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르포]

efe383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길뜬별 | 남도 순례길 2 - 홀로 걷다. 자신의 길을 찾아서

posted Jul 30, 2021
Extra Form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길뜬별 | 남도 순례길 2 - 홀로 걷다. 자신의 길을 찾아서

 

 

# 지난 이야기 

정읍에서 나와 땅끝마을로 갔다. 

해남~강진~장흥~보성~벌교~순천까지 8일간 160km를 홀로 걸었다.

그렇게 걸어서 눈물이 말랐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걸어서 마른 게 아니라 마를 때까지 걸으면 되니까.  

이후 5일간 80km를 더 걸었다. 

 

혼자 2주간 240km를 걸었다. 

눈물이 마를 때까지 걸어서 자신의 길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 정도 못하겠는가.  

 

길을 뜬다는 것은 비움이요 성찰이고, 

길에 뜬 것은 존재요 생명이고, 

길에서 찾는 것은 이상이요 운명이다.  

 

 

길뜬별 / 남도 순례길 2 - 홀로 걷다. 자신의 길을 찾아서

 

 

☆ 제 9일. 6월 22일 화. 순천~광양 11.1km+여수=14.9km

살면서 행복한 순간으로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때가 있다. 

내 마음을 상대가 알아줄 때, 상대의 마음을 내가 알 때, 두 마음이 같음을 서로 느낄 때. 물이 쓸려갔다 밀려와서 평형을 이룰 때처럼 마음을 주고받다 하나가 될 때 충일감을 느낀다.

 

소중한 숙소에서 받은 예상치 못한 문자는 앞으로 무슨 길이 어떻게 펼쳐질지 전혀 모르고 떠나는 마음에 막막함 보다는 자신감을 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기겁을 할 광경을 목격했다. 

친환경농업선도마을 농지 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서있는 고압송전탑. 34만 5천 볼트 전압으로 8m 이내 근접시 감전이 된다는 경고문이 써 있는데 송전탑 바로 아래까지 농작물이 바짝 심겨져 있었다. 지지직 지지직 거리는 전류 소리에 머릿카락이 쭈뼛쭈뼛했다. 마침 사잇길 건너 텃밭에 할머니 한 분이 풀을 매고 계셨다. 차를 세우고 다가가 여쭤보았다. 

“할머니, 저 송전탑 아래 밭 누구 거예요? 저기서 농사지으면 위험할 텐데 그분 괜찮으세요?”

“사진 좀 찍어가서 저것(송전탑) 좀 뜯어내게 해 줘.”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미소는 평화로운 할머니와 마을 주민들이 걱정스러웠다. 순천시 해룡면 신기마을이었다.     

 

충격과 근심을 안고 순천종합버스터미널에서 광양터미널까지 걸었다. 예쁘게 정비한 자전거도로가 미끈하게 깔린 길이었다. 순천길 끄트머리에서 유산균음료 배달원이 전동차를 타고 지나갔다. 마침 목은 마른데 물이 떨어져 야채주스를 사마셨다. 대부분 생계를 짊어지기 위해 어두운 새벽부터 길을 나서는 배달원들. 멀어지는 전동차를 뒤돌아보며 그들이 조금이라도 더 편하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미끈한 자전거 도로가 고마웠다. 하지만 편리함은 자원의 소비와 직결되어 있다. 순천부터 속출한 송전탑으로 이미 번화한 광양의 모습을 예측할 수 있었다. 광양제철소의 번영과 더불어 도시계획에 의해 개발된 것으로 보이는 광양은 초입부터 깔끔하게 정비된 모습이었다. 광양예술창고와 전남도립미술관을 보자 어찌나 반가운지. 도시의 예술과 자연 사이에서 내 감각의 갈등은 진자운동처럼 흔들렸다. 광양터미널 앞 완행버스로 순천터미널에 돌아왔다. 

 

 

DSC03876-전기가-흐르는-탑_resize.jpg

전기가 흐르는 탑 

 

 

☆ 제 10일. 6월 23일 수. 광양터미널~중마터미널 16.4km

광양터미널 근처에 주차를 하고 편의점에서 따끈한 두유와 김밥으로 아침밥을 먹었다. 오른쪽 무릎에 파스를 붙이고 길을 나섰다. 그런데 교차로에서 길을 잘못 들어 4km 정도를 되돌아왔다. 광영시외버스터미널까지 가려고 했는데 4km를 남겨두고는 너무 힘겨워 중마터미널로 종착지를 바꿨다. 중마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광양터미널로 가서 차를 가져왔다. 그 길로 인터넷 지도에 있는 광영시외버스터미널로 가보았더니 찾을 수가 없었다. 근처 파출소에 가서 물어보니 광영시외버스터미널은 없어지고 대신 중마터미널이 생겼다고 했다. 헤맨 거리만큼 무리하지 않고 중마터미널로 노선을 바꾸길 잘 한 것이었다. 

