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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국의 걸으며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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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미노 생각 없이 걷기 4부(14일-17일)

posted Dec 2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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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미노 생각 없이 걷기 4부(14일-17일)

Camino Day 14. 평범한 일상의 중요함

어제 많이 걷기도 해서 오늘은 25킬로미터로 비교적 짧게 마치기로 작정하다. 느지막이 일어나 짐을 챙기고 어제저녁 캔맥주를 사서 마셨던 동네 광장으로 아침 먹으러 나갔다. 순례자 몇몇이 커피에 빵조각을 먹고 있다. 신선한 오렌지를 즉석에서 갈아주는 주스가 없다길래 커피와 함께 스페인식 오믈렛인 또르띠야와 바게트 그리고 한 사발이나 되는 참치 샐러드를 시켜 모두 먹었다. ‘이 정도는 먹어줘야 아침이지!’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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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서의 아침식사

 

 

산티아고 순례길 후기는 제주 올레를 만든 서명숙 이사장이 오마이뉴스에 2009년 연재한 것을 읽은 것이 전부다. 나는 이 기사를 읽고 그때부터 까미노 순례를 하게 될 것이라 자기암시를 하였다. 서 이사장은 전 시사저널 편집장이다. 예전 시사저널의 적통은 지금 시사인이 잇고 있다. 그녀는 까미노를 다녀오고 저널리스트를 작파하고 고향 제주로 내려가 올레 창시자가 되었다. 지난 10년 동안 지녀왔던 암시가 이번 순례길로 나를 인도하였다. 글을 읽은 지 십 년 세월이 흘렀으니 당연히 구간에 대한 그녀의 평가가 기억에 남아 있을리 만무하다. 그렇다고 내일을 걸을 길을 준비한다고 다른 이의 후기를 찾아 읽고 그들의 평가를 염두에 두면서 준비할 일도 없다.
 

 

Camino Day 14-광활한-해바라기밭_resize.jpg

광활한 해바라기밭

 

 

다른 구간과 마찬가지로 오늘 코스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그냥 나섰다. 다만 늘 하던 것처럼 오늘 아침도 넉넉히 잘 챙겨 먹고, 동네를 벗어날 즈음 보이는 상점에서 아이스티 한 캔, 그리고 좋아하는 납작복숭아 네 개를 사서 챙겨 넣었을 뿐이다.


Camino Day 14-끝이-없는-길-2_resize.jpg

끝이 없는 길
 

 

가벼운 마음으로 마을을 빠져나가는데 이제까지 본 것 중 가장 광활한 해바라기 밭을 만났다. 행운은 이때까지다. 이후로 일정은 전혀 가볍지 않다. 가볍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18km를 걷는 동안 마을도 없고 그러니 물을 보충할 급수대도 카페도 상점도 없는 허허벌판을 무작정 마냥 걸어야만 했다. 늘 기계적으로 하던 일상의 준비가 없었으면 어떡할 뻔했을까 아찔하다.

어제 42킬로를 걷고 몸을 뉠 베드를 구하지 못해 다음 마을까지 6km를 걸어갈 때의 고통스러운 발걸음보다 더한 어려움이 왔다. 갈증에 약간의 구토 증세가 나타났다. 몸과 맘이 모두 고통스러운 마의 구간이 끝나가고 마을 입구에 짚단으로 나름 작품 흉내를 낸 양들을 보고 기분 좋게 순례자 카페에 들어섰다. 그런데..

 

 

Camino Day 14-짚단-양떼들_resize.jpg

짚단 양떼들

 

 

장사는 입지가 아무리 중요하다지만 음료수 한 병과 빵 한 조각을 다른 데보다 두 배를 받는다. 이런 제길, 목구멍까지 나오는 육두문자를 집어삼키며 나섰다. 그러면서 든 생각이 순례길이라 하지만 어차피 여기도 사람 사는 동네다.

2019. 7. 24.

