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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조율하는 이 사람, 진국이다 – 문재호

posted Feb 2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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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퇴진과 함께 광장의 촛불은 꺼졌지만, 우리 사회의 어둠을 밝히는 촛불의 불씨를 지켜가는 이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 매주 목요일 저녁, 고난의 현장을 찾아가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촛불교회의 목요기도회다. 문재호 조합원은 촛불교회에서 아주 친근하게 마주하는 얼굴이다. 거의 매주 출석한다.

"오늘도 고공농성 중인 노동자들이 있잖아요. 아무리 사회가 발전하고 좋아져도 어두운 면은 있고, 힘들어하는 분들도 있고. 제가 별로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그 분들 옆에서 그냥 서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가는 거죠. 제가 그 동안 해오지 못했던 것을 이제라도 하고 싶어서.. 들꽃향린교회에 왔으니까. 나 혼자서는 용기가 없어서 못하니까,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촛불교회는 꼭 참석하려고 노력합니다."

문재호 조합원 (1962년생)은 아내 곽미선 조합원과 함께 포천에서 ‘아리랑 순대국’이란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주방장이고 아내는 손님을 맞이하는데 실질적인 사장이다. 식당을 운영하면서 평일 저녁 촛불교회에 매번 참석하기란 쉽지 않은 일. 뿐만 아니다. 향기로운 이웃 합창단, 기독인연대회의, 들꽃향린의 통일선교부 부장으로 월요통일기도회 참석 등등... 그 열성과 의지는 어디서 어떻게 출발한 것일까?

문재호 조합원은 여러 직업을 거쳤다. 공군에서 하사관을 거쳐 중사로 12년 동안 직업군인으로 일했고, 택시기사 10여 년, 슈퍼마켓을 거쳐 강남에서 5년 동안 순대국 식당을 하다가 2016년 포천으로 이전해 운영 중이다.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면서 흥미로운 점이 있었다. 삶의 변곡점을 만드는 그의 선택이다. 강남에서 포천으로 식당을 이전한 사연도 그렇다. 


강남에서 왜 포천으로 이전했나요? 혹시 장사가 어려우셨나요?
장사는 잘 됐지요. 강남 역삼동에서 5년을 했는데, 처음 6개월은 어려웠지만 차차 소문이 나서 하루에 150그릇은 넘게 팔았지요. 내 돈 하나 없이 대출로 시작했는데, 빚도 다 갚고 나왔으니까요. 아내가 그래요. 돈 걱정하지 않고 살았던 것은 강남에서 장사할 때라고.

그런데 왜 포천으로 이전했어요? 하루에 150그릇은 넘게 팔았다고 하면 매출을 어림잡을 수 있을 거 같은데.
저녁장사를 안하고 저녁에 시간을 갖고 싶었어요. 강남에서는 돈은 잘 벌지만 월세가 워낙 비싸서 저녁장사를 안할 수가 없거든요. 또 아내도 너무 힘들고. 덜 벌고 월세 덜 내고, 내가 시간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간 거죠.

돈보다 저녁 시간이 좋다고 한다. 돈보다 저녁시간~ 마음은 있어도 현실적으로 쉽게 행동으로 옮기기 쉽지 않은 일이다. 삶의 모험이기도 하다. 그는 왜 이런 선택을 한 것일까? 저녁 장사를 안 해도 먹고 살만큼 벌 수 있는 식당~ 강남에서 포천으로 식당을 이전하면서 품었던 그의 특별한 희망을 이루었을까?(이 답은 그가 살아온 여정에 대한 이야기 뒤에 이어집니다.)

공군에서 직업군인으로 12년간 복무하셨는데. 어떻게 직업군인이 되셨나요? 
사실은 제가 특수한 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공군에서 세운 고등학교인데요. 옛날에는 ‘공군기술고등학교’라고 했는데 지금은 ‘항공과학고등학교’라고 사천에 있어요.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거길 다녔죠. 졸업하면 곧바로 공군 하사관으로 임관하는데 7년 동안은 의무적으로 복무해야 하죠. 군대생활이 너무 힘들고 재미없어서 12년 하고 제대를 했어요. 저와 영 안 맞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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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점이 힘들었나요? 
고등학교는 그래도 학생이니까 괜찮았는데 졸업하고 임관을 해서 굉장히 힘들었어요. 12·12나고, 광주사태가 있었고. 군대 내에서는 어떤 생각도 표출하지 못 하잖아요. 철저하게 통제 되니까. 거기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 가장 컸던 거 같아요. 좋은 기억이 다 사라졌는지 군대에 대해서는 별로 할 이야기가 없네요.