 

비가 막 오기 시작하는 중마터미널 근처에서 콩나물국밥 한 그릇을 먹고 숙소를 찾기 시작했다. 도심의 모텔이나 호텔에서 잘 거라면 도보순례를 나서지도 않았다. 

윤동주 시인 유고가 보존됐던 정병욱 가옥을 찾아 망덕포구로 갔다. 그런데 기대했던 가옥은 보수공사 중이었고, 대신 근처에 농어촌 모텔식 민박이 있었다. 중국에서 온 마사지사가 대기 중이었다. 

오래 전 태국에서는 발마사지를, 캄보디아에선 전신마사지를 받아 본 적이 있다. 캄보디아 컴컴한 방에서 어린 여자노동자들이 온 몸으로 해 주던 마사지를 그 땐 아무 것도 모르고 받았었다. 한국에서는 아직 마사지실에 가 본 적이 없다. 더듬더듬 한국말로 자기 마사지 잘 한다는 중국 여자 성인에게서 전신마사지를 받으면 온몸의 근육통이 싹 풀릴 것 같았지만 도보순례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짓이라고 판단했다. 

방 안에 플라스틱 생수병 대신 정수기가 있었다. 비록 마실 수 있는 물의 양은 적지만 마음껏 물을 마실 수 있는 시설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도보순례에서 물은 필수다. 대부분 물병에 수돗물을 받아 마시는 산티아고에서도 나는 생수를 사마셨다. 물 갈아마시고 배탈이 날까봐 식사비를 아끼는 대신 물을 샀었다. 

숙소에 비치된 물과 커피믹스 한 봉에 휴식의 차원이 달라진다. 게다가 그날 커피믹스에는 글씨도 찍혀 있었다. ‘매우 칭찬해’. 글자들이 날아와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듯했다. 피로감이 30분쯤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DSC04014--_정병욱-가옥_resize.jpg

보수공사 중인 ‘흰 그림자’ 정병욱 가옥

 

 

☆ 제 11일. 6월 24일 목. 섬진강 휴게소~하동버스터미널 15.1km+벌교 산책=18.6km

아침 8시부터 9시까지 하동군청 앞에서 지리산 산악열차 반대 1인 시위를 한다는 소식을 청명으로부터 들었다. 아침 일찍, 응원차 망덕포구에서 하동군청으로 갔다. 

그날 1인 시위자를 만나 지리산 산악열차 반대대책위원회의 의견을 들었다. 하동 지리산 산악열차와 설악산 케이블카를 둘러싼 관과 민의 갈등 외에도 SNS를 통한 대중의 자기표현과 인정욕구가 자본과 만나 대규모 관광사업으로 변화하는 문화 전반에 대해 들었다. 

 

1인 시위가 끝나자 나는 하동터미널로 향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다시 망덕포구로 가기 위함이었다. 주차를 위해 잠시 정차했는데 갑자기 앞에 서있던 파란 트럭 한 대가 후진을 한다. 대관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트럭은 내차 오른쪽으로 밀고 들어와 운전석쪽을 들이받고 만다. 운전경력 26년이 넘어 안전운전은 기본이고, 생일선물로 받은 중고차 ‘탈핵브리드’를 몰던 3년 넘게 무사고였다. 왜 하필 도보순례 기간에, 왜 가만히 서있던 내게 이런 변고가 일어나는 걸까? 다행히 몸은 다치지 않았다. 트럭에서 운전자가 내렸다. 초로의 남자였다. 내 잘못은 하나도 없었지만 트럭 운전자라 무턱대고 화를 내지 않을까 하는 선입견이 있었다. 다행히도 운전자가 점잖으셨다. 심지어는 날 만나려고 나오지 않아도 되는 시간에 일부러 나와 사고가 난 거라고까지 말해주었다. 다소 안심이 되어 보험회사 처리를 기다렸다. 차는 공업사로 들어갔고 나는 렌터카를 받았다. 동급 신형차였다. 

 

천재지변이나 건강문제가 아니라면 순례를 중단할 순 없다. 기어이 다시 하동터미널로 가서 주차하려던 그 자리에 렌터카를 두고, 막 떠나려는 버스를 타고 망덕포구 쪽으로 갔다. 섬진강 휴게소에서 내렸다. 걸어야했기에 일단 근처 식당에서 재첩국을 한 그릇 먹었다. 그런데 한 2km쯤 걷다보니 계산을 안 하고 나왔다는 걸 알아차렸다. 인터넷 검색으로 식당에 전화를 해서 당일 순례 후 다시 찾아가 계산을 하기로 했다. 정신이 없긴 없었나 보다. 

