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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국의 걸으며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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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미노 생각 없이 걷기 2부

posted Oct 3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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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미노 생각 없이 걷기 2부


Camino Day 4. 과유불급 옛말이 틀리지 않다

리카르도와의 조우
오늘 34킬로를 걸었다. 의도한 바는 없고 걷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일상에서는 하루에 30킬로미터 이상을 걷는 일이 거의 없다. 지나고 생각해 보니 이 날을 기점으로 30킬로 이상의 거리를 매일 걷게 되었다. 나바라주의 주도인 팜플로냐를 지나 황금색 밀밭을 지나는데 뒤에서 누군가 날 부른다.

 


황금색-밀밭_resize.jpg

나바라주의 끊임없이 펼쳐진 밀밭, 농부가 아주 가끔 보이는 이 밭의 수확물은 스페인 부의 근원이 되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바람 부는 언덕이면 어김없이 서있는 풍력발전기도 인상적이다. 이 사진에서도 보인다.


로마출신 리카르도를 다시 만났다. 어제 팜플로냐에서 열린 소몰이 축제(정확히는 인간몰이가 맞지 않나 싶다. 소가 뒤에서 쫓아 오고 사람들은 소 뿔에 받히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뛰어다니니..)를 손짓발짓 섞어가며 열심히 설명한다. 재미 있었나 보다. 하기야 축제 다음날 아침  팜플로냐 시내를 가로질러 걸어오는데 아침부터 흰옷에 빨간 스카프를 맨 전통축제 복장을 한 사람들이 아이어른 할 것 없이 구 도심 거리마다 가득 차 있다. 축제가 일상인 세상이 되어야 할텐데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걷는다.


 

빰쁠로냐-축제_resize.jpg

소몰이 축제 다음날 아침 팜플로냐 구시가지 광장에서 여러 종류의 나무판을 두드리는 타악 연주자가 길거리 공연을 하고 있다.


리카르도는 오늘 Puenta la Reina(뿌엔타라레이나)까지 간다하여 그냥 같이 걷게 되었다. 30킬로 지점에 다다르니 가장 뜨겁다는 시간은 4시 근처가 되어가고, 몸은 남은 에너지를 다 써 바닥을 보이고, 왼발바닥에서도 따끔따끔 신호가 온다. 걷기에 가장 좋은 모티베이션은 뒤태가 좋은 레이디를 따라 가는 것이라고 이 와중에도 리카르도는 주절거리며 오늘 지나쳤던 레이디들을 거명하며 키득키득 웃는다. 틀린 말은 아니나 자칫 오해받기 십상이다. 하여간에 너무 많이 걸은 탓에 너무 많이 땀을 흘린 탓에 시원한 맥주가 갈급한 가운데 뿌엔타라레이나에 도착하다.

설득당할 준비
어제 묵은 3번째 숙소는 성당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순례자용 숙소)였다. 모노노케히메(우리나라에선 원령공주라는 제목으로 상영된 일본 에니메이션)에 나오는 붉은 옻칠 그릇을 쓰는 마을의 정신적 지도자인 할머니처럼 생긴 수녀님이 글을 쓰고 있던 내게 다가와 저녁 미사에 참여하지 않겠느냐고 묻길래 그렇지 않아도 갈 생각이었다고 했다. 순례자들을 살펴보시고는 필요한 말들을 건네는데 현자의 풍모가 넘친다. 헝가리 출신 안나마리아에게 조곤조곤 속삭이듯 순례자에게 생기는 통증을 완화하는데 필요한 것을 설명하는데 설득당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무릎이 좋지 않은 그녀는 이 알베르게에서 하루를 더 머물고 경과를 보기로 하였다. 의사를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걷다 생긴 무릎 통증에는 쉬는 것이 가장 좋은 약이다. 아침에 길을 나서며 걷지 않기로 하고 하루를 쉬기로 한건 참 잘한 결정이라 이야기해 주었다. 내가 이야기했으면 설득시킬 수 있었을까? 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 받아들이는 태도가 다를 수 밖에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깨닫는다. 어쩌면 우린 모두 설득당할 준비를 하고 살지만 어떤 태도로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받아들이기도 하고 꼭 필요하지만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괜한 거부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차가운-맥주_resize.jpg

온 몸의 수분이 말라가는 시점에 들이키는 맥주는 생명의 감로수다. 하지만 이도 지나치면 아니한 만 못하다.
 