인터뷰 당시엔 자연스럽게 공군에서 전역한 이후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어갔다. 인터뷰가 끝날 즈음이었다. 불현 듯 생각난 듯 ‘그가 공군 하사관시절 얼마나 힘들었는지’ 가슴 한편에 오래 봉인해두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 때는 자살하고 싶었어요. 하사관으로 임관하고 나서 영내 생활을 할 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억압적이고 모순된 구조, 나의 자유는 없고, 구속된 그 안에서의 삶들... 정확하게 내가 무엇을 하고 살면 좋은지, 살고 싶은지는 모르던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던 거죠. 뛰쳐나가고 싶었어요. 뛰쳐나가고 싶은데 그걸 못하니까, 죽는 방법을 몰라서 죽지 못했지 아마 뭔가 확실한 게 있었으면 죽었을 것 같아요. 그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정신적인 압박감이.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힘들었나요?
저는 때리거나 누구에게 해코지를 못하는데 그렇게 해야 하는데 못하겠더라고요. 강압적으로 뭘 해야 하는데 못하고 그래서 무지하게 많이 맞았지요.

강압적으로 해야 할 일이라면?
우리는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하사관으로 가니까 19살, 20 살이죠. 그런데 대부분 병사들은 20살 넘어서 입대합니다. 보통 서너 살 이상 차이가 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말을 안 듣죠. 아무리 하사관이라도. 나는 못 싸웠지만 동기들은 무지하게 많이 싸웠데요. 군대라는 조직은 정말 저에게 맞지 않았어요.

그래도 12년 동안 했는데 좋은 기억도 있지 않을까요?
좋은 기억? 없어요! 아, 군대에서 좋았던 기억이라면 6·29 선언 났을 때 선배하고 둘이서 밤새 술을 마셨던 생각이 나요. 마음 맞는 사람은 그 선배 하나 밖에 없었거든요. 그게 제일 좋았던 기억이네요. 사실 저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잘 못해요. 이야기 해봐야 마음 통하는 동료 몇 명하고만 하는 거죠. 어렸을 때부터 외모 콤플렉스도 심하고 잘 어울리지도 못했거든요.

정말요?
어렸을 때 동네 친구들에게 놀림을 많이 당했어요. 못생겼다고. 그리고 제가 얼굴이 아주 희었었는데 그래서 더 따돌림을 당한 거 같아요. 상계동이 옛날에는 시골이었으니까 아이들이 다 시커맸었요. 다들 나만 빼놓고 놀아요. 지금도 제가 먼저 누구에게 접근하는 것이 힘들어요.

7년이 의무기간이라고 했는데... 왜 곧바로 그만두지 않았어요?
사실 7년만 딱 하고 제대하려고 했는데 그해 집사람이랑 결혼한 거예요. 그래서 5년 더 늦춰진 거죠. 가정을 책임져야 하니까. 그러면서도 ‘늘 제대해야 한다. 제대해야 한다’ 말했던 거죠. 그 때 전역을 흔쾌하게 허락해 준 아내에게 감사하죠. 보통 용기가 아니잖아요. 사실 저는 내심 많이 두려웠거든요. 할 줄 아는 게 없는데, 사회 나가서 뭐 하고 사나? 잘 할 수 있을까?

제가 군대에서 전역할 때 중사였는데, 사실 여러면에서 그냥 군에 남아있는 게 안정적이었어요. 월급도 꽤 올랐고, 중사는 군인으로서도 인정받는 지위고, 조금만 더 해서 20년 채우면 연금도 있고 노후가 보장되니까. 그래서 아내가 더 고생했죠.(하하하) 집사람이 마음이 저보다 넓어요. 훨씬 넓고 성격도 좋고, 배짱도 있고. 제가 꼼지락꼼지락 하고 있으면 오히려 확 질러버리죠. 하하하


그는 사회에 나와서 택시운전을 했다. 회사택시로 시작해 나중에는 개인택시를 구입해 경제적으로도 안정을 찾았다.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재능을 발견하고,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다.

