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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반골 - 이영욱

posted Dec 0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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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욱 님. 그가 다니는 섬돌향린에서는 10대 교우들도 1939년생인 그를 그렇게 부른다.10대 교우들에게 그는 존대한다. 어떤 이는 '항상 겸손하시고 나이 많음을 내세우지 않고 세대 차를 넘어서 기꺼이 교우들과 잘 어울리시는 그의 모습을 배우고 싶다'고 한다. 또 누구는 '8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정의와 평화를 위한 투쟁현장에 빠짐없이 함께 하는 그를 닮고 싶다' 한다. 그를 아는 많은 조합원들은 '존경할 만 한 분'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 이유를 물으면  '이명박 정권, 박근혜 정권 하에서 그처럼 열심히, 진심으로 사회정의와 평화를 위한 투쟁현장을 찾은 사람은 보기 드물다'는 것이다.

 4대강 삽질 반대를 위한 두물머리 철야금식, 재능교육교사를 위한 투쟁, 명동 마리 철거저지, 광우병 쇠고기 반대, 강정 해군기지 건설반대, 쌍용투쟁, 사드 반대, 용산 학살 규탄,순화동 철거 보상투쟁, 한진중공업 고공농성 현장투쟁, 직선제 쟁취투쟁, 싸인투쟁  세월호 진상규명, 촛불집회...그가 함께 했던 투쟁현장을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다.



이영욱사진3_축소.jpg

 

 

 그런데 그를 닮고 싶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이영욱 조합원은 어떤 계기로 그렇게 투쟁현장을 찾으시는 걸까요?' 라고 물으면  그 대답은 왠지 시원하지 않다. 

 “초등학교 교감 선생님으로 정년퇴임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아마 전교조도 하셨겠죠...”
 “순복음교회를 다니시다가 향린교회로 오신 다음부터~~ ”

 80세를 바라보는 나이, 언제나 사회정의와 평화를 위한 투쟁의 현장에 서 있는 이영욱 조합원. 그의 신념과 열정의 근원은 무엇인지 탐색하려 한다.  

 


- 수많은 투쟁현장에 함께 하셨습니다. 가장 잊지 못할 투쟁의 현장을 꼽으라면 어디일까요?
 개인적으로는 4대강 삽질 반대를 위한 두물머리 철야단식 기도투쟁이 아닐까 합니다. 두물머리 오두막집이 있는데 그 옥상에 텐트를 치고 돌아가면서 24시간 금식하고 밤새도록 기도하는 투쟁이었습니다. 저는 그 투쟁에 3번을 참여했는데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자연에 대한 감사함과 기쁨이 느껴졌고 강에 대한 사랑, 애정, 농사짓는 사람들의 삶, 유기농 단지를 뭉개버리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농사짓는 분들의 삶과 그 마음.... 그 때까지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10 지난해는 거의 광화문으로 출근하셨을 것 같습니다.
 거의 ~~ 많이 나왔습니다. 촛불혁명 때는 개근했습니다.

- 개근상을 받으셔야할 것 같은데...
 하늘로부터 받으면 되는 거죠

- 하루쯤은 쉬고 싶다는 생각도 드셨을 것 같은데요. 
  몸이 아플 때는 한번 정도 쉬고 싶었는데 한번이라도 빠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성이니까요
 

- 촛불혁명~ 그 현장에 함께 하시면서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면 언제일까요?
 아무래도 헌재 판결 순간이겠지요. 모두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던 그 순간은 영원히 잊을 수 없겠지요.

 


이영욱사진4_축소.jpg

 

 

- 사회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
 1959년 초등학교 교사로 임용되어 1960년에서 61년까지 군 생활 1년을 제외하고 1999년 61세에 퇴임하기까지 40여년 교직에 있었습니다.

- 5.16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군에 계셨네요?
 배구선수로 차출되어 군에서 배구만 했기 때문에 5.16 쿠데타 당시 군 분위기는 사실 알지 못하구요, 다만 그해 6월 20일 제대했는데 혁명공약을 외지 못하면 제대를 시키지 않는다고 해서 외웠던 기억이 납니다. '반공을 국시로 한다' '준비가 되면 즉각 민정이양을 한다' '구악을 일소하고 ~~' 등등

- 학교에서 어떤 선생님이셨을까 궁금합니다. 
 아이들에게는 자율성을 키워주려 하는 선생님이었고 교직원으로부터는 사시안의 못마땅한 시선을 받는 교사였던 것 같습니다.