 

처음 본 섬진강은 소문대로 너르고 완만했다. 엄마의 자애로운 미소처럼 바라보기만해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자전거도로 정도는 애교로 봐 줄 정도로 개발의 발톱이 할퀸 흔적이 별로 없었다. 강 위로 걷다가 강 가까이에 나있는 길로 접어들었다. 한참을 가다가 ‘여기에선 좀 쉬어줘야겠는 걸’이란 생각이 드는 의자가 있었다. 의자에 앉아 물 한 모금 마시고 일어서는데 깜짝 놀랐다. 배낭에 달고 다니던 ‘핵발전소 없이 안전하게 살자’ 몸자보가 사라진 거였다. 옷핀으로 달아서 여간해선 떨어지기 어려운데 그게 언제 없어졌을까? 

 

세월호 노란리본에 이어 탈핵 몸자보까지. 내 신념마저 비워야 한다면 그래야겠구나, 수긍하기로 했다. 모두 지우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면, 그게 이번 도보순례의 목적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고 여겼다. 어느 것으로도 누구를 대표하거나 상징할 수 없다. 사람은 그렇다. 마음 또한 그러하다. 하루에도 열두 번 바뀌는 게 사람 마음이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로 좌우되고 조삼모사(朝三暮四)에 넘어가는 것 역시 사람이다. 사람은 지극히 이기적이며 또한 한없이 이타적일 수 있다. 내가 걷는 것은 먼저 나를 위함이고 그 다음이 남을 위함이다. 누가 시킨다고 이 더위에 내 돈들여 이 고생을 자초할까? 그렇다고 내 힘이나 내 의지로만 걷는다고 말할 수도 없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다. 무작정 길을 나설 때가 많다. 가다보니 그만둘 수 없어 끝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 완벽주의 성향을 버리고자 일부러 중단하거나 변경할 때도 있지만 좀처럼 포기하지 않는 성미라 어떻게든 완주를 하긴 한다. 

그동안은 벗들의 도움이 있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없다. 함께 걸어준 벗들 덕분에 지금 내게 혼자 걸을 용기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안다. 내가 혼자 걷는 동안에도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그들이 내 어떤 면 때문에 나를 응원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진정한 친구라면 내가 무엇을 하든말든 나 자체로 인정하고 지지한다고 믿는다. 그런 게 친구니까. 

세월호 리본을 달아야만 희생자를 추모하는 것도, 탈핵몸자보를 달고 다녀야만 탈핵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길에서 만나는 차들이나 사람들 옷에 노란 리본이 보이면 반가운 건 어쩔 수 없다. 동질동류의 사람에게 친근감을 느끼는 건 자연스런 일이니까. 그건 태극기부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유유상종이 주는 안정감과 즐거움이 사람에겐 필요하니까. 어쩌면 리본이나 몸자보는 신념을 자랑하거나 행위로 위세하기 위함이 아니라 마음이나 뜻은 있으나 표현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힘과 위로를 주려는 ‘노란손수건’같은 상징이 아닐까? 

 

하루동안 아주 큰 사건들이 일어났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하나씩 잘 감당해냈다. 

 

 

DSC04083-저절로-비움_resize.jpg

저절로 비움

 

 

☆ 제 12일. 6월 25일 금. 하동강변나들이공원~악양 8.8km+최참판댁=13.5km

늦게 출발한 데다 그늘 하나 없는 뙤약볕 아래 강변을 걸었기 때문이었는지 걸음이 두 배로 느렸다. 세 시간을 걷고는 목적지를 코 앞에 두고 지나가는 버스에 올랐다. 더 걷다가는 일사병에 걸릴 것 같았다. 시골 버스는 만날 때 타지 않으면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특히 낮에는 더하다. 하동강변에 세워둔 내차로 갔다. 물먹인 솜처럼 몸이 한없이 처졌다. 찜통같은 차에서 정신을 잃은 듯 짧은 낮잠을 잤다. 

 

잠시 후 운전을 해서 평사리공원을 지나 최참판댁으로 갔다. 

윤씨 부인과 최치수와 서희가 살던 집들을 둘러보았다. 병수가 서희를 훔쳐보다가 길상에게 멱살이 잡혔던 담벼락이 어딜까 궁금했다. 서희가 김개주의 아들이자 제 어미와 도망친 김환을 숨겨준 사당의 마룻바닥도 보았다. 서희가 바라보았을 연못을 별당 툇마루에 앉아 바라보았다. 

최참판댁에는 도라지꽃들이 피어있었다. ‘투명하고 하얀 모시 치마저고리’의 서희같은 흰색과 보라색의 도라지꽃. 어딘지 애잔하고 단아한 모습, 꽃잎조차 흐트러지지 않는 절개에 식용으로 사용되는 생활력의 도라지꽃은 꽃말이 ‘영원한 사랑’이다.  