 

첫 잔이 너무 맛있었던 탓에 뿌엔타라레이나 구시가지 카페 골목에 있는 Bar를 돌아다니며 종류별로 맥주를 마셨다. 저녁으로 시킨 바게트 샌드위치에 곁들여 스페인산 화이트와인도 한 병 비웠다. 이때까지 좋았는데 리카드로가 한 병을 더 마시자 한 것이 화근이다. 결론은 어찌 숙소로 돌아왔는지 기억이 없다. 새벽에 깨니 난간도 없는 이층 침대 윗칸에서 가지런히 누워서 잘 자고 있기는 하다. 순례자가 만취했으니 어찌 보면 이 짓도 해선 안 될 일인 것 같기는 하다. 사단은 그로부터 두어 시간 지난 다음에 생겼으니..

2019. 7. 14.

오늘의 사족 1. 무릎 아대를 마리아에게 주고 수저는 알베르게 식당에 두고 왔는데 배낭 무게가 훨 가벼워진 것 같다. 나흘 만에 체력이 좋아질 리가 없는데 어쩐일인가 의아해 하며 가는 길을 재촉했다. 2. 리카르도가 어제부터 스틱을 찾더니 오늘 길 가다 누가 버리고 간 스틱을 하나 주워서 좋아라 한다. 그러고 보니 내 스틱은 어제 숙소에 두고 왔구나! 아직은 쓸 일이 없어 배낭에 달고 다녔는데 스틱 무게가 빠졌으니 늘 매던 배낭이 가벼워진 건 너무 당연하다. 3. 술 마시고 노는데 정신이 팔려 글 쓰는 걸 하루 건너 뛰었더니 기억이 가물하지만, 어찌 보면 오늘의 즐거움이 중요하지 지나고 나면 별거 있겠나싶기도 하다. 글을 왜 써야하나 하는 회의가 살짝 들기도 했다.



Camino Day 5. 까미노에서 연애질

새벽에 깼는데 퍼뜩 어제 널어놓았던 빨래 생각이 났다. 이슬 맞았으면 어쩌나 하고 나갔는데 빨래걸이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다시 돌아 와 벙커베드 주변을 서성이는데 잠에서 깬 리카르도도 모르겠다 한다. 잠시 몇 마디 더 나누는데 옆 베드 윗칸 젊은 친구가 오더니 조용히 하란다. 옆에 들릴 정도로 소리를 내지 않았는데 분위기가 심상찮다. 어젯밤 기억이 없는 나로선 뭐라 대꾸하기도 그렇고, 술은 덜 깼고, 잠은 더 오고, 사람들은 일어나 출발 준비를 하는데 나와 리카르도는 계속 잠을 청하기로 하다.
느지막이 일어나 주섬주섬 챙겨서 신발장에 덩그러니 마지막으로 남은 트레킹화를 찾아 신고 나오는데 새벽에 그 청년이 출발도 않고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 오더니 정색을 하고 항의한다. 너희들 어제 너무 취했고 특히 나는 바닥에 누워 있어서 자기가 지나가다 밟을 뻔했다고.. 어쨌던 걱정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는데 눈길이 사납다. 온통 선의로 가득한 이들만 보다가 이 친구는 어찌하여 이러나 싶은 것이 기이하다.