- 자율성을 심어준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요?
 학교교육현장에서 오래있다 보니 어느 순간 '억누르고 붙잡지만 말고 개방적으로 교육, 민주적인 교육을 하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6학년 정도 되면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고 그럴 기회를 주어야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정규 수업시간 중에 자율시간을 주었습니다. 선생님의 수업을 듣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운동도 좋고 그림을 그려도 좋고 자연관찰을 해도 좋고 무엇이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면 되는 거죠. 물론 규칙은 있었습니다. '1) 1주일에 자율시간을 3시간 선택할 수 있다. 2)학교 울타리 밖은 못나간다. 3)다른 반 수업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4) 수업시간당(1교시 당) 5명 이내만 가능하나데 선착순으로 정한다' 는 것 이았습니다.
     

- 수학시간 같은 경우 신청자들이 몰렸을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그렇죠. 체육시간은 한명도 자율수업 신청을 안했지요. 아이들이 엄청 좋아했습니다. 환경만 주어지면 아이들이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의견을 조정하는 일을 잘 합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토론해서 반 전체가 함께하는 자율시간을 갖고 싶다고 요구해 와서 아이들과 함께 단체자율수업시간에 대한 규칙을 보완하기도 했으니까요.
    

- 부작용은 없었나요?
 다른 반 학생들이 우리도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내버려두는 것은 교육이 아니다 방종이다'라고 생각하셔서 따라 한 반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 교육현장에 계시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 세 가지를 꼽으신다면?
 1) 앨범 투쟁 2) 불평등한 서울시초등교원상조회 해체 3) 최초 학교 단위 교사협의회 발족: 전 교사 가입과 교사 주도의 회의 공식화’ 세 가지를 들 수 있겠습니다.

 


 (전국)교사협의회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의 토대가 되었던 단체이다. 이를 처음 조직했던 이가 이영욱 조합원이었다. 학교 내에 최초로 교사협의회를 만들었고 초등교사협의회 남부지회장으로 일했다. 학교현장에서의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교육현장에서 부조리를 개선하고자 하는 교사 이영욱의 노력은 치밀하고 조직적이고 때로 창조적이며 헌신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앨범투쟁, 어떤 투쟁입니까?
 6학년 담임을 맡았을 때 일입니다. 졸업앨범 만드는데 당시 조달청에서 겉표지와 속지의 종이의 종류부터 분량, 인쇄방식까지 세세하게 지정하고 1권 가격을 3만8천원으로 정해놓아 그대로 따르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저는 거부했습니다. 왜냐하면 조달청의 가격도 결국 앨범업체의 담합가격이라 봤습니다. 경쟁 입찰을 주장했습니다. '다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혼자서 굳이 피곤하게 일을 만들고 따지냐'는  따가운 시선이 많았지만 설득해서 경쟁 입찰을 진행했습니다. 직접 업체들에게  일일이 연락을 다했는데. 서울시내 앨범업자들은 서로 담합한 상태였지만, 그중 5개 업체가 경기도 업체 명의로 응찰했습니다. 최저 입찰가 1만8천원이었습니다. 조달청이 정한 가격보다 2만원이나 싼 가격이지요. 거기에다 8면정도 학급별로 특색 있게 꾸며달라는 조건도 덧붙여 만들었습니다. 또한 6학년 교사회비로 20만원을 기부한다는 업자의 제안에 그 금액 전부를 교육청에 지정기부 하도록 해서 학생들을 위한 카세트를 기부 받았습니다. 
   

 
 아이들과 학부모만 좋은 일이었다. 동료 교직원, 이웃 학교, 업체들 모두에게 불편한 일이었다. 교사 이영욱에게 보내는 시선은 곱지 않았고  학교에서는 6학년 담임을 더 이상 맡기지 않았다고 한다.