 

1926년 생인 박경리 선생님은 1946년에 결혼을 하셨지만 6.25전쟁 중에 부군을 잃고, 어린 아들도 잃으셨다. 딸 하나를 키우며 1955년에 등단하신 선생님은 1969년부터 1994년까지 25년간 <토지>를 쓰셨다. 

소설의 배경이었지만 선생님께서 ‘지도 한 장 들고 한 번 찾아와 본 적이 없는 악양면 평사리’. 그곳에 소설 시작 30년 만에 ‘작품의 현장’인 ‘최참판댁’이 들어섰고 ‘박경리 문학관’이 생겼다. 

그리고 나는 박경리 문학관에서 이번 도보순례의 목적을 깨달았다. 작년 5월 토지문화관에서 시작된 나의 독립, 그리고 정읍을 거쳐 악양에서 다시 만난, 돌아가신 박경리 선생님께서 살아있는 내게 해주신 말씀,

 

‘난 특별히 문학을 내 인생과 갈라 놓지는 않습니다.’    

-MBC <토지> 완간 10주년 특별대담 ‘작가 박경리’, 2004

 

2021년 6월, 울며불며 내가 왜 걷는 지도 모른 채 걸어온 남도 600리 길의 끝에서 살아있는 내 삶이 문학이고 문학이 내 삶임을 박경리 선생님께서 일깨워주셨다. 

 

 

DSC04161-박경리-선생님_reszie.jpg

DSC04196-나_resize.jpg

박경리 선생님과 나 

 

 

☆ 제 13일. 6월 26일 토. 최참판댁 입구~화개공용버스터미널 8.2km+쌍계사+쌍산재=11.8km

화개공용버스터미널에 차를 세우고 완행버스에 오르며 행선지를 묻는데 기사가 농담을 건넸다. 내가 웃으니 이것저것 물어본다. 해남부터 걸어왔다고 하니 “벌 받아요?”라고 한다. 기사는 쌍계사와 칠불사 자랑을 했다. 걷지만 말고 그런 데도 보고 다니라는 조언이었다.

 

최참판 댁 입구에서 내가 내리자 버스가 양쪽 방향지시등을 동시에 켜며 갔다. 나는 버스타고 온 길을 다시 거슬러 걷기 시작했다. ‘벚꽃, 녹차가 어우러진 19번 국도’ 아래로 ‘섬진강 백리 테마로드’가 있긴 한데 수해복구가 아직 되지 않아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해야만 했다. 도로교통공단에서 나같이 걷는 사람을 임시채용하면 도로상황 보고를 제때 받아 일처리를 참 쉽게 할 텐데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늘 한 점 없는 섬진강변의 정비되지 않은 들꽃길을 한참 걸었다. ‘꽃길만 걸으세요’의 꽃길은 웨딩마치 때 장식된 꽃이지 이런 꽃길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한참 걷다 문득 등산화를 보니  작년에 지리산 종주를 위해 새로 산 이태리제 등산화도, 여름용 등산화도 아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던 국산 등산화를 신고 있었다. 

수년 전 낯선 타국에서 800km를 걷던 나와 지금 한국의 남도길을 걷고 있는 나는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물론 나는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잘 안다. 많은 일들을 겪었고 여전히 걷고 있다. 다만 나는 꽃길만 원한 적이 없다. 인생에 꽃길만 있다면 그또한 얼마나 지겨울까? 꽃길이든 흙길이든 아스팔트길이든 돌길이든 나는 내게 주어진 길을 걷는다. 한발한발 쉬지 않고 걸어나간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른다. 생명이 끝나는 날까지 살아나아가야 하는 것처럼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걷는 것뿐이다. 시간을 절대 뒤로 돌릴 수 없듯이 인생도 전진뿐이다. 그러나 빠르고 넓은 길을 가느냐 느리고 좁은 길을 가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어찌보면 그것 역시 개인의 선택에 의한 것만도 아니다. 우리 모두는 그저 주어진 각자의 길을 갈 뿐이다.      

 

화개공용버스터미널에서 더 걸어야했는데 도저히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즐겨마시던 캔커피조차도 몸에 받지 않았다. 세워둔 차를 타고 쌍계사로 향했다. 

쌍계사는 도보순례 일정에 없던 곳이었지만 아침에 만난 버스 기사의 호의를 받아들인 거였다. 쌍계사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또 기면증처럼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잠시 후 일어나 사찰로 향했다. 

