 너희가 자유롭지 않다면,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면,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스스로 자유로워짐으로써 너희는 세상을 구한다. 너희는 사제이다. 너희는 혁명가이고 해방가이다. 번제 제물을 만들어라.”
이 세 번째 강의에 공감할 수가 있는가? 나치나 사회주의의 현대미술 강의는 공감할 수는 없어도 쉽게 이해할 수는 있다. 뒤셀도르프 강의실에서 펼쳐지는 현대미술에 대한 이야기는 선뜻 파악하기조차 힘들어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미술에 대한 세 번째 도전에 직면한다. “작품이 훌륭한 지에 대한 판단은 자기 자신만이 할 수가 있다”면서 제자들의 작품을 보지 않는 요셉 보이스. “스스로 자유로워짐으로써 세상을 구하라”는 그의 행동주의. 개인에 대한 속박을 견디지 못해 뒤셀도르프에 온 주인공 리히터는 이제 자기 자신 앞에 펼쳐진 ‘자유’ 앞에서 좌절한다.
작가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강박이 또 하나의 사슬로 그를 옥죈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고, 아무도 견제하지 않고, 아무도 방향을 제시해주지 않는 순수한 자유는 텅 빈 공허한 캔버스로 남겨진다. 많은 고심과 실패 끝에 리히터가 발견해낸 것은 아니 리히터에게 새로운 영감을 준 것은 스냅 사진이었다. 사실 회화는 19세기 후반 인상주의 때부터 사진과의 대화이거나 사진과의 대결이라는 측면을 가지고 온갖 유파로 분화되어 나갔다. 그러니 사진을 다시 회화에 끌어온 것이 특별히 새로운 것이 아닐 것이다. 여기에 리히터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리히터의 블러(흐리기)’라고 불리는 것이다. 사진을 고스란히 화폭에 옮긴 다음 마르기 전에 표면을 쓸어내는 기법이다. 영화 속에서 1966년 리히터의 첫 번째 개인전을 취재한 TV 리포터는 다음과 같이 리히터의 작품을 설명한다.
“임의로 고른 잡지 사진과 자동 사진기의 여권 사진, 가족 앨범의 순간 촬영 사진이 그림으로 재현됐습니다. 흐릿하게. 설명할 수 없는 진정한 힘이 있는 이 그림들로 쿠르트(리히터의 영화 속 이름)는 동 세대 화가 중 앞서가는 것 같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회화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 세대가 그렇듯이 그도 할 얘기가 없습니다. 예술적 전통과 작별하고 예술에 대한 자전적 접근과도 결별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미술사상 처음으로 작가 미상(작가 없는 작품)의 작품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영화의 제목인 ‘작가 미상’이라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이 번역은 매우 아쉽다. ‘작가 미상’이라는 말은 보통 작가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았을 때 쓰는 말이다. 독일어 원제목인 <Werk ohne Autor>는 ‘작가 없는 작품’이란 뜻으로 예술 작품 속에 항상 흔적을 남기게 마련인 ‘예술에 대한 자전적 접근’을 거부한 것을 의미한다. 리히터는 실재로 첫 번째 개인전에 등장하는 많은 ‘자전적’ 사진들에 대해 어떠한 설명도 남기지 않았다. 당시 리히터는 이러한 메모를 남겼다. “나는 어떤 목표도, 어떤 체계도, 어떤 경향도 추구하지 않는다. 나는 어떤 강령도, 어떤 양식도, 어떤 방향도 갖고 있지 않다. (……) 나는 끝없는 불확실성을 좋아한다.”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등장하는 작품인 ‘어린 리히터를 안고 있는 이모’의 모습은 본래 <어머니와 아이>라는 제목이 붙여졌다. 이는 리히터가 자신의 작품과 자신의 개인적 삶의 관련성을 애매하게 만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는 ‘스릴러’로 분류되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이렇게 리히터 자신이 지워버린 ‘자전적’ 요소를 영화가 추적하여 다시 들추어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히터의 첫 번째 개인전에 등장하는 많은 ‘자전적’ 요소를 추적해낸 것은 영화감독 도너스마르크가 아니라 독일의 탐사기자로 유명한 유르겐 슈라이버의 2002년에 발표된 탐사보도였다. 여기서 리히터의 이모가 조현병을 이유로 나치에 의해 강제로 불임수술을 받은 후 가스실에서 살해되었고, 리히터의 장인은 나치 SS의 고위급 의사로 900명 이상의 여성에 불임수술을 자행했던 전범이라는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영화의 메인 스토리는 바로 이러한 탐사 보도에 기초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감독은 이 스토리를 기반으로 ‘리히터의 흐리기’ 기법을 젊은 나이에 살해된 이모가 남긴 한마디 “절대 눈 돌리지 마. 진실한 것은 모두 아름다워”와 교묘하게 연결시킴으로써 우리를 리히터 초기 작품을 이해하는 ‘비밀의 문’으로 인도하였다. 보고 싶지 않지만 눈을 돌리지 말아야할 때, 기억하고 싶지만 그저 아련함으로 남아 있을 때 두 눈은 초점을 흐려서 대상을 포착한다는 말이 되겠다. 하지만 이러한 단순한 해석에 대해 리히터가 동의했을 것 같지는 않다. 리히터는 오늘날 독일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1960년대 이후 세계현대미술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가로 사진과 회화, 추상과 구상, 그리고 채색화와 단색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회화라는 매체를 재해석하고 그 영역을 확장시켰다. 영화가 만들어 놓은 ‘비밀의 문’은 리히터의 초기 작품에 슬쩍 맞닿아 있을 뿐이다. 실재로 리히터는 이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에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탐탁해하지도 않았다. 그는 이 영화를 보지도 않았을 뿐더러 시나리오를 확인한 후에는 스릴러 같다면서 거리감을 두려고 했다. 그는 감독에게 영화에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작품이 나오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후에는 영화가 자신의 삶을 왜곡했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뭐가 중하리.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현대미술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우리의 삶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어슴푸레 이해할 수가 있게 되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리히터가 자신의 작품이 영화에 등장하지 말아야 한다는 요구를 함으로 인해 우리는 리히터의 본래 작품과 영화에 등장하는 작품의 차이를 비교해보는 재미도 만끽해볼 수가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