오늘의 사족 1. 오늘 머무르는 알베르게는 저녁 순례자 메뉴에 포함된 와인이 한잔이 아니라 작은 병으로 한 병을 준다. 덕분에 글을 쓰는 내내 헤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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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 메뉴의 와인과 IKEA 나이프와 포크

 

2. 포도주잔, 포크와 나이프가 이케아 제품이다. 순례자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우아한 식사를 할 권리가 있다.
3. 앞 테이블에 앉은 이들은 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가족 순례자들이다. 그들의 저녁 테이블엔 알코올이 없다. 까미노에선 가끔 알콜을 전혀 취하지 않는 경건한 사람들을 만난다.

 


Camino Day 15. 축제는 언제 찾아오는가?

이틀 전 48km를 걷고 난 후 두 밤이나 지났지만, 상태가 쉬이 좋아지지 않는다. 왼쪽 발뒤꿈치 통증이 새끼발가락으로 옮겨가더니 발등도 아프다. 다만 걸을 때는 느끼지 못하고 양말을 벗을 때와 씻을 때만 통증이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왼쪽이 늘 말썽인데 괜찮다고 생각했던 오른쪽 발에도 오늘부터 신호가 온다. 요 며칠간 왼쪽에 가해질 힘이 오른쪽 발로 옮겨 갔으니 그럴 만도 하다.
 

 

Camino Day 15-알베르게-입구에-붙어-있는-성야고보의-날-파티-안내_resize.jpg

알베르게 입구에 붙어 있는 성야고보의 날 파티 안내

 

 

숙소를 구하지 못해 고생한 경험이 있어 오늘은 일찌감치 예약하고 걸었다. 덕분에 4인용 방을 혼자 사용하는 호사를 어제에 이어 오늘도 누리게 되었다. 이틀 전에는 다른 순례자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일부러 독방을 얻었다. 하지만, 방에 침대가 네 개나 되어 빈 침대가 여간 아까운 것이 아니었다. 오늘은 10유로 내고 베드 하나를 배정받았는데 이후 순례자가 더 오지 않아 혼자 방을 쓰게 되었다. 가끔 이런 횡재를 만난다. 홀로 방을 차지하는 상황은 오늘이나 어제나 별반 다르지 않은데 이토록 감정이 다를 줄이야!
오늘 도착 예정인 마을의 알베르게는 자원봉사와 기부로 운영되는 공립이다. 마을의 다른 사설 알베르게는 값도 공립보다 더 받는데 평가가 별로다. 여긴 공립이지만 평점도 좋다. 공립은 퍼스트 컴 퍼스트 서브를 원칙으로 하기에 먼저 도착하는 사람 순으로 베드를 배정하는데 평점 좋고 싼 공립에 빈 베드가 많으니 세상사 참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오늘 유난히 길 가다 동물들을 여럿 만난다.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데 순례길에 동행한 반려견이 주위를 맴돈다. 덩치는 큰데 순한 녀석이다. 밥 먹고 있는데 옆에 앉아서 꼼짝도 할 생각을 않는다. 결국, 마지막 남음 바게트를 고민하다가 주었다. 날름 받아 와그작와그작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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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때 만난 순례길에 동행한 견공

 

 

오후에는 양 떼를 만났다. 부지불식간이라 자리를 피할 틈도 없이 양 떼 사이에 갇히게 되었다. 선두에 있던 놈들은 피해 가더니 떼거리의 중반을 넘어가니 ‘너는 왜 우리 길 가는데 걸리적거리게 여기에 서 있니’라는 느낌이 들도록 나를 밀치고 지나간다. 하여간에 수가 많은 쪽으로 힘의 균형이 기우는 건 당연지사다.
도착 2km 전이 가장 힘들다. 시작한 날부터 그랬으며, 오늘도 그렇다. 다행히 내일 비 예보가 있어 그런지 저 멀리서 다가오는 구름 그리고 함께 온 바람이 도와주어 오후는 햇빛에 달달 볶이는 느낌이 덜하다. 그렇게 도착한 알베르게에는 은퇴한 은발 신사 두 명이 순례객을 환대하고 있다. 오늘이 사도 야고보의 날이라 저녁에 파티가 있단다. 갈리시아 지방은 성 야고보의 날이 휴일이라 한다.