신라 성덕왕 23년(724년)에 삼법, 대비 두 화상이 당나라에서 선종의 육조이신 혜능대사의 정상을 모시고 봉안한 것이 그 시초라는 쌍계사는 입구에 걸린 ‘미얀마 민주주의 지도자 아웅산 수찌 여사와 88민주항쟁 학생지도자 민꼬나이의 안전과 승리를 기원합니다’ 현수막으로 초입부터 호감이 생겼다. 국보인 진감선사대공탑비와 경상남도 유형문화제 제 28호인 석등 외에도 보물이 가득한 사찰이었지만 내 눈에는 5층짜리 소각장과 대형차량 서너 대는 족히 그 그늘에서 쉴 수 있는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사적비를 등에 지고 있는 거북 발톱이 인상적이었다. 

 

쌍계사에서 나오는 길에 버스 한 대가 들어왔다. 좁은 교차로에서 차를 돌리는데 혹시나 하고 버스 운전석을 올려다보니 아침에 탔던 그 버스의 기사였다. 나는 함박웃음으로 기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버스에선 마스크를 착용했고 차에선 마스크를 벗은 채였다. 기사 역시 아래 승용차에 있는 나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버스가 아침처럼 양쪽 방향지시등을 깜빡깜빡 켜면서 반대 방향으로 멀어졌다. 버스기사는 자기 말 듣고 일부러 쌍계사에 찾아온 내 마음을 알겠지? 길에서 스치는 인연들이 반짝이는 순간이었다.       

    

내친 김에 다음 날 순례 길에 있는 쌍산재로 향했다. 마지막 날에는 관광 않고 오롯이 순례만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전라남도 제 5호 민간정원인 쌍산재는 조선후기의 고택으로, 정원이 궁금한 내가 순례길에서 특별히 선택한 두 곳 중 하나였다. 주말이라 더했겠지만 입구에 가득한 자동차들을 보면서 입장 전부터 걱정을 했다. 다행스러운 건 오후 4시면 마감인데 가까스로 입장이 가능했다. 무조건 택일해야 하는 음료 한 잔에 만 원. 반은 입장료인 셈이다. 아늑한 고택에 어울리는 아기자기한 소품으로 장식한 손님 맞이는 일품이었으나 예상대로 인파는 견디기 어려웠다. 넓디 넓고 고적했던 초암정원에 비하면 앉을 자리도 없는 쌍산재는 SNS 애호가 관광객을 위한 장소처럼 느껴졌다. 

손님들이 거의 나가고 한숨 돌리자마자 문닫을 시간이 되어 막 나온 쌍산재 바로 앞에는 초록빛 가득한 논을 가로질러 대형 고압송전탑이 주루룩 서있었다. 해주오씨 문양공 동정공파 22세손께서 훗날 이 꼴을 보셨다면 얼마나 통탄하셨을까, 조상님의 한탄이 귀에 들리는 듯했다.     

 

(순례 때는 지나쳐 다음에 다시 간 쌍산재 앞 당몰샘은 영롱한 물빛처럼 물맛이 맑고 깨끗하고 달았다.) 

 

 

DSC04241-인생이-꽃길이라면_resize.jpg

DSC04246-인생이-꽃길이라면_resize.jpg

인생이 꽃길이라면

 

 

☆ 제 14일. 6월 27일 일. 화개공용버스터미널~구례 화엄사 19.4km+화엄사 구층암=22.3km

홀로 도보순례 마지막 날이라 모양낸다고 친구가 준 분홍색 소목 천연염색 손수건을 목에 맸다.  

하동 화개버스터미널에서 구례군 토지면으로 가는 섬진강대로에는 인도가 거의 없다. 30~50cm 좁은 갓길로 걸어가는 건 나뿐만 아니라 차량 운전자에게도 위험한 일이다. 하는 수없이 기존의 걷던 주행 방향이 아닌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앞쪽에서 오는 차량을 봐야 대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속 60km인 일차선 도로 앞에서 달려오는 차들은 대부분 걸어오는 나를 피해 차를 조금씩 중앙선 방향으로 움직여 지나갔다. 그때마다 나는 운전자를 향해 꾸벅꾸벅 목례를 했다. 

인도나 자전거도로가 없는 길에서는 어쩔 수 없이 국도변으로 걸어야 한다. 그동안 걸어온 18번 국도, 2번 국도, 19번 국도의 수많은 차량들이 길가를 걷는 나 때문에 얼마나 불편했을까? 그 중 한 대라도 졸음, 음주, 무면허 운전이 있었다면 나는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걷는 것은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다. 길이 깔려 있고 그 길을 달리는 운전자들의 배려가 있어야 가능하다. 가끔 속도를 늦추지 않고 달리는 덤프트럭이 스칠 때마다 나는 생과 사를 넘나든다. 

 

악양 박경리 문학관의 선생님 동상 아래에는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라고 쓰여 있다. 비움이란 인생 정리. 탈핵도보순례를 하면서 비움 실천을 시작했다. 가지고 있는 것들을 버리고 소비를 줄이는 생활을 했다. 그러나 아직 홀가분하기까지는 어림없다. 

