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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별의 다큐 이야기] 세월호 특집 <6년의 기억>

posted May 0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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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별의 다큐 이야기] 세월호 특집 <6년의 기억>
 


그날 온 종일 암막 커튼을 친 채 영화 두 편을 보았다. 이상하게도 두 영화 모두 화장한 유골을 뿌리는 장면으로 끝났다. 영화와 영화 사이에는 전날부터 심취해 듣던 최백호의 ‘부산에 가면 다시 너를 볼 수 있을까~’ 로 시작되는 노래를 들었다.
TV 없이 산 지 오래고 인터넷 검색도 잘 하지 않아서, 오후 다섯 시가 넘어서야 믿을 수 없는 그 참사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도 그 때를 떠올리면 숨이 멎는 듯 가슴을 움켜쥐고 운다. 미안했다. 아이들이 사투를 벌이던 그 시간 내내 아무 것도 모르고 있던 게 너무 미안했다. 속죄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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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 1

 

 

1994년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내 친구는 그 다리 위에 있었지만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1995년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나는 방송사에 있었고, 그 날의 참상을 당일에 프리뷰 했었다.
지하철에 불이 나고, 수련회장이 무너지고, 수많은 인재가 수십 년 동안 반복되지만 과연 지금까지 속속 터지고 있는 대참사의 희생자 중 단 한 사람이라도 고위급 자제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나? 왜 평범한 사람들만 죽어나가는 것일까? 이건 어쩌면 너무 평범한 질문일까? 그렇다면 평범한 우리는 언제나 위험에 노출돼 있고 언제든 죽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아이들아, 죽음이 산재한 이 나라에서 살아남으렴. 반드시 살아남아서 민초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렴. 버티는 게 이기는 것이란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렴.’
그렇게 나는 기다렸다.
삼풍백화점에서 17일 만에 기적적으로 구출된 승현이처럼 세월호에도 단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아있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비록 그곳이 산소가 없는 바닷물속이지만 배가 뭍으로 나오는 그 순간까지 생존자를 기다리기로 했다. 과학이, 이성이 모두 포기하더라도 기다리기로. 우리가 기억하는 한 그들은 죽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바이올린을 조율할 때 기쁜 A와 슬픈 A가 있다고 한다. 약간 높은 음과 약간 낮은 음. 진폭 사이 기분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온 나라 분위기가 단연 슬픈 A였을 그 시기, 그리고 나는 시종일관 D단조였던 2014년의 봄이었다. 

그러나 두 해 전부터 연봉을 모아 준비해 두었던 유럽음악가 묘지순례를 취소할 순 없었다. 그래서 7월과 8월을 유럽의 무덤가에서 보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한국에서 처음으로 간 곳은 서촌갤러리 <예슬이의 꿈> 전시회와 1일 단식으로 동참한 세월호특별법 동조단식 광화문 농성장이었다.
9월부터 11월까지는 윤 감독님과 <기억하라 0416>이라는 미니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참사 당일에 본 두 번째 영화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피아노곡을 직접 연주해 다큐멘터리에 삽입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제작했지만 영상에 직접 참여할 수 있었던 건 그 정도였다. 길담서원 <아! 세월호> 모임에서 연말에 유족들을 초청했을 때도 그 곡을 연주해 드렸다. 바흐의 프렐류드 1번 다장조, 내가 칠 줄 아는 유일한 곡이다. 

2015년 1월, 영만이네에 갔고 26일 안산에서 팽목항까지 도보순례 출발을 함께했다.  
2월엔 성호네에 갔고 종로에서 달빛행진을 했다.  
1주기가 다가올 즈음, 일하고 있던 방송사 아이템 회의에서 세월호 1주기 다큐를 하고 싶다고 했다. 책임 프로듀서가 말했다.
“네가 지금 방송사 분위기를 몰라서 하는 말인데 세월호의 ‘ㅅ’자도 못 꺼내.”
비단 그 일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더 이상 몇 푼 안 되는 돈에 영혼을 팔고 싶지 않았다. 나는 거리로 나왔다. 참사일로부터 만 3년을 잡았다. 3년 탈상 때까지 억울하게 죽은 아이들과 유족들을 위해 뭐라도 하지 못하면 광화문 광장에서 유족들처럼 삭발이라도 하겠다는 각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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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현장 1