 

 

Camino Day 15-성-야고보를-기념하는-파티_resize.jpg

성 야고보를 기념하는 파티

 

 

샹그리아가 양동이 사이즈로 준비되었고, 검은 올리브와 당근으로 펭귄 모양을 낸 전체 요리가 나왔고, 앞집 레스토랑에서 이 지역 전통 케이크를 구워 왔다. 공짜 축제에 참여하는 것이 멋쩍어 얼른 나가서 동네 가게 냉장고에 있는 시원한 맥주를 몽땅 공수해 왔다. 그렇게 예기치 않던 축제가 열렸다.

2017. 7. 25.

오늘의 사족 1. 파티가 그렇게 떠들썩하거나 흥겹거나 그러지는 않다. 다들 15일 이상 걸어온 사람들이고 내일도 길을 떠나야 한다. 파티가 끝날때까지 샹그리아와 맥주가 많이 남았다.

 


Camino Day 16. 처음으로 글을 그만 쓸까 고민하다.

글을 쓰고자 하는 의욕이 사라진 건 순전히 사람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어제 묵었던 알베르게에는 한국인들이 여럿 있었다. 삼십 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한국인들이 식사를 준비해 먹고 있길래 인사를 건넸는데 돌아오는 반응이 시원하지 않다. 오랜 시간 같이 다니면서 서로 간 유대감이 높아졌나 보다하고 생각은 했지만 모국어로 대화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사라지고 나니 좀 허탈했다. 그 이후론 파티가 이어지는 동안 그들에게 말 붙일 기분이 아니었다. 길지 않았던 파티가 끝나가고 은발의 은퇴 봉사자와 나와의 대화도 끊어지고 나는 하릴없이 맥주 한 캔을 들고나와 동네 어귀를 배회하였다. 그리고 아래 장면을 목격하였다. 스페인 농촌의 부를 가능케 한 트랙터! 기계를 손보고 있는 저 건장한 농부를 들판에서 볼 수 있는 날도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복잡한 도로에서의 자율주행도 머지않아 실현될 터이니 경지정리가 잘 되어 있는 농지에서 일하는 기계들은 자동차의 자율주행보다 더 빨리 무인화 자동화 될 것이다. 이후에 남은 문제는 결국 분배가 아닐까 한다.
 

 

Camino Day 16-스페인-농촌-부의-근원인-트랙터_resize.jpg

스페인 농촌의 풍요를 가능케 한 트랙터

 

 

어제 올린 글에는 맥주가 남을 것 같다고 했다. 파티 중간에 글을 써서 올릴 때만 해도 그랬었다. 동네를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 오니 남아돌 것 같던 맥주가 어디론지 다 사라지고 없다. 다행이다.
오늘 새벽에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비가 세차게 내렸다. 네 시에 잠깐 깼을 때 길 떠날 준비하던 사람들은 캄캄한 길 위에서 이 비를 만났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전 중에 비가 그친다는 일기예보를 믿고 6시 반경에 출발했다. 잠시지만 모자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낯설지 않고 반갑다. 두 시간쯤 걸었을 때 어젯밤 그 일행들을 쉼터에서 조우하였다. 나는 새벽길에 비 맞지 않았느냐 인사만 건네고 그냥 계속 걸었다. 여전히 그들과 말을 섞기에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세 시간 가까이 걸어서 겨우 아침 식사를 할 수 있는 마을에 다다랐다.

 

 

Camino Day 16-낮게-깔린-구름-사이로-빗방울이-떨어진다_resize.jpg

낮게 깔린 구름 사이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그 이후로 걷는 동안 의욕상실 증세가 스멀스멀 기어올라온다. 나는 누구이며 왜 이 길을 걷고 있나라는 쓰잘데기 없는 질문이 계속 맴돌았다. 급기야 오후에는 걷는데 졸리기 시작했다. 25킬로밖에 안 걸었는데, 비가 내려 시원한데, 내일도 비 예보가 있고 땀도 많이 흘리지 않았는데, 아무리 이렇게 걷기에 좋은 조건이어도 지금 컨디션으론 도저히 더 걷기 힘들었다. 그리하여 동네가 그리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하다.
알베르게 들어오니 내가 첫 번째 순례자이다. 빨래해서 널고 동네로 나오니 빵과 디저트를 파는 가게에도 맥주가 있다. 큰 잔으로 한잔 마시고 들어가 정신줄 놓고 두 시간을 잤다. 상쾌함이 돌아오지 않는다. 길 나서고 처음 그만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오후 여섯 시가 넘었는데 신발장에 트레킹화는 달랑 두 켤레..
다시 동네로 나와 바를 몇 곳 기웃거리다 타파스를 여럿 준비해서 맥주랑 같이 파는 곳을 발견했다.