리카르도와 작별하다
공립 알베르게에서는 식사를 직접해서 먹는 시스템이다. 베드는 5유로여서 이용자가 넘치긴 하지만 아침을 꼭 많이 잘 먹어야하는 나로서는 좋은 선택은 아닌 듯하다. 다행히 어제 한 빨래들은 잘 개어져서 배낭 안에 고이 모셔져 있다. 우렁각시가 있을리도 없고.. 거참.. 기억이 없으니 누구한테 물어 볼 수도 없고.. 아침도 거르고 길을 나서는데 기분이 좋지 않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오전에 쉬지 않고 계속 걸었다. 어제에 이어 황금색 밀밭이 순례길 좌우로 펼쳐져 있고 추수를 마친 들판엔 작은 성채만한 밀 짚단들이 쌓여 있다.

 

 

밀-짚단_resize.jpg

막 추수를 끝낸 들판엔 짚단들이 성처럼 쌓여 있다.
 

 

그렇게 풍요의 길을 가는데 마음은 휑하다. 리카르도는 중간중간 담배를 피우기 위해 쉰다. 도상에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하며 인사하고 자연스레 리카르도와 작별했다.
쉬지 않고 네 시간을 걸었더니 왼발바닥에 다시 신호가 온다. 나무 그늘 아래 벤치가 보여 갔더니 연인 한 쌍이 점심을 막 마치고 인사를 한다. 그렇게 큰 오디나무는 처음 보았다. 가지마다 오디가 옹골차게 달려 있다. 어제 저녁 남은 샌드위치를 점심대신 우적우적 먹었다. 상냥한 시뇨리따가 오디를 한 움큼 따서 물에 헹군 다음 내게 내밀었다.

 

 

오디-한-움큼_resize.jpg

 


자연스레 몇 마디 오고 갔다. 그리고는 둘이 ‘오디 던져 입으로 받아먹기’ 연애질을 시작한다. 보기 좋다. 이 둘은 국적이 서로 다르다. 까미노 시작 전부터 연인이었는지 길에서 만난 사이인지는 몇 마디 대화로 알아차릴 수 없었다. 하기야 국적이며 연애의 시점이며 그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랴 싶었다.
 

 

오디-던져-입으로-받기_resize.jpg

넓은 오디나무 그늘 아래에서 오디 던져 입으로 받아먹기는 참 좋은 연애의 방법이다.
 

 

기억의 복기
어디까지 가서 오늘 밤을 보내야 하나 하다가 애초에 계획했던 마을을 지나치게 되었다. 다리가 아파오기는 했으나 마을이 썩 마음에 내키지 않았음에 분명하다. 수도꼭지를 틀면 물과 와인이 공짜로 나오는 수도원 옆을 지나가는데 첫날 오후 따가운 햇살아래 가파른 피레네 산맥을 같이 오르던 독일 청년을 만났다. 그의 이름이 마티아스이다. 오늘 통성명을 하였다.

 

 

수도꼭지와-와인꼭_resize.jpg

수도꼭지(오른쪽 Agua)와 와인꼭지(왼쪽 Vino)가 달려있는 성당 외벽, 따르다 흘린 물과 와인을 다시 모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웃으며 아침 늦게까지 자는 것 같더니 괜찮냐고 묻는다. 이제야 어제 밤을 복기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의 전언에 따르면  우리는 어제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는 그리 늦지 않은 밤에 와서 즐겁게 이야기 하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오늘 아침 눈을 부릅뜨고 나에게 항의한 건 어떻게 된 것인가? 필름 끊기도록 마신 내가 자다 말고 이층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누웠다가 다시 침대로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리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 않는다. 각설하고 걸으며 어제 공립 알베르게 도착한 후부터 기억을 더듬어 보니 늦게 도착한 우리는 마지막 남은 입구쪽 벙커베드를 배정받았고 우리보다 조금 먼저 온 그 커플은 바로 옆 침대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을 처음 보았을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둘의 대화가 냉랭하다. 샤워를 하고 왔는데도 그 분위기가 여전하였다. 맥주가 급했던 나는 그들 앞에서 바지를 갈아 입었다. 속옷까지갈아 입을 것이었으면 은밀한 곳으로 가서 했겠지만 바지 정도를 갈아 입는건 그냥 모두들 편하게 자기 침대 옆에서 한다.  그가 화난 이유가 순례자가 만취해서 온 것 때문인지 자기 여친 앞에서 바지를 갈아 입은 것 때문인지 아니면 우리가 너무 즐겁게 대화를 한 것 때문인지 알 수는 없으나 이들의 연애질은 쉽지 않아 보였다.