밤에 눈을 감으며 내일 아침 눈을 뜰 수 있을지, 아침에 길을 나서면서 저녁에 거처에 돌아갈 수 있을지 의심하며 매일을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게 불안하게 살다가는 신경쇠약증에 걸릴 것이다. 그러나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고 만나는 이들에게 전심으로 대하고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감사한다면 삶이 덜 후회스럽지 않을까.         

남도 이순신 길 석주관 앞에서 목덜미를 쓸어보니 손수건이 사라졌다. 아~ 마지막 날까지……. 예쁜 걸 좋아하는 취향마저 비워야 하나?       

 

드디어 화엄사 가는 길로 접어 들었다. 마산면 초입에 전동휠체어 한 대가 나를 따라왔다. 운전자인 할아버지가 (배낭에 다시 단) 몸자보를 보시더니 환경단체에서 나오셨냐며, 돕고 싶다고  돈을 주시겠다고 했다. 질색을 했다. 평소에 땀흘려 번 돈이 아니고는 내 돈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깨어있는 마을 분위기에 기분은 좋았다. 조금 더 가는데 백발에 흰 고무신을 신은 여자분이 담벼락 정원을 가위로 손질하고 계셨다. 얼마 전 읽은 정원 관련 책에 나오는 유럽 풍경 같았다. 나도 모르게 뒷모습을 사진 찍었다. 셔터 소리에 뒤를 돌아본 노부인이 이 동네 사람이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해남에서부터 걸어왔다고 대답했다. 그분이 들어와서 냉커피를 마시고 가라고 하셨다. 

‘4km만 더 가면 고지인데….’ 평소의 나라면 목적지를 코 앞에 두고 지체하는 일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절하거나 내려오는 길에 들르겠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냥 들어갔다. 그런  걸 인연이라고 하겠지. 

노부인은 냉커피는 물론 과일과 삶은 감자까지 주시고, 가다 먹으라고 바나나와 살구도 챙겨주셨다. 도보순례를 시작하기 전날, 고정희 시인 생가에서 올케분의 점심 밥상을 받은 후 도보순례 마지막 날에도 모르는 사람이 나를 먹여주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마태복음 6:31~32 중) 

불자인 노부인이 그러셨다. 

“내가 다녀보니까 대한민국에는 좋은 사람들이 더 많아.”

그런 분들이 계시기에 대한민국이 좋은 것이다. 

 

 

DSC04470-지리산-가는-길_resize.jpg

지리산 가는 길

 

 

피의 역사가 골짜기마다 흐르고 민초의 삶이 등성이마다 피어난 지리산 그리고 화엄사로 가는 길은 성스러워야 마땅했다. 그런데 그 길에 쌍산재 앞에서부터 놀랐던 송전탑 행렬이 계속 이어졌다. 상상해 본 적 없는 광경이었다. 한반도 끝에 있는 발전소들로부터 대도시로 공급되는 전기선로가 묵묵히 역사를 품은 지리산 자락을 휘돌고 있었다. 고압전류에 영향 받을 새와 들짐승들과 주민들과 그 모두를 감싸안고 있는 산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백제 성왕 22년(544)에 인도에서 온 연기 존자가 창건한 화엄사는 입구에서 이미, 사는 데 기본으로 중요한 가르침을 주었다. 

 

불견(不見), 남의 잘못을 보려 힘쓰지 말고 남이 행하고 행하지 않음을 보려 하지 말라. 항상 스스로를 되돌아 보고 옳고 그름을 살펴야 한다.

불문(不聞), 산위의 큰 바위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듯이 지혜로운 사람은 비방과 칭찬의 소리에도 평정을 잃지 않는다.

불언(不言), 나쁜 말을 하지 말라. 험한 말은 필경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 악담은 돌고 돌아 고통을 몰고 끝내는 나에게 되돌아 오니 항상 옳은 말을 익혀야 한다. - 법구경   

 

그리고 벽암국일도대선사비 옆과 천왕문 옆에 있는 배롱나무들로 맞아 주었다.   

화엄경에서 이름을 따온 화엄사는 자장율사가 부처님 진신사리 73과를 봉안한 4사자 3층사리탑이 있는 적멸보궁(사찰에서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는 불교건축물)이다. 국보 제67호인 동양제일의 목조건물 각황전이 대웅전보다 더 웅장한 화엄사. 그 옛날 자장 법사, 원효 성사, 의상 대사, 도선 국사, 의천 등이 중창하여 조선 세종 6년(1424)에는 선종 대본산으로 승격한 위용이 지리산의 기운과 어우러져 경내에 가득했다. 