 

 

Camino Day 16-첫-잔과-홍합-올리브-타파스_resize.jpg

첫 잔과 홍합 올리브 타파스

 

 

홍합과 올리브 재운 것을 시켜 먹는데 짭조름하니 좋다.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이다. 친구들과 소통하는 SNS에 올린 사진과 글 아래에 달린 댓글이 눈에 확 들어온다. 염분을 보충하라고!
 

 

Camino Day 16-두번째-잔과-검은올리브-양파-절임_reszie.jpg

두 번째 잔과 검은 올리브 양파 절임

 

 

그럼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두 번째 잔은 흑 올리브와 양파절임 타파스다. 짭짤한 올리브는 나의 동반자임이 분명하다.

2017. 7. 26.

오늘의 사족 1. 소금에 절인 올리브 덕에 다시 글 쓸 기운을 찾는다. 두 잔으로 끝낼 수가 없어 하몽 얹은 바게트와 세 잔째….

 

Camino Day 16-세번째-잔과-하몽-바게트_resize.jpg

세 번째 잔과 하몽 바게트

 

2. 열 시에 잠들어 중간에 깨지 않고 네 시까지 잤는데 이는 다름 아니라 서늘한 저녁 바람 아래 맥주를 마시며 태양에 달궈진 몸을 충분히 식혀서 그렇지 않나 생각한다.
3. ‘바보야 문제는 소금이야.’ 친구가 한 이 말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감정도 느낌도 물리적 조건 위에 존재하는 거지. 너무 당연하다. 온몸에 소금기가 빠져나가 몸이고 정신이고 오락가락 한 것인데 그걸 모르고 그렇게 고생스러워 하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Camino Day 17. Sal(t)과 Soul, 불능과 가능 사이

7월 11일에 시작하여 오늘 27일 맞았으니 17일을 걸었다. 경로와 시간을 기록해 주는 스마트폰 앱 덕분에 정확히 걸어온 궤적과 누적시간을 알 수 있다. 101시간 50분, 512km. 하루 평균 30km를 그 동안 걸어온 셈이다. 앞으로 십 수일 동안 이와 비슷하게 걸을 것이다. 위기는 이틀 전에 찾아와 어제까지 이어지다 어제저녁부터 서서히 나아지기 시작했다.
몸에 염도가 떨어지면 무기력해지고 무기력함은 정신과 함께 육체도 불능 상태로 몰아간다. 어제 저녁 식사 대신 먹었던 짭조름한 올리브와 하몽, 그리고 스페인식 소시지 덕분에 새벽에 깨었을 때 몸의 불능 상태가 사라지고 장기들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몸 안의 염도가 정상 상태로 돌아가면서 자연스레 집 나갔던 정신이 되돌아 왔다. 차려진다. 당연히 걸어야겠다는 의지가 생기고 안개비가 보슬비로 바뀌는 상황이지만 충만한 의지가 꺾이지 않는다. 아무렴 뙤약볕보다 이런 날이 걷기에 좋지!

 

 

Camino Day 17-짙은-구름-아래-보슬비를-맞으며-걷는다_resize.jpg

짙은 구름 아래 보슬비를 맞으며 걷는다

 

 

레온이라는 대도시로 들어서서 큰 마트를 지나게 되었다. Sal(소금) 사고 절인 올리브도 사서 나오는데 은행에서 유로화를 찾아서 나올 때 보다 더 든든하다. Soul은 모든 것들의 종합임이 틀림없지만, 그 정수엔 Sal이 자리하고 있음을 확신한다. Sal이 어원이 되어 Salary가 된 것이 괜한 것이 아니다.
 

