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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별의 정원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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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담리 정원일기 2 - 대나무에게 구하는 양해

posted Nov 3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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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담리 정원일기 2 - 대나무에게 구하는 양해   

 

 

마침내 내 전용 낫과 톱이 생겼다. 번뜩번뜩 날이 선 흰말 표 낫은 빨간 손잡이 밀착감이 좋았으며 6,600원짜리 270mm 대나무 톱은 가성비 최고였다. 명장은 연장 탓을 안 하겠지만 새 연장을 갖추자 그동안 나의 위험스럽기 짝이 없던 낫질은 점점 손목 스냅 쓰는 법을 터득해 갔고, 어깨와 목의 근육통은 물론 오른쪽 약지에 관절염이 도지는 줄 알았던 톱질은 슬슬 물집 정도로 다져졌다. 

 

다섯 번째 배롱나무는 아래 밭 끄트머리에 있었다. 죽림이 점점 밭을 잠식해 가는 지형이었으니 다른 나무들처럼 대나무에 꽁꽁 둘러싸인 배롱을 구출하는 날은 달래 파종일 이었다. 냉이, 씀바귀와 함께 봄에 먹는 달래를 가을 한복판에 심었다. 쇠스랑으로 뒤엎은 거친 밭에 고랑을 파고 달래 씨앗을 뿌렸다. 한 움큼 손에 쥐고 휘휘 뿌려 흙으로 덮은 달래가 내년 봄에 어떤 모양으로 선보일지 상상도 못했다. 마트에서 파는 다듬어진 달래 말고는 본 적이 없으므로. 해가 뉘엿뉘엿 지자 감독하시던 어머니는 아직 완벽하게 붙지 못한 뼈의 다리로 비척비척 집으로 돌아가시는데 나는 전날 구하던 배롱나무를 향해 반대 방향으로 달려갔다. 

아예 기척이 없을 때는 아무 생각이 없다가 기약이 생기면 설렘과 안달이 동시에 일어난다. 적군에 포위되어 죽을 날만 기다리다 돌연 출현한 아군을 만난 듯, 제 힘으론 벗어날 수 없어 숨 막히는 대숲에서 꿈에도 생각 못 한 특공대를 만난 배롱이 밤새 얼마나 나를 기다렸을까? 애타는 그 기다림에 나는 오일장에서 산 새 톱으로 맹렬히 부응했다. 마침내 아주 잘생긴 다섯째 배롱나무를 인정사정없는 대나무로부터 구출해 주었다. 

 

여섯째와 일곱째 배롱나무는 예초기의 도움을 받았다. 나무들을 가리고 있던 주먹도 안 들어갈 만큼 빽빽한 대나무 숲을 효자 예초기로 초벌한 후 잘린 밑둥과 나무 뒤와 옆쪽의 대나무를 톱으로 잘라냈다. 마침내 밭을 둘러 가지런히 모양을 드러낸 감나무와 배롱나무들의 정렬은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어머니가 배롱나무들을 심으실 때 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때는 대나무도 없었고 어머니도 나처럼 톱질할 기운이 있으셨겠지.  

이제 남은 것은 다섯 째 배롱나무 옆의 두 그루. 촘촘한 대나무 숲을 찬찬히 들여다봐도 좀체 형상을 찾기 힘든 배롱 두 그루를 마저 구출해야 하는데 복병이 생겼다. 집 주변에 있는 거대한 대나무들이었다. 밭 주변의 대나무와는 비교도 안 되는 굵기와 길이의 대나무들은 온 산을 덮고 집마저도 집어 삼킬 기세로 진격해 오고 있었다. 어머니 집 위쪽에 살던 집들은 아래로 이사해 나가고 이제 어머니 집이 맨 꼭대기였다.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은 무서운 속도로 번지는 대나무에겐 천국이었다. 하긴 어느 동식물인들 사람을 달가워하겠느냐만은. 내 배롱나무들만 빼고. 여태 베어진 두릅이나 모시풀, 대나무 입장에서 보면 나는 지옥에서 온 토벌꾼일 것이다. 

 

영화 <와호장룡>과 <군도: 민란의 시대>에 나오는 대나무 숲 배경은 별담리 대숲에 비하면 속이 텅텅 빈 강정 급이었다. 제주 비자림로에 있는 삼나무 숲의 대나무 버전이랄까, 그 울울함이 흡사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대숲은 고적한 침묵과 어둡고 서늘한 기운으로 바람이 불 때마다 써르륵 써르륵 인적을 몰아내고 있었다. 재크와 콩나무에서 거인을 대적하는 재크처럼 나는 270mm 톱 한 자루 들고 열 배 이상 큰 키의 대나무 앞에 섰다. 집을 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남은 배롱나무를 다 구한 다음 집 주변 대나무를 쳐내야 순서가 맞았다. 하지만 내게는 자유로운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창궐로 인해 서울에서 오가는 나는 어머니 안전 경계 대상이었다. 급한 마음에 두 그루 배롱나무를 남겨두고 동쪽 대나무부터 벌목에 들어갔다. 

 

대나무는 벼과(Poaceae) 대나무아과(Bambusoideae)에 속하는 상록성 단자엽식물로 속이 비어있고 나이테가 없다. 20미터가 넘는 대나무 밑단에 톱날을 댈 때마다 나는 다소 숙연해졌다. 매란국죽 사군자 중 하나인 절개와 지조의 상징 대나무를 이현령비현령인 내가 무슨 자격으로 벤단 말인가? 하지만 내게 있는 건 어머니가 계신 집에 햇빛이 들게 해주겠다는 일말의 명분이었다. 나도 예측할 수 없는 나를 움직이는 건 마음의 소리와 대의명분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가슴이 이끄는 대로 살아왔고 내 행동을 지지해 주는 건 나만의 명분이었다. 나는 스스로 이해되거나 납득되지 않으면 행동하지 못했고 그래서 일차적으로 자신을 설득하는 게 매번 가장 어려웠다. 가끔 본능이 몸과 마음을 마비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도 나는 내 무의식을 탐구했다. 대체 얘가 왜 이러나. 그래서 온갖 인과관계와 학설을 주워 갖다 붙여야 직성이 풀렸다. 

 

나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무참하게 빼앗긴 내 청소년 시절 이후 중장년이 되어서도 가슴 찢어지게 아픈, 그래서 눈에 진물이 나도록 그리운 어머니께 못 다한 효도를 하고 싶었다. 아무도 없는 시골에 혼자 사시는 할머니는 그래서 내게는 돌봐드리고 싶은 대상이었다. 한평생 자식들 위해 헌신하다가 시든 옥잠화처럼 되어버린 이를 돌보는 삶, 그게 내가 죄 없는 대나무를 자를 수 있는 명분이었다.    

 

흥부의 박 타는 소리처럼 슬근슬근 톱질을 하면 대나무는 스르르 쓰러지다가 제 무게를 못 이겨 뚜두둑 소리를 내며 땅과 만난다. 휘영청 쓰러지는 대나무의 마지막 춤은 중력과 장력이 조율하며 우아하기 그지없는 선을 그려낸다. 아주 가끔, 토막 내던 대나무의 댓잎이 얼굴을 갈기지만 묵묵히 무저항으로 쓰러지는 대나무 수백 그루를 보며 나는 대나무로 오두막을 짓고 숲에 조용히 살다 대나무 요정이 되는 꿈을 꾼다. 대통에 담긴 맑은 수액을 마시고 습자지처럼 보드라운 속살을 뜯어 먹으며 사는 대나무 요정은 별담리에 별이 쏟아지는 날이면 은빛 날개를 파르르 떨며 어둠 속을 날아다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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