제가 하고 싶은 직장을 못하니까 택시 운전을 했지요. 사실은 그때 노래를 처음으로 배웠거든요. 남성 중창단 하면서. 어릴 때부터 성가대는 늘 했었고 내가 노래를 좋아하고 잘하긴 했는데, 이렇게 성악적인 발성을 하고 잘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어요. 함께 노래하는 친구들은 늦게라고 성악을 해보라고도 했었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해요. 가정이 있는데. 그냥 아마추어로 즐기는 것으로 만족해야죠.

택시가 좋은 게 손님 없을 때 차 안에서 마음대로 노래를 할 수 있으니까, 연습장이 따로 필요 없잖아요. 그리고 개인택시 할 때는 3일에 한 번씩 쉬니까 예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봉사를 많이 했어요. 성가대활동도 다 참여하고. 교회 내 노인대학이 있었는데 수요일 오전에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봉사를 할 수 있어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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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호 조합원에게 물었다. 살아오면서 가장 잘한 일들을 꼽는다면 무엇이냐고. 그 답지 않게 고민하지 않고 바로 답을 햇다. ‘들꽃향린교회에 온 것, 곽미선 조합원과 결혼한 것, 그리고 아버지의 진보적 신앙관, 사회의식을 받은 점’이라 했다.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
교회는 예장통합 보수적인 교회에 다니셨지만, 제가 어려서부터 본 아버님은 진보적인 신앙관을 갖고 계셨고 정치,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도 진보적이셨어요. 늘 신학공부를 하셨고, 책을 많이 읽으셨어요. 들꽃향린을 알게 된 것도 아버님이 보시던 책에서 김경호 목사님을 글을 봤기 때문이었거든요.

아버님은 ‘거제도포로수용소’(1951년 초부터 1953년 7월까지 17만 여명의 조선인민군과 중공군이 수용됐었다)에 계셨던 분이세요. 고향이 평양이신데 아버님은 남쪽을 선택하신 거죠. 평양신학교에 다녔었다고 해요. 6·25나고 숨어 지내다 잡혀서 인민군으로  내려온 거죠. 퇴각 도중 인민군 대열에서 탈출했는데, 잡혀서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 생활하신 거죠.

그 때 수용소에서는 변절자 처단이라는 명분으로 밤에 칼부림이 나면 몇 사람씩 죽어 나갔데요. 그래도 아버님은 항상 식사기도를 하셨다고 해요. 외국선교사가 와서 전도할 사람을 찾았는데 아버지를 기독교인이라고 소개했고, 또 한명의 교우와 천막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평양에서 내려오셨고, 거제도 수용소에 계셨고, 그러면 진보적 신앙을 견지하기가 쉽지 않으셨을 것 같은 데요?
저도 어디서 어떻게 영향을 받으셨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책을 정말 많이 읽으셨어요. 그리고 함석헌 선생님과 공부하시는 데도 다니시고, 문익환 목사님 교회도 다니시기도 하고, 안병무 박사님, 서남동 선생님이 쓰신 책들, 한국신학연구소에서 나온 책들 거의 다 받아보시고 그러셨어요. 서울에 와서 신학교에도 다니시기도 하셨다는데 혼자 신학을 연구하시면서 진보적인 신앙관을 세우셨던 거 같습니다.

들꽃향린은 어떻게 오시게 된 거예요?
2010년에 왔는데요, 전에 다니던 교회는 아버님과 목사님이 신학대학에서 함께 공부하셨던 인연이 있어 다니게 되었습니다. 교인이 1,000명이 넘는 대형교회였어요. 교회나 신앙관은 불편함이 있었지만 교우들과의 관계가 너무 좋아서 떠나질 못했었죠. 몇 번 떠나려 하다가도. 그런데 교회가 노후화 되어 재건축한다고 할 때 너무 비리가 심해서 실망했습니다. 여기는 아니구나!