오늘 도착한 알베르게는 집의 다락을 개조한 곳인데 순례자들이 남긴 글과 그림으로 가득한 벽과 조용한 마을이 내다 보이는 조그만 발코니가 있다.

 

 

알베르게-벽-장식_resize.jpg

순례자들이 남긴 글과 그림으로 가득한 알베르게 침실의 벽, 세상 모든 문자가 다 쓰이기를!
 

 

마을을 보면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짐작이 간다. 앞으로 번잡한 도시 그리고 공립 알베르게는 피하고 작은 마을, 작은 알베르게을 찾게 될 것이다.

2019. 7. 15.


 

말타는-아이들_resize.jpg

말 타고 동네 한 바퀴 도는 아이들, 진심 부러웠다.
 


오늘의 사족 1. 학생들 한 무리가 말을 타고 동네 한바퀴 하는 모습을 하염없이 쳐다보다가 말 타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2. 오늘 알베르게에 묵는 사람은 여덟이다. 나와 독일친구, 한국에서 온 청년 둘, 모녀 한쌍, 시애틀 레이디 그리고 72살의 프렌치 할아버지 그는 5월 12일에 파리 북쪽 고향에서 순례를 시작했다고 한다. 할아버지 주무시는 숨소리가 거칠어 살금살금 비어 있는 방으로 가서 잠을 청했다. 나는 누군가에게 소란스럽지는 않은지 저어한 마음이다.

 


Camino Day 6. 이케아(IKEA)를 위한 변명

성정이 좁아터진 탓에 난 크고 많고 화려한 걸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이케아를 처음 갔을 때도 그러하였다. 매장이 너무 커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하지만 미니멀한 디자인의 그릇과 유리잔 그리고 주방용품들이 착한 가격으로 진열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걸 보고는 처음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제 와서는 다국적기업으로 세계 곳곳에 대형 매장이 있는 이케아가 용서가 될 뿐 아니라 칭찬을 해 주고 싶은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할 수 없다는 자기변명에 가득한 왕조시대의 레토릭은 진작 쓰레기통으로 보냈어야 하는 수사(修辭)이다. 나라님이란 허명도 사라진지 오래고 짧지만 공화의 새로운 전통을 다져 세상에 없던 민주주의를 세워나가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시점에 걸맞지도 않다. 길을 걷다 왜 이케아를 위한 글을 쓰게 된 것인지 나로서도 알 도리가 없다. 시작은 유럽의 중심이라는 파리에서 파견을 나와 살면서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면 넓디넓은 밀밭과 포도밭을 보고나서부터 인지도 모를 일이다. 옥수수 밭이야 공부하던 오하이오에 살면서 끝도 없이 보기는 했다. 하지만 그 시절엔 생각이 지금에 미치지 못하였다.

 

 

들판에-성처럼-쌓여있는-짚단들_resize.jpg

들판에 성처럼 쌓여 있는 짚단들
 

 

오늘 길 가다 추수가 끝난 들판에 밀 짚단 성처럼 쌓여 있는 모습을 보고 뜬금없이 만석꾼 생각이 났다. 지난겨울 휴가 때 시작하여 육  개월에 걸쳐 읽은 토지에 평사리 최참판도 떠오르고.. 벼 만석을 내려면 한마지기(200평, 660제곱미터)에 한 섬씩 잡아 660,000제곱미터이니 2 곱하기 3.3킬로미터 정도되는 토지가 정확히는 논이 필요하다.
 