 

나는 화엄사에 처음 가보았다. 홀로 하는 도보순례 대장정의 종착점으로 정하면서도 지리산 종주의 출발지점이란 것 외에는 아무 정보도 없었다. 그런데 이유없이 이끌리듯 구층암으로 올라갔다. 구층암을 막 돌아섰는데 “악” 소리가 나왔다. 죽은 모과나무 두 기둥이 집을 버티고 있었다. 탄성이 터진 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물을 인공의 건축물에 가감없이 합친 과감한 존중 때문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앞에 산 모과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석등에 배낭과 지팡이를 기대놓고 작은 연못 건너편 건물에 앉아 모과나무 두 기둥을 한참 바라보았다. 死(사)와 生(생)이, 죽음과 삶이 한 자리에 있는 풍경이었다. 구층암은 이번 도보순례의 마지막 시간을 맞기에 가장 합당한 장소였다.  

‘핵발전소 없이 안전하게 살자’에서 중요한 것은 핵발전소 없이 보다 안전하게 ‘살자!’였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해남에서부터 구례까지 걸어가 그 순간 ‘살아있는 나’였다. 

 

 

DSC04530-사생조화_resize.jpg

사생조화(死生造化)

 

 

# 에필로그 

도보순례가 끝나고 지리산 자락 청명 집으로 갔다. 탈핵 벗들이 와주었다. 친구들의 환대와 우정과 사랑으로 두 주간 뭉쳐있던 긴장과 불안과 곤핍이 서서히 풀려갔다. 

   

며칠 후 통영의 박경리 선생님 생가에 들러 묘소로 갔다. 

작년 5월과 6월, 아무 것도 아닌 나에게 원주 토지문화관 집필실을 마련해 주신 박경리 선생님, 도보순례 길에 악양의 선생님 문학관에 들러, 꼭 일 년만에 드디어 찾아뵙는 통영의 선생님. 

원주에서는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고 말씀해 주시고, 악양과 통영에서는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라고 되새겨 주신 박경리 선생님. 그분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자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오열로 터져나왔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한 가지씩 소명을 가지고 나왔다면 그것을 완수해야 할 것이다. 선생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나도 정히 그 길을 가야한다면, 그것이 내 운명이라면 그러겠노라고 다짐했다. 

눈물이 멈추자, 선생님 묘소 왼쪽에 솔방울로 흔적을 하나 남겼다. 

‘탈핵’

‘살아있는 것들의 생명은 다 아름답습니다.’라고 하신 선생님이시니 귀엽다고 하실 것이다. 

 

통영에서 차를 타고 달렸다. 

두 주간 길고 뜨거웠던 그 길을 한 발자국씩 떼어 옮긴 고통의 시간들을 되감듯 직진했다. 

하동~광양~순천~벌교~보성~장흥~해남 땅끝마을까지 갔다. 

그리고 18번 국도가 시작된 진도, 지난 4월의 팽목항으로 갔다. 

거기 두고 온 증표를 확인하고는 돌아섰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멈칫멈칫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 결국은 목포신항으로 가게 돼버렸다. 내 의지가 아니었으므로 수동형을 쓸 수밖에 없다. 

다시 세월호를 보자 지난 7년간 휘몰아친 인생의 급류를 감당하기 벅차 눈물이 또 터져나왔다. 

지는 해의 안타까운 열정이 내게 옮겨붙은 듯 즐비한 자본의 대열 뒤 낡고 바랜 세월호를 온몸으로 촬영했다. 언제 해가 지고 말았는지도 몰랐다. 

결국은 어둠 속 세월호 옆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큰 무대의 막이 내린듯 며칠간 기억을 들춰볼 수조차 없이 기진맥진했다. 허공에 떠있는 듯한  몇 날이 지나서야 겨우겨우 조심스럽게 그날의 촬영본을 컴퓨터에 연결했다. 그런데. 그런데 저장장치가 열리지 않았다. 사진을 한 4년 반 동안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 혼과 정신을 담아 사진찍었던 그 일몰의 시간들은 영영 어디로 간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평안했다. 

무언가를 이룰 수 있을 것같던 욕망마저 내려놓아야 한다면? 

물음이 떠오르자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답은 하나지.  

 

비움

 

일곱째별-프로필이미지2.gif

 


  1. 길뜬별 | 남도 순례길 11 – 남원에서 봄바람 따라

    길뜬별 | 남도 순례길 11 – 남원에서 봄바람 따라 # 지난 이야기 2022년 1월, 열흘간 하동에서 부산 고리핵발전소까지 200여km를 걸었다. 2월, 전라북도 정읍시 동학농민혁명 샘솟길 등 60여km를 걸었다. 3월, 전라북도 남원시 산동면 대상리 귀정사로 ...
    Date2022.04.01 Views494
    Read More
  2. 길뜬별 | 남도 순례길 10 - 정읍 동학농민혁명 길을 걷다