 

 
- 불평등한 서울시초등교원상조회 철폐! 어떤 사건이었습니까?
 과거 서울시초등교원상조회라는 조직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교사 개인의 의사도 묻지 않고 강제로 가입되고, 상조회비가 세금처럼 빠져나간다는 것이었고. 더 큰 문제는 20년 이상 교육경력이 있는 사람에게 퇴직금은 주는데 20년이 안된 사람은 거의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이는 교장, 교감 급이고 가장 큰 불이익 보는 이들은 결혼이나 출산으로 퇴직하는 여교사들이었습니다. 은행을 찾아가 이자율과 누진율도 계산해봤는데  은행에 저금보다 못했고 안정성도 없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반대투쟁에 나섰습니다. 강제로 가입하지 않겠다는 젊은 교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상조회가 손을 들었습니다. 년 수대로 퇴직금을 주는 방식으로 바꾸었습니다. 하지만 구조적인 문제, 불합리한 문제는 여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고  다음단계로 탈퇴운동을 전개해서 결국 상조회는 해체되었습니다.
 


 교사로서 그가 끊임없이 해온 크고 작은 투쟁들은 교감승진시험에 합격하고도 14년 동안 교감으로 임용되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이해찬 시절 교사 교장교감들이 나서서  교육계에서 정년단축을 반대하는 시위에 나섰다.  65세 정년을 유지하면 5년을 더 교직에 있을 수 있는데 교사 이영욱은 참여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년을 55세로 낮출 것을 제안했다. 마치 자신의 말을 실천하듯 61세 교직에서 은퇴했다. 40여 년 교육 현장에서 그가 걸어온 길, 그의 개혁, 투쟁과정에서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해관계 때문에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기득권을 온전히 내려놓을 수 있는 그는 진정 아름다운 반골이다.
 

 

IMG_1659_수정_축소.jpg

 


- 돌이켜 볼 때 ‘내 인생에 잘 한 일, 잘 한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꼽으신다면?
 '1)향린교회 출석, 2)간담상조(肝膽相照) 사이라 할 수 있는 좋은 친구를 만남, 3) 노년의 자유배낭여행, 4) 30년 이상 골초에서 해방(1991년12월5일 부터 끽연 휴식 중), 5) 정의평화를 위한기독인연대 회원이 됨' 우선 생각나는 것이 이 다섯 가지 정도네요.



 향린교회 출석을 첫 번째로 꼽았다. 왜 일까? 100세를 바라보는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성경 전권을 필사해서 다섯 형제들에게 선물하셨고 이웃에게도 나눠주신다고 한다. 성경을 필사하시는 어머니의 이야기는 CBS에서 다큐멘터리로 제작 방영되기도 했다. 향린교회를 찾기 전에 그는 여의도 순복음 교회를 다녔었다.

 


- 여의도 순복음 교회를 다니시다가 어떻게 향린교회에 오게 되셨나요?
교회는 65세부터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는 어머니가 빌다시피 하셨어도 교회에 나가기 않았습니다. 아내가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다니는데 은퇴하고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주일에 자동차로 데려다 주고 저는 국회에 가서 혼자서 쉬다가 교회 끝나면 아내와 같이 집에 왔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한번 교회에 들어갔다가 잡힌 거죠. 조용기 목사의 언변이 좋았습니다. 통성기도까지는 안했지만 나도 모르게 아멘, 아멘 하게 되니까요. 한 4년 다녔습니다. 훅 빠져들었었는데 '부자 되게 해 달라, 머리 아픈 사람 머리에 손을 얹으세요, 가슴 아픈 사람 가슴에 손 얹으세요, 머리가 낳으셨습니다. 가슴이 낳으셨습니다. 아멘, 아멘..' 너무 구복신앙, 개인구원으로 가니까 어느 순간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순례했습니다.  그러다가 인터넷에서 6.29 선언 때 호헌철폐 인간띠잇기 기사를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아 향린교회를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 60대 후반, 순복음교회에 다니시다가 향린교회에 오셨을 때 신앙적으로 충돌, 충격이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충돌은 없었고 충격은 있었습니다. 첫째는 목사, 장로의 예배좌석부터가 파격적으로 보였습니다. 목사님과 장로님 좌석이 단 아래에 있어서요. 그리고 처음 들어보는 국악찬송찬양이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조헌정 목사의 ‘하늘뜻펴기’에 감동을 느꼈습니다. 예배 중에 처음 방문한분들 소개하는데 처음에 저는 인사시키는 거 거부했습니다. 조용히 않았다 나오고 점심도 안 먹고.  한 달 반 정도 그렇게 예배드렸습니다. 그러다가 동기동창 친구 양국환 교우를 불러들여 같이 다니다가 등록했습니다. 사회구원, 제도적 개혁의 목소리가 와 닿았습니다.