 

들판-가운데-마을_resize.jpg

들판이 끝나는 지점에 마을이 있다. 저렇게 넓은 들판 위에 마을이 섬처럼 떠 있다

 

 

여기 스페인 농부가 트랙터 몰고 추수한 들판을 갈고 있는 모습을 보다 오만갈래로 생각이 춤을 춘다. 농업생산성의 비약적인 증가는 쟁기질과 수확한 곡식을 먹을 수 있도록 하는데 가축을 이용하면서 부터이다. 벼농사 짓는데 소 한 마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소를 몰고 일 해본 사람은 안다. 석유에너지에 기반을 둔 거대한 트랙터와 파종기와 수확기를 갖춘 이후 농부 한사람이 생산할 수 있는 곡식의 양은 벌판에 성곽처럼 쌓여 있는 밀짚단을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저 이 스페인 농촌은 평사리 최참판이 동네 곳곳에 널려 있는 것이다. 10킬로미터 때론 더 먼 거리를가야 하나씩 나오는 스페인 농촌 동네에서는 밭의 단위가 몇 백미터가 아닌 몇 킬로미터로 끊어서 봐야 할 정도이다. 이러니 만석꾼이 동네마다 수두룩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 곧 들판에서 더 이상 농부를 볼 수 없는 세상이 올 것이다. 집안을 돌아다니며 청소하는 로봇이 어느덧 대세이고 잔디 깎는 기계는 GPS좌표를 입력하면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구역을 알아서 정리한다. 드론으로 농약을 치고 비료를 주고, 쇼핑할 때 카트를 밀고 다니는 건 옛말이 되고 알아서 따라오는 자율주행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아니 이미 일부 도시에서는 이런 개념을 적용한 서비스들이 출시되어 있다. 논과 밭 같이 구획이 일정한 곳에 정해진 순서대로 작업하는 농업의 자동화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냥 단순하게 아주 거칠게 생각하면 그 다음 남은 문제는 분배의 문제인 것이다.

품위 있는 삶에서 필요한 게 무얼까.. 사랑하고 살아갈 수 있는 공간, 정갈한 식탁과 음식, 그리고 노래, 춤, 뜀박질 그리고 멍때리기 같은 거 하고 사는 것이 아닐까?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해 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케아에 진열된 그 미니멀한 그릇들에서 빌러로이 웨지우드 로열앨버트 등속에 비견되는 디자인을 구현하고, 그 그릇들을 1, 2불에 팔 수 있다면.. 세상에 모든 가난한 연인들의 식탁에 파라오와 시황제가 썼던 것만큼의 우아한 디자인의 식기를 이케아가 제공할 수 있다면 어찌 그들을 위한 변명의 글을 쓰지 않을 수 있으리오..

2019. 7. 16.


 

밀-짚단-위에서-서서_resize.jpg

밀 짚단 위에 서서

 

오늘의 사족 1. 길옆에 짚단이 있길래 올라가 보았다. 족히 1미터는 되 보인다. 글 안에 있는 사진의 쌓여진 짚단 높이가 10미터 넘는다는 이야기다. 2. 여섯째 날 정도 되니 호흡이 맞는 동행 친구들이 생긴다. 첫날부터 숙소가 자꾸 겹치는 독일 청년 마티아스, 5개월째 여행하고 있다는 아르헨티나 친구 마우로 이렇게 셋이 아침부터 같이 움직였는데 32킬로를 6시간 10분 만에 걸었다. 오늘 알베르게는 성당에서 운영하는 기부형식의 정갈한 곳이다. 성당 앞 카페에서 맥주 한 잔씩 돌렸다. 장에 간다길래 2유로 주고 과일 좀 사달라 했다. 복숭아를 잔뜩 사왔길래 잘라서 함께 먹었다.