더 결정적인 것은 그렇게 좋았던 교우관계가 깨지는 거였습니다. 재건축비리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면 정치적인 색깔론으로 공격해오니까 그 전에 좋았던 모든 관계가 무너지는 거죠. 정치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먼저 하지 않아요. 그 쪽에서 먼저 꺼내는 데 이런 식이예요. 빨갱이들이(김대중 대통령, 노무현대통령) 정권을 잡아서 다 망쳤다고, 그렇게 친했던 분들인데. 마음이 같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분배나 정의까지는 기대하지 않더라도, 무한경쟁의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생각, 색깔 논쟁의 정치관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니까. 이건 아닌데 하는 마음이 드는 거예요. 대화가 안 되는 거예요. 아! 내가 혼자가 되는구나, 그 안에 있으면, 그래서 교회를 여기저기 찾다가 들꽃향린에 오게 된 거죠.


어떻게 찾으셨어요?
아버님이 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나오는 책들을 계속 보셨는데 그 중 한 책 중에 들꽃향린의 김경호 목사님의 글이 있었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그래서 들꽃향린을 찾으면서 향린교회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오게 됐는데, 와보니까 역시 선택은 잘했다고 생각해요.

아버님도 같이 안 오셨어요?
아버님은 오지 않으셨죠. 연세가 많으세요, 이제 90이신데. 나이가 드시면서 아버님이 달라지시는 걸 느껴요. 왜 변하시는 걸까. 생각해봤는데 이런 것 같아요. 아버님 주변에 대화할 사람이 없어서가 아닐까. 대부분이 보수화 되니까요. 교회에서도 그렇고. 나오고 싶어도 제가 뛰쳐나온 거처럼 아버님은 나오실 수가 없는 거죠. 연세가 있으니까. 갈 데가 없으니까. 그래서 두려우신 게 아닌가. 그 사람들하고 호흡을 같이 안하면 '외톨이가 되는 거 아닌가'하는 두려움이 큰 게 아닐까, 그러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보수화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2017년 장로로 피택되어 시무하고 계신데 들꽃향린에 와서 어떤 점이 좋으셨어요?
개인적인 신앙보다는 공동체적인 신앙을 실천할 수 있어서 좋아요. 나 혼자 복 받자고 믿는 개인적인 신앙이 아니고 무엇인가 사회와 이웃을 생각하고 같이할 수 있어서, 아픈 사람들 곁에 서있기라도 할 수 있어서 좋아요. 


앞서 말했지만  12·12, 5·18, 전두환 시대, 6·29를 거치는 격변하는 시기에 군에 있었다는.. 어떻게 보면 빚진 자죠. 무임승차한 사람이라 항상 빚진 마음을 갖고 있어요. 나이가 들어 뭐라도 해야 하는데, 제가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고 해서 모임 있으면 참석이라도 해야 하고, 어디 가자고 하면 가기라도 해야 하는 그런 심정이에요. 들꽃향린교회에 왔으니까. 나 혼자서는 용기가 없어서 못하는데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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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곽미선 조합원은 어떠세요?
신앙관도 저와 거의 같고요, 큰 틀에서는 늘 지지해줘요. 제가 인생을 살고자 하는 방향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또 이끌어주고 하니까 그게 제일 좋고, 고맙고 그렇습니다. 그래도 제가 가끔 농담으로 큰소리칩니다. “당신 나 아니었으면 아직도 보수교회에 있을 거다. 이렇게 좋은 신앙생활 못했을 거다. 다 나를 만난 덕이다.” (하하하 크게 웃음을 터트린다.)

문재호 조합원이 기도회와 촛불교회, 향기로운 이웃 합창단, 월요통일기도회, 기독교연대회의 등등으로 식당을 비우면 그 빈자리는 아내 곽미선 조합원이 채워왔다. “저녁에 시간을 갖고 싶어서~, 저녁 장사를 안 해도 먹고 샅만큼 벌 수 있는 식당~” 강남에서 포천으로 식당을 이전하면서 품었던 그의 특별한 희망을 이루었을까? 다시 식당이야기로 돌아 가본다.