 

 

2015년 세월호 참사 1주기, 언제나처럼 혼자 광화문 광장에 나갔다.
갑자기 경찰 벽들이 밀고 들어와 대로를 막고 폴리스 라인 두 개가 세워졌다. ‘이 선을 넘지 마시오.’ 순식간에 차도가 점거되고 저 멀리선 가두투쟁의 깃발이 보였다. 버스는 다닥다닥 붙어 길을 막고 시민들은 골목골목 돌아서 가야만 했다. 몸싸움이 날 것 같아 불안했다. 이순신 동상 뒤에는 실종자 9명의 가족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이 선을 넘지 마시오.’ 그 선을 넘어 광화문을 거쳐 경복궁역까지 오는데 한 시간여 걸렸다. 그날은 내가 최초로 ‘선’을 넘은 날이었다.

다음 날인 4월 17일 밤, 서울광장에서 4160개의 촛불로 세월호를 그려내는 기네스북 도전 퍼포먼스를 했다. 4470명의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한 시간여 서서 ‘촛불 세월호’를 만들었다. 4470명 중 한 사람이었던 나는 이틀째 광화문 정문 앞에서 노숙하는 유족들에게 걸어갔다.
광화문 광장에서 광화문까지 가는 모든 길을 경찰들이 통제하고 있었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유가족과 전화 통화만 하고 돌아왔다. 스티로폼 위에서 얇은 이불만으로 밤을 지새우는 유족들. 삭발과 노숙도 모자라 더 무엇을 해야 할까. 자식이 왜 죽었는지 알려달라는 부모의 질문에 누가 대답을 해줘야 하나.

5월엔 뮤직비디오 <네버엔딩스토리> 제작에 참여한 유족들에게 메이크업을 해주고 녹음을 함께했다.
'그리워하면 언젠간 만나게 되는 / 어느 영화가 같은 일들이 이뤄져 가기를
힘겨워한 날에 너를 지킬 수 없었던 / 아름다운 시절 속에 머문 그대이기에'
슬픔보다 더 강한 위로와 사랑을 우리는 노래했다.

8월엔 팽목항에서 배를 타고 사고 현장 위까지 가본 후 비오는 항구에서 뮤직비디오 <화인> 촬영을 했고, 며칠 후 광화문 광장에서도 노래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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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현장 2

 

 

2015년 12월과 2016년 1월과 3월, 세월호 청문회가 있었다. 너도나도 모른다고만 하던 청문회에서 나오는 길, 시청 앞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휘두르는 지팡이에 맞았다. 아프진 않았지만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다. 
 

 

팽목항-2_resize.jpg

팽목항 2

 

 

2016년 세월호 참사 2주기,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떠오른 생각.
‘1일 단식, 1일 침묵, 1일 절필’
희생자와 유가족의 고통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단식을 하고 그동안 말과 글로 상처 준 모든 사람들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하루 동안 말과 글을 끊기로 했다. 정말 가만히, 가만히, 가만히 있기로.
광화문 광장에서 비를 맞으며 프랑스 자수를 놓는데 모르는 여자와 남자 대학생이 우산을 받쳐주었다. 여학생은 내 옆에 앉아 한 시간 가량 우산을 받쳐주다가 "비 너무 많이 맞지 마세요."라고 당부하고는 갔다. 말도 못하고 울고만 있던 나. 세월호는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도 정을 나누고 도울 수 있게 하는 공감대를 만들어냈다.