 

 

스페인-복숭아_resize.jpg

자글자글 끓는 태양아래 익어 달고 맛있는 스페인 복숭아, 순례기간 내내 과일가게가 보이면 어김없이 들어가 몇 개씩 사서 배낭에 넣어 다니면서 수분과 당분을 보충하였다.

 


Camino Day 7. 나의 몸은 누가 지배하고 있나?

힘들다. 오늘 바람도 살랑이고 구름이 하늘을 덮어 화살 같이 내리 꽂히는 햇살을 피할 수 있어 걷기 좋다고들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조건이 본인의 컨디션보다 중요하지 않다. 걷는 속도는 시간당 5km 정도로 속보에 가깝고 중간에 쉼을 모르는 친구들과 오전 내내 같이 걸었으나 위장에서 아침 먹은 것이 내려가지 않는다. 점심으로 어제 저녁 먹고 남은 복숭아 하나로 때우고 계속 걷는다. 오후에는 약간 어지럽기까지 하다. 이러면 일사병 증세인데 살살 걱정이 되기까지 하다. 땀도 그냥 나는 것이 아니라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두-동행자_resize.jpg

서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어 아침나절엔 늘 자신의 긴 그림자를 보고 걷는다.
지칠 줄 모르는 나의 까미노 동반자들, 하지만 이도 과유불급이라.. 왼쪽 아르헨티나에서 온 마우로는 유난히 크고 무거운 배낭을 매고 강행군을 하다 결국...



아드레날린의 분출
생각이 몸을 지배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침나절에 받은 메일 한통으로 온통 신경이 그 쪽으로 가 있으니 걷는 게 아무 생각 없이 평온할리 없다.

요약하자면 동남아시아에 있는 어떤 대학으로부터 공식 초빙을 받게 되었는데 15개월 단기 계약직이지만 리서치 센터를 책임지고 만드는 일이라 메일 받은 직후부터 뇌에서 아드레날린이 마구 솟구치는 것이 아닌가!

기실 난관은 이제부터이다. 사회생활 하시고 있는 또는 하신 분들은 설명하지 않아도 앞으로 내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며 소속된 곳에서 본인이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지 충분히 예상 할 수 있으리니 이에 대한 설명은 줄이고자 한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세상 굴러가는 것이 나의 조건이나 원하는 바대로 되지 않다는 건 진작 깨우친 바가 있고, 이제부턴 상황이 어찌 되어 가는지 관조하며 세상이 원하는바 그대로 살자고 편한 데로 생각한다. 하지만 가슴 아래께가 하루 종일 뭐가 걸린 듯 옮기는 걸음걸음을 괴롭히니 무심히 세상의 결정대로 살자는 생각은 허위의식의 발로이지 진정한 깨달음에서 나오는 평정의 경지는 아닌 모양이다. 이 길을 마치면 무심한 상태가 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생각이 몸을 지배하는 것이 맞는가 싶기도 하다.


2019. 7. 17.

 

묘지-입구_resize.jpg

묘지 앞을 지나며 중얼거린다. ‘하늘이 부르기 전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자!’
 


오늘의 사족 1. 동네 지날 때 마다 만나는 묘지 2. 부분 최적(local optimum) vs. 전체 최적(global optimum): 조직 관리 측면에서 Global optimum과 Local optimum 사이의 갈등은 필연적이다. 의사 결정자는 늘 이 둘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전체 최적을 추구하면 부문 최적이 희생되어야 하고, 부분 최적의 선택에는 전체 최적의 후퇴가 동반하기 마련이다. 우리 기관의 입장에서는 초빙제안을 허락하면 15개월 동안 인력 유출이 발생한다(부분 최적의 희생). 우리 사회로 시각을 넓혀 보면 제안된 자리는 우리나라와 그 나라와의 학문/연구/산업 등 다양한 교류를 촉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전체 최적 발생). 하지만 이런 전체 최적화 답안은 선택하기 용이하지 않음을 어렵지 않게 유추 할 수 있다. 의사결정은 국지적으로 이루어지고 부분 최적화의 범주를 벗어나기 어렵다.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Camino Day 8. 걷는다는 것

