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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별의 다큐이야기] 유성기업 이야기 1 - 도시락 싸들고

posted Dec 0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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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로 전공자라고 들었다.

 

설마 하며 동호수를 찾아간 열린 문, 방충망 너머에 그이가 있었다. 오전 11시, 이미 도시락은 다 싸놓은 상태였다. 말이 도시락이지 양이 좀 많았다. 커다랗고 질긴 비닐 쇼핑백 하나 가득 반찬을 담은 용기가 가득했고 전기밥솥채로 카트에 실어야 운반이 가능했다. 집밥이 그리운 농성장의 사람들에게 집맛 그대로 배달하기 위해서는 집에서 쓰는 접시와 수저도 챙겨야 했다. 짐을 나르는 그이는 오십견이 왔다고 했다. 그 몸으로 전날 장을 보고 새벽부터 요리를 했다. 2014년 봄부터였으니 벌써 만 3년이 넘었다.
시작은 서대문 순화동 철거농성장, 철거민들 중에 용산참사로 남편을 잃은 부인이 있었다. 상담 차 방문했다가 ‘드시고 싶은 건 있’냐고 물었더니 “콩국수”라는 답이 돌아왔다. 다행히 농성장에 전기와 가스가 들어와 반조리 음식을 가지고 가서 나머지 요리를 해서 함께 식사를 했다.
“밥을 같이 나누니까 고통의 이야기가 아니라 일상 이야기를 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매주 방문하기를 1년 가까이, 마침내 문제가 해결되고 농성장이 사라졌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기아자동차 고공농성장이었다. 2015년 추석 즈음이었다. (구)국가인권위원회 건물 꼭대기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소화가 안 된다고 해서 처음엔 죽을 쑤어 갔다. 소문이 나자 여기저기 다른 손길이 이어져, 돌아가며 매일 도시락을 올려 보낼 수 있었다. 그 때부터 집밥 프로젝트에는 <도시락 싸들고>라는 이름이 붙었다. 세 번째 찾아간 곳은 동양시멘트 농성장, 그리고 지금 ‘도시락 싸들고’ 가는 곳은 6년째 투쟁중인 유성기업, 내가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인 ‘유성기업’이었다.   

 

사진을 배우러 간 곳에서 옆자리에 앉은 노신사가 무턱대고 재능기부를 하라고 했다. 20년 넘게 글밥을 먹었지만 대놓고 원고료도 없는 청탁을 받긴 드문 일이었다. 청탁이라면 부탁조여야 했는데 빌린 돈 재촉처럼 반강제로 요청받은 기부였다. 수많은 교회에서 숱한 이름으로 하는 선행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건만 자신들의 행위를 자화자찬하듯 알리고 싶어 하는 그런 일에 굳이 동원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도시락 싸들고’란 프로그램에서 가는 곳이 ‘유성기업’이라고 했다. 그 때 마음이 흔들렸다.

 

 

 

유성기업에 대해 처음 알게 된 때는 매주 광장에 나가던 지난겨울, 12월 10일 제7차 범국민행동집회였다. 피켓에서 본 ‘현대차가 지시한 노조파괴로 유성기업 노동자 한광호가 죽었습니다.’ 한광호 열사는 2016년 3월 17일, 사측 노조탄압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로부터 1년여가 흘러 촛불집회가 끝날 때쯤, 유성기업 회장이 구속되었다. 노사 간의 싸움에서 보기 드문 노측의 승리였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양재동 현대자동차 본사 앞에서 노숙농성을 이어가고 있었다. 왜일까? 故한광호는 누구고 유성기업은 도대체 어떤 회사고 왜 그들은 6년째 이 싸움을 계속해 나가고 있을까,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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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5일 제17차 범국민 촛불집회 광화문 광장에서

 

 

그런데 유성기업 농성장에 매주 도시락을 싸들고 가는 그이를 만났을 때, 또 다른 궁금증이 생겼다. 먹고 살만한 중산층 여성들의 우아한 이웃사랑실천 정도의 그림을 예상했던 내게 복도식 좁은 아파트, 반바지에 맨얼굴인 그이는 뭔가 달랐다. 집주인이 설치한 에어컨도 북극곰을 살리기 위해 가끔 트는 우리 집보다 더한 그 집엔 에어컨 대신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거실에 짜임새 있게 배치된 수납형 원목가구의 출처를 물어봤더니 남편이 손수 제작했단다. 교회에서 만나 결혼한 남편은 함께 투쟁하는 동지이며 부부 사이는 매우 좋다고 했다. 부부에겐 두 아들이 있는데 그 중 둘째 아들이 세월호 아이들과 동갑이라고 했다. 그이는 세월호 참사 전의 스스로를 ‘정부 말을 잘 듣는 무뇌아’라고 했다. 그랬던 그이가 세월호가 가라앉은 다음 날 진도에 갔다. 거기서 제대로 구조하지 않는 것을 목격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5월 1일부터 시청 앞에서 매주 첼로 연주를 했다. 그러한 삶의 변화를 남편과 동시에 맞았다. 온가족이 틈날 때마다 거리로 나갔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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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 싸들고> 윤선주 조합원

 

 

‘선주’라는 이름이 새겨진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마실 때, 나는 길선주 목사를 생각했다. 얼마나 많은 선주들이 예수의 삶을 살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집을 나설 때 그이는 맨발에 슬리퍼를 꿰어 신었다. 그 거침없는 발을 보자 그이가 좋아질 것 같았다. 그리고 15년 된 우리 집 차보다도 더 허름한 그이의 승용차에 오르며 나는 그이가 완전히 편해졌다. 그이는 운전을 아주 잘했다. 말도 잘 했다. 우리는 함께 차를 타고 가면서 매우 재미있는 대화를 했다. 
   