    길뜬별 | 남도 순례길 10 – 정읍 동학농민혁명 길을 걷다 # 지난 이야기 2022년 1월, 열흘간 하동에서 부산까지 200여km를 걸었다. 그리고 정읍시 고부면 만영재로 왔다. ☆ 동학혁명모의탑과 은행나무 2022년 2월 3일 목 만영재~동학혁명모의탑 왕복 7.6...
    Date2022.03.06 Views419
    Read More
  3. 길뜬별 | 남도 순례길 9 - 2022년 시작을 도보순례로 2

    길뜬별 | 남도 순례길 9 – 2022년 시작을 도보순례로 2 # 지난 이야기 2021년 2~3월, 울진 망양정~포항 화진해수욕장 7번 국도 102.6km 4월, 팽목항~진도대교 세월호 7주기 추모 도보순례 18번 국도 40km 6월, 해남~보성 18번 국도, 보성~하동 2번 국도,...
    Date2022.03.01 Views524
    Read More
  4. 길뜬별 | 남도 순례길 8 - 2022년 시작을 도보순례로 1

    길뜬별 | 남도 순례길 8 – 2022년 시작을 도보순례로 1 # 지난 이야기 2021년 2~3월, 울진 망양정~포항 화진해수욕장 7번 국도 102.6km 4월, 팽목항~진도대교 세월호 7주기 추모 도보순례 18번 국도 40km 6월, 해남~보성 18번 국도, 보성~하동 2번 국도,...
    Date2022.02.04 Views513
    Read More
  5. 길뜬별 | 남도 순례길 7 - 2021년 끝을 해남에서

    길뜬별 | 남도 순례길 7 – 홀로 혹은 함께 걷다. 2021년 끝을 해남에서 # 지난 이야기 2021년 6월, 해남~보성 18번 국도, 보성~하동 2번 국도, 하동~구례 19번 국도 7월, 보성~구례 18번 국도 8~9월, 해남~진도, 18번 국도 총 380여km 10~11월, 땅끝천년...
    Date2022.01.03 Views463
    Read More
  6. 길뜬별 | 남도 순례길 6 - 홀로 걷다. 낙엽 따라 비우며

    길뜬별 | 남도 순례길 6 – 홀로 걷다. 낙엽 따라 비우며 # 지난 이야기 6월, 해남~보성 18번 국도+보성~하동 2번 국도+하동~구례 19번 국도 7월, 보성~구례 18번 국도 8~9월, 해남~진도 18번 국도 10월, 땅끝천년숲옛길을 걸었다. ☆ 바위산을 타다 2021...
    Date2021.12.04 Views450
    Read More
  7. 길뜬별 | 남도 순례길 5 – 홀로 걷다. (생)로병사(老病死)를 만나며

    길뜬별 | 남도 순례길 5 – 홀로 걷다. (생)로병사(老病死)를 만나며 # 지난 이야기 2021년 4월, 세월호 7주기 추모 진도 탈핵도보순례를 시작으로 18번 국도 40km, 6월, 18·2·19번 국도 해남~강진~장흥~보성~벌교~순천~광양~하동~구례 241...
    Date2021.11.01 Views489
    Read More
  8. 길뜬별 | 남도 순례길 4 - 홀로 걷다. 생각의 꼬리를 물며

    길뜬별 | 남도 순례길 4 - 홀로 걷다. 생각의 꼬리를 물며 # 지난 이야기 2021년 4월, 세월호 7주기 추모 진도 탈핵도보순례를 시작으로 18번 국도 40km를 걸었다. 6월에는 해남~강진~장흥~보성~벌교~순천~광양~하동~구례 240km 7월에는 보성~순천~곡성~구례 1...
    Date2021.09.26 Views510
    Read More
  9. 길뜬별 | 남도 순례길 3 - 홀로 또는 함께 걷다. 역사 위에서

    길뜬별 | 남도 순례길 3 - 홀로 또는 함께 걷다. 역사 위에서 # 지난 이야기 2021년 4월, 진도를 종단하며 18번 국도 40km를 걸었다. 6월, 해남에서부터 다시 18번 국도를 걷기 시작했다. 강진, 장흥, 보성까지 걷고는 박경리 선생님과 <토지>를 기리기 위해 ...
    Date2021.08.25 Views506
    Read More
  10. 길뜬별 | 남도 순례길 2 - 홀로 걷다. 자신의 길을 찾아서

    길뜬별 | 남도 순례길 2 - 홀로 걷다. 자신의 길을 찾아서 # 지난 이야기 정읍에서 나와 땅끝마을로 갔다. 해남~강진~장흥~보성~벌교~순천까지 8일간 160km를 홀로 걸었다. 그렇게 걸어서 눈물이 말랐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걸어서 마른 게...
    Date2021.07.30 Views513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Next
/ 7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