어찌된 일인지 너무 일찍 깨서 다시 잠을 이루는 과정을 순례기간 동안 반복한다. 평소에는 한번 잠 들면 깨지 않고 일곱 여덟 시간은 쉬이 자는 나로서는 이번 순례길의 체력소모를 감안하면 10시쯤 잠 들어 새벽 2시에 깼다가 다시 잠드는 패턴이 기이하기만 하다. 급기야 오늘 출발할 때는 입술이 부르트려고 한다.
하지만 어제보다 걷기가 수월하다. 날도 뜨겁고 동행하는 이들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하여 꽁무니를 쫓아가기가 버겁지만 몸도 맘도 괜찮다. 무엇보다 페이스 유지가 장거리 트레킹에 중요하니 오버하지는 않는다. 다음 그늘에서 기다려 주는 게 예상되니 뭐 급하게 뒤를 따라야 할 이유도 없고 또 어쩌면 그렇게 헤어지더라도 그런가 보다 하면 될 일이다.

 

 

까미노와-동행자들_resize.jpg

작열하는 태양아래 끝없이 펼쳐진 길을 걷는다.

 

생각이 없어짐이 어찌 보면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라기 보다는 물리적인 조건의 열악함, 육체의 극단적인 고단함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작열이라는 표현 말고 다른 형용사를 찾을 수 없는 태양 아래에 그늘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길을 끊임없이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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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 지어진 알베르게 입구, 너무도 당연히 이런 날씨라면 이런 집을 짓고 살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성당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 안으로 들어서면 두꺼운 돌로 지어진 집에서 풍겨 나오는 그 서늘함이 우리를 맞이한다. 순례자 여권에 도장을 찍고 베드를 배정 받고 스트레칭을 하고 땀을 씻어낸 다음 조물락 거리며 빨래를 한다. 넓은 중정에 빨래를 널고 찬 맥주를 마신다.
 

 

빨래를-해서-널고_resize.jpg

알베르게 안뜰에 길을 온 몸으로 담아낸 흔적을 지워낸 순례자들의 빨래가 널려있다. 

 

 

걷는 다는거 별거 아니다.
여덟시간 걷고 그리고 그늘에 앉아 살랑거리는 바람을 맞고 있으면 그냥 좋다. 사는 것도 그런거 아닐까?

 

 

그리고-그늘에-앉아-찬-맥주를_resize.jpg

편안한 시간이다. 찬 맥주를 들고 그늘에 앉아서 바람에 마르는 빨래를 바라보며..
 

2019. 7. 18.

 

담벼락에도-포도가-자라고_resize.jpg

담벼락에도 포도가 자라고
 


오늘의 사족 1. 입술에 잡히려던 물집이 걷는 도중에 점점 작아진다. 발에 잡혀야할게 왜 입술에 생길까 생각하며.. 2. 스페인 와인으로 유명한 리호아주 가까워지니 와인 산지답게 포도밭이 사방에 널려있다. 3. 동행한 친구 중 하나가 어제 수도원 담벼락의 공짜 와인에 내가 산 맥주 그리고 너무 맛있었던 스파게티 탓에 밤새 배앓이를 했다고 한다. 혼자 조용히 나가서 gran reserva 급 리호아 와인을 한 병 더 마시고 와야 하나 고민 중이다. 4. 8일간 걸었던 까미노 첫 구간 루트, 앞으로 스페인의 서북쪽 끝에 위치한 Santiago de Compostela로 서진해서 나아갈 것이다.


8일간-걸었던-까미노-루트_resize.jpg

까미노 8일간 걸었던 루트

 

김영국-프로필이미지.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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