 


 사회구원 –그의 믿음은 현장 실천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사회정의와 평화를 위한 투쟁의 현장에 함께 하는 것이다. 교육현장에서도 그러했듯이 오늘도 그는 삶의 현장에서 자신이 져야하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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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투쟁현장에 함께 하시는 거, 힘드시지는 않으세요? 
 물론 힘들 때도 있지만 오히려 정신적으로 시원하고 운동도 되고 배우는 점도 많습니다. 특히 향린의 구성원들에게 느낀 점도 많고, 지적으로 높은 분들이 많아서 배우는 점이 많지요. 돌아보면 욕심을 많이 부리고 살았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꼭 이겨야 된다는 욕심, 공덕을 쌓아야하는데 베푸는 것에 소홀했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베풀 것이라고는 심心공덕 뿐이라 더 힘써 해야겠다는 마음을 갖습니다.

- 우리 사회는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풀어야 할 수많은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특히 관심을 갖고 힘쓰시고 있는 변혁의 과제는 무엇인지요?
 사회 구조(제도)와 의식 개혁입니다. 강자에 유리하고 약자에 불리한 여러 구조가 바뀌어야지 개인의 지도력에 의존해서만으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직접 민주주의의 모색과 실천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촛불집회가 바로 아고라입니다. 아고라 광장토론으로 정치문화를 바꾸는 것도 민심의 힘입니다. 그것은 이생망, 이생포의 비젼상실(N포)의 시대를 바꾸어내는 힘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 이 땅을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길 ~ 선생님이 한 가지를 제안하신다면?
 통일 이전에 먼저 한반도의 평화 정착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너무 통일, 통일 하지 말자' 그러면 다들 놀랍니다. 우리의 소원은 당연히 통일인데 통일, 통일 하지 말자니.. .남북이 모두 ’통일을 하자‘고 말하는데, 그 안에는 서로 서로 상대편을 쓰러뜨리거나 어느 한쪽이 쓰러지거나 하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러면 겉으로는 통일을 말하면서 쳇바퀴 돌듯이 충돌만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북, 북남이 화해협력, 상생발전의 길을 찾아야합니다. 통일은 하늘의 뜻(순리)에 맡기고 평화정착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 요즈음 좀 여유로워 지셨나요. 어떠하신지요?
 사드. 적폐, 굴욕적 한일문제, 방산비리, 세월호 진상규명 등등 해결해야할 많은 과제들이 쌓여 있는데..답답한 마음입니다. 특히 세월호가 마음에 걸립니다. 아무것도 규명되지 않았고, 제도적 안정장치도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새로 촛불집회를 계속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적폐청산을 계속 요구해야한다. 세월호 진상규명도 계속 요구해야하고 적폐청산도 계속 요구해야 합니다. 4대강도 복원해야합니다. 개혁이 이루어져야합니다. 그 방해세력을 넘는 것은 결국 민심입니다. 그래서 촛불집회는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아름다운 반골, 행동하는 자유인 이영욱 조합원. 앞으로도 광화문에서 자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그에 대해 다 풀어놓지 못한 이야기들이 많다. 자신의 인생에서 잘 한 일이라고  꼽은 '노년의 자유 배낭여행' '30년 이상 골초에서 해방(1991년12월5일 부터 끽연 휴식 중)',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희망에 관하여' 등등,, 남은 이야기들은 광화문에서 만났을 때 추위를 잊는 담소를 위해 아껴둘까 한다.

 

 

(현장사진 김진철 조합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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