마침내 그해 삼복더위에 지금은 사라진 ‘작은집’에서 칩거했다. 거기서 피를 말리며 쓴 <노란 배 세 여자 이야기>는 아직도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9월에는 세월호특별법 개정 특검 의결 촉구 시민대책비상 시국기자회견이 있었고, 10월에는 세월호 참사 900일 문화제가 있었다.
그리고 10월말부터 촛불들이 일어났다. 나는 매주말 광장에서 촬영을 했고 집에 가면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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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 선두에 세월호 유족들

 

 

2017년 1월, 세월호 유가족 연극 <그와 그녀의 옷장> 공연이 있었고, 9일은 세월호 참사 1000일이었다.
 
2월, 광장을 기록한 글로 제7회 조영관문학창작기금을 수혜했다. 바라던 소설이 아닌 르포 부문이었다. 그 상은 하늘이 내게 죽지 말고 쓰라고 그리고 별이 된 세월호 아이들이 내게 준 선물이었다. 다짐했던 3주기 직전이었다. 덕분에 조금은 미안함을 덜 수 있었다.
3월 23일, 탄핵과 더불어 3년 전 가라앉았던 세월호가 바다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너무 오래 걸렸다.
4월 12일부터 18일까지 인사동 토포하우스에서 <우리는 촛불을 들었다> 사진집단 포토청 기록 사진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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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을게

 

 

세월호 참사 3주기, 광화문 추모제 도중 갑작스럽게 인근에서 비정규직 고공단식농성을 시작했다. 나는 카메라를 들고 경찰들과 시민들 사이에서 몸싸움을 해야만 했다. 그리곤 쫄쫄 굶은 채 연대하던 시민들과 밤이 늦도록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9월, 다윤이와 은화의 이별식이 서울시청에서 있었고 유족들은 또 다른 연극무대에 올랐다.
10월, 홀로 목포신항을 찾았다. 거기서 세운 채 올리지 않아 기울어진 세월호를 바라보았다. 3년 만에 올라온 배에 생존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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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양한 세월호

 

 

2018년 2월, 광화문에서 진상규명행동선포대회가 있었다.
세월호 참사 4주기, 서울 콜텍 투쟁장에서 살루스 수녀님과 함께 노란 바람개비가 돌고 있는 안산화랑유원지 추모제에 갔다. 헌화시간에 유족 한 분이 졸도했다. 4년이 지나도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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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4주기

 

 

2019년 세월호 참사 5주기, 광화문 광장에서 유족들은 특별수사단설치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거기서 또 다른 피해자들인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가족들과 故(고)김용균의 어머니를 보았다. 이 나라에는 여전히 죽고 또 죽어가는 사람들이 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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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5주기

 

 

세월호 6주기를 앞둔 4월 11일, 안산부터 광화문까지 차량 시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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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차량 시위

 


2020년 세월호 참사 6주기, 우리 동네 공방에는 황동 리본과 노란 프리지아 꽃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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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6주기

 

 

광화문으로 나갔다. 광장에서 11시부터 13시까지 1인 피켓 시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대규모 집회를 할 수 없었지만 총선 다음 날이었던 그날 아침, 문재인 대통령의 세월호 진상규명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추모 메시지에 희망 한 가닥을 걸어보았다. 416명을 계획했으나 150여 명 모인 사람들이 사회적 거리를 두고 20미터 간격으로 피켓을 들고 섰다. 내 옆에는 공방 주인이, 보이지 않는 저 멀리에는 살루스 수녀님이 나란히 나란히 서 있었다. 우리는 함께 있어 외롭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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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지 않게

 

 

그날 이후 6년이 지났다.    
내 인생은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오는(정호승 시 ‘수선화에게’ 중) 것처럼 나도 어쩌면 외로워서 광장에 나가는 지도 모른다. 그런데 혼자 간 광장에서 홀로 돌아오는 길은 그래도 외로웠다. 하물며 가족이 사라진 집으로 돌아가는 세월호 유족들은 평생 뼈저린 외로움을 가슴에 안고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해마다 ‘4월 16일’은 기억하면 좋겠다. 세월호에서 스러진 이들과 그 가족들이 외롭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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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럿이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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