 

Camino Day 17-몸과-영혼의-동반자-Sal-그리고-절인-올리브_resize.jpg

몸과 영혼의 동반자 Sal 그리고 절인 올리브

 

 

프랑스도 그렇고 스페인에서도 중정이 있는 건물을 여럿 본다. 오늘 알아듣지도 못하는 스페인어 궁전 투어에 따라나섰다가 건물 중정만 하염없이 보다 나왔다. 정방형이든 장방형이든 건물의 안쪽에 열주를 세우고 안쪽에 정원을 만들었다. 생각해 보니 경기 북부의 ㅁ자형의 한옥을 변형해 우리식의 중정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친구가 주인장인 익선동 카페 Ellie도 ㅁ자 주택의 마당을 새롭게 해석하여 공간 구성을 하였다. 엘리 마당에 놓인 가로로 길쭉한 테이블에 앉아 책 읽기를 즐기는 나는 그 까페 단골이다.
 

 

Camino Day 17-스페인식-중정-2_resize.jpg

스페인식 중정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고 했던 시가 있었는데 시인의 문제의식과는 좀 동떨어진 해석일지 모르지만, 곁에 있는 그대가 나를 모르기 때문에 나를 알아줄 그대가 그리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작고한 룻거 하우어를 추억하며 쓴 친구의 글에 댓글을 달다가 든 생각이다. 그런데 나는 나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삼십 대에 MMPI 검사를 통해 나는 ISTJ형 성향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십 년 가깝게 흘렀으니 이제 ENFP형 속성을 내실화했을까? 누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알고 그 변화의 궤적을 감지하여 미래의 나를 맞이하는데 동반할 것인가?
 

 

Camino Day 17-까사-보티네스를-떠-받치고-있는-기둥들_resize.jpg

까사 보티네스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들

 

 

가우디가 설계한 까사 보티네스는 내력벽(하중을 받아 건물을 지탱하는 벽)을 없애고 대신 직경 20cm짜리 쇠기둥으로 무게를 바치는 구조를 한 당시로선 혁신적인 건물이다. 건물을 지탱하기 위한 벽을 평면에서 제거하였으니 다양한 공간 설계가 가능하게 되었다. 물론 이런 구조는 기존 관행과 싸워서 이룬 업적이다. 모든 천재는 혁신적이며 따라서 늘 경계선 위에서 위태롭게 서 있을 수밖에 없다.
개인의 변화를 감지하는데 가장 정확하고 효과적인 것은 누적된 데이터라고 이 시점에서 답할 수밖에 없다. 내가 읽고 있는 글과 보고 있는 작품에서 어떤 지점에 또는 어떤 맥락에서 감정의 기복이 생기는지를 파악하고 이를 시계열 데이터로 누적한다면 나를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 누적한 데이터를 분석하는 시스템일 것이다. 소위 AI라고 불리워지는..
룻거 하우어가 주연으로 나온 블레이드 러너에서 숀영이 연기했던 복제인간이 나에게 커스터마이즈된 음악을 선곡하여 들려주고, 내가 가슴뛰게 보았던 영화의 미장센을 골라 이야기하고, 전시장의 작품 중 나를 미적 흥분상태로 몰고 가는 작품 앞에 같이 서 있다면 아마 난 이 AI를 기반으로한 복제인간을 천생연분으로 여길듯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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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가우디 어록

 

 

오늘 레온의 조그만 가우디 선생 박물관 안에서 그가 쓴 글을 읽고 주춤하였다.
“Tomorrow, please come early, we’ll do beautiful things.”


2019. 7. 27.

오늘의 사족 1. 시골 쥐, 도시 나들이했으니 옷 한 벌 장만!

 

Camino Day 17-시골쥐-도시-나들이-기념_resize.jpg

시골쥐 도시 나들이 기념

 

2. 레온 대성당 앞에서 점심 대신 맥주 한 잔!
 

Camino Day 17-레온-대성당-앞에서-한-잔_resize.jpg

레온 대성당 앞에서 한 잔

 

3. 오늘까지 17일째 걸었다. 레온에 도착하였으니 전체 구간의 2/3 지점이다. 프렌치 루트는 1/3되는 지점에 부르고스 그리고 2/3 지점에 레온이라는 큰 도시가 있다. 이제 남은 여정은 11일이고 두 번에 나누어 연재할 예정이다.
 

7월-11일-~-27일까지-까미노-루트_resize.jpg

7월 11일 ~ 27일까지 까미노 루트

김영국-프로필이미지.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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