“교회의 풍요로움이 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거기는 내가 소외된 천국이었어요. 거기 있는 천국은 온전히 내 것이 아닌데 현장은 천국이 온전히 내 것이었어요. 그게 진짜 하늘나라라는 걸 많이 느껴요.”
“상대적인 빈부격차인가요?”
“교회에서는 풍요를 얘기하는데 교인들은 가난해요. 누구의 풍요인지 모르겠어요. 가진 자들은 이웃 사랑했다고 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의 베풂을 받는 도구가 되지요. 그런데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평등해요.”
“주는 기쁨인가요?”
“아니요. 그들한테 제가 받지 않는다고 할 수 없어요. 제가 뭘 주러 나가는 게 아니라 함께 먹으려고 나가는 거예요. 다 작은 예수들 같은 느낌이 들어요.”

 

현장은 그이에게 존엄성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니 그이의 도시락에 견장을 찬 듯 선행을 베푸는 생색과 무례함은 없었다. <도시락 싸들고>는 협동조합 길목으로부터 주당 반찬값 5만 원과 상담료 2만 5천 원, 도합 7만 5천 원을 받는다. 그 중 5만 원은 부식 값으로 쓰고 2만5천 원은 모아두었다가 곳곳의 공동 투쟁단에 간식을 보내준다. 싸움의 현장에서 주먹밥 만드는 역할이 그이의 일이다. 농성이 끝나고 농성장에 아무도 남지 않아야 도시락을 싸들고 가는 일을 멈춘다.

 

“저는 정몽구 구속에는 관심이 없어요. 농성장에 사람이 있으면 찾아가는 거죠. 그분들이 ‘아유~이번엔 밥이 맛있어요.’ 그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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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유성기업 농성장을 찾는 <도시락 싸들고>

 

 

그이와 나는 많이 닮았다. 그이의 작은 아이와 나의 큰 아이가 세월호 아이들과 동갑인 것도 같았고, 그 2014년을 기점으로 인생이 완전히 뒤바뀐 것도 똑같았다. 우리는 조직도, 투쟁 상황도 잘 모른 채 다만 거리에 나앉은 사람들을 보면 그저 마음이 아파서 다가간다. 그이는 양손 가득 따뜻한 집밥을 들고 가지만 나는 그냥 그들 곁에 있거나 그것도 쑥스러우면 멀찍이 서 있다 올 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사진을 찍거나 고작 열 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드리는 일밖에 없다.
그이로부터 자신과 같은 이들에 대한 미담을 들었다. 가깝게는 함께 <도시락 싸들고>에 힘을 모아주는 두 명의 동지들과 전국 각지의 따뜻한 손길들. 그 중 내게 재능기부를 강요했던 그 노신사가 본인 생일에 유성기업 농성장에 음식을 싸들고 찾아와서 식탁보를 선물해주고 갔다고 했다. 그 말을 전해 듣고, 나는 그의 지나치게 당당했던 청탁 태도를 이해하기로 했다. 적어도 행동하는 이에게는 말할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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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15일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

 


사실 유성기업은 청탁이 아니라도 기회가 닿으면 투쟁소식을 알고 싶던 곳이었다. 그들이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에서 농성을 하던 9일차, 나는 이미 그곳에 갔었다. 길 건너 커피숍 앞에는 노조원들이 땅바닥에 앉아있었고 뙤약볕으로 달궈진 천막 안에는 두 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단식투쟁이 아님을 확인 후, 다행스러워하며 그 옆 류가헌 갤러리에 갔었다. 사진전 <아무 것도 아닌 일들>의 사진작가 유석이 하얀 벽에다 써 놓은 ‘나는 그저 보았을 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 까만 활자들이 가슴에 와 박혔다. 나 역시 그저 보았을 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열패감으로 죽을 것 같던 지난 3년이 되살아났다. 죽기 살기로 매주 광장에 나갔던 그 겨울이 지나고, 마침내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봄을 찾았다. 세월호 3주기가 되자 탈진한 나는 나름의 탈상의식을 치렀다. 그리고나서 찾아간 곳이 기아·유성기업 청운동 농성장이었다. 그로부터 두 달여 만에, 그이와 함께 양재동 현대자동차 본사 앞 유성기업 농성장을 찾은 것이었다. 그 천막 안에는 다섯 남자가 있었는데, 그 중 그이에게 감사의 뜻으로 정선에서 옥수수 백 개를 보내준 분이 있었다. 순한 웃음이 만면 가득한 그는 해고 조합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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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호에 계속 이어집니다.

 

일곱째별-사진_축소.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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