순대국을 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으셨어요?
특별한 이유는 없고요, 디스크 때문에 택시를 못하게 됐어요. 그래서 슈퍼마켓을 했는데 잘 안 됐어요.  제가 특별한 기술이 없으니까 체인점 식당은 조금 배워서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찾다보니, 지금 하고 있는 순대국을 하게 되었습니다. 맛도 좋고 무엇보다 사장이 욕심을 내지 않는 점이 좋았어요. 보통 컵이나 소품들을 다 본사에서 주는 것만 쓰게 하고, 인테리어도 가끔 바꾸라고 해서 자기들이 소개하는 업자에게 이문도 챙겨 먹고 그러는데, 거긴 그런 게 없고 자기네 순대국만 잘 써주면 되니까.. 그리고 메뉴도 자체적으로 개발할 수 있게 해주고. 주방에서 요리는 제가 담당하고 있는데 새로운 메뉴도 개발했습니다. ‘돼지고기 석쇠구이’인데 손님들의 반응이 좋아요.

처음 식당을 열어서 성공하기 쉽지 않다고 하던데.
처음 6개월은 정말 힘들었죠. 제가 강남에 식당을 차리고 나서 처음으로 불면증에 시달렸어요. 제가 내일 시험이어도 잠은 다 자는 스타일인데 이게 장사가 되는 건지? 사실 그 때 카드빚도 지고 마이너스 통장도 만들고 처음부터 대출을 받고 시작했으니까 굉장히 힘들었어요. 사실 사람이 경제적인 여건이 첫 번째잖아요, 먹고 살 수 있어야 뭘 하더라도 하는데 그 때는 정말 막막했어요. 처음 해보는 일이라 몸은 너무너무 힘든데도 잠이 오지 않아요. 저승사자도 세 번 봤어요.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니까 1년 되면서부터는 150그릇 이상 팔았죠.

지금까지 경험에 비추어 식당을 하면서 실패하지 않는 비법이 있다면? 
첫째는 손님에게 잘해줘야 해요. 친절하게. 우리 집사람이 그 역할을 참 잘해요. 거기에 맛이 따라가야지만. 제 생각에는 음식도 대중적으로 편하게 먹을 수 있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고요, 어쨌든 깨끗하고 친절하게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포천으로 이전해서 저녁시간을 얻으셨나요?
아. 그게 쉽지 않네요. 원래는 저녁에 장사를 안 하고 아침부터 점심~3, 4시 까지 하려고 했어요. 토요일도 쉬고. 그렇게 해도 먹고 살 수 있도록 하고 싶었는데 안됐죠. 생각하지 못한 점들이 몇 가지 있어요.

서울에서는 식당 문을 열든 닫는 손님들이 얘기를 안 해요. 와서 닫았으면 오늘은 쉬나보다 하고 옆에 식사하는데 불편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포천은 다들 차를 타고 와요. 서울처럼 식당이 옆에 있지 않아요. 그러다보니 왔다가 돌아갔던 손님들이 다음에 오시면 얘기를 해요. “왜 쉬냐고, 왔다가 헛걸음 했다”고. 밥도 못 먹고 또 식당을 찾아 차를 타고 가야하니까 손님들 입장에서는 불편하지요. 집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듣는 걸 싫어해요. 그래서 결정한 거죠. 토요일도 쉬지 말자고. 손님이 특별히 많은 거는 아니지만. 집사람은 식당을 하는데 있어 나름의 원칙이 있어요. '손님이 불편하면 안 된다.'

집사람이 고생하든, 내가 고생하든가 서로 저녁시간을 반반만 가져야 하는 거죠. 같이 가질 수는 없어요. 생활하는데 불편하지 않을 정도, 먹고 살 정도만 벌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 어느 정도만 있으면 되는데 그게 안돼요. 식당을 그렇게 운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어렵네요. 앞으로 환경을 바꿔야하죠.


자신과 아내를 위한, 사랑하는 교우들과 함께 행동하는 믿음을 실천하는 현장을 찾아가기 위한 저녁시간을 만들기 위해 삶을 조율하고 있는 문재호 조합원. 그가 애쓰고 있는 삶의 조율은 단순히 수입과 노동시간만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을 둘러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욕망을 조율하는 이